말과 사물과 몸의 시
세계와 존재의 토대가 되는 밑그림에 주목하는 이순현의 시는 주로 사물과 말의 관계에 초점을 두고 있다.
사과라는 말은/-따다/-먹다/-깨물다/-쓰다듬다/-만지다/-문지르다/-벗기다/-핥다/-빠개다/-더듬다/-빨다/등등과/관계를 맺는다//하지만 사과라는 말을/발음하는 순간/입 안에 사과로 꽉 찬다
―「사과와 사과라는 말과」 중에서
"사과라는 말"이 형성하는 결합체와 계열체를 보여주는 위의 시는 사물로서의 사과가 아닌 언어로서의 사과라는 말이 명사의 지위를 가지면서 동사들과 결합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명사와 동사의 결합은 언어가 지닌 관계성의 기본적 요소이다. 이 결합 관계는 따다 먹다 깨물다 등의 동사들 사이에 형성되는 계열 관계와 다시 연결되어 있다. 따다에서 빨다로 이어지는 수많은 말들은 사과라는 말의 명사와 결합될 수 있는 동사의 지위를 가지면서 하나의 계열체를 이룬다. 이 동사들의 계열체는 다만 변별적 자질에 의해서만 그 의미가 형성되며, 따라서 말과 사물 혹은 말과 행위 사이의 관계성은 자의적인 것이다. 결국 1연에서는 구조주의 언어학의 기본 원리를 사과라는 말이 형성하는 동사들과의 관계를 통해 형상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지만"으로 시작되는 2연에서는 이런 기호로서의 말을 넘어서 그것을 발화하는 주체와의 상호 융합을 보여준다. 입이라는 몸의 구조와 그 발화행위 과정에서 말은 그것이 지칭하는 사물과 동일한 질감을 획득한다. 즉 말과 사물 사이의 자의적 관계성은 몸을 경유하면서 상호 융합되는 전환을 맞이하는 것이다.
이순현은 이러한 형이상학적 인식, 특히 말과 사물과 몸의 관계를 통해 존재의 이면을 탐색한다는 점에서 독특한 자기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시인이 포착하는 생의 비밀 혹은 이면에는 개체적 존재의 자기 동일성과 시간성이라는 운명이 도사리고 있는데, 시인은 개체성의 감옥을 돌파하는 가능성으로서 타자의 시선과 사이의 경계와 욕망의 흐름을 모색한다. 한편 그 간극에 주목하여 융합뿐만 아니라 이율배반성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눈뜸-슬픔/애완-슬픔/채팅-슬픔/왕따-슬픔/바꿔-슬픔/원조-슬픔/조폭-슬픔/대박-슬픔/세일-슬픔/베팅-슬픔/판돈-슬픔/콘돔-슬픔/몰카-슬픔/대선-슬픔/파경-슬픔/개발-슬픔/슬픔-미래/에서/와서/걸음/아래/항상/먼저/드러/눕는
―「핵심정리」 전문
결국 이순현의 시는 몸을 통한 말과 사물의 상호 융합, 존재의 운명으로서의 개체성과 시간성, 주름 속의 욕망과 시선의 가능성 등의 테마를 가지며 이는 궁극적으로 존재 및 사물이 지닌 자기 동일성과 타자성의 이율배반으로 귀결되는 것이다.(문학평론가 오형엽)
▶이 책에 대하여
이순현의 시는, 아니 그의 시세계는 의도된 비유기적 구조라 부를 수 있는 독특한 형식의 미덕을 가지고 있다. 즉, 그의 시는 언어와 대상 또는 언어와 세계 사이에서 떠도는 수많은 의존적인 또는 자족적인 이미지들을 하나의 관념 아래 유기적으로 묶지 않고, 비유기적인 그대로 펼치면서 구조화하는 특성이 있다. 그것은 존재의 차이, 거리, 간격을 그대로 인정하고 껴안은 시인의 의식이 작품세계의 바닥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그 차이, 거리, 간격이 시의 세계를 산만하게 하거나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획일성과 일방성을 밀어내고 모든 이미지들이 자유롭게 친화와 불화를 드러내면서 어울리도록 하고, 시의 세계를 역동적이게 한다.―오규원(시인)
*2002년 4월 18일 발행/ISBN 89-8281-504-X 02810
*120*185/176쪽/값5,000원
*작가 연락처:lgreenh@hanmir.com
*담당편집: 김현정, 장한맘(927-6790, 내선 217, 214)
이순현의 시는, 아니 그의 시세계는 의도된 비유기적 구조라 부를 수 있는 독특한 형식의 미덕을 가지고 있다. 그런 만큼 그 차이, 거리, 간격이 시의 세계를 산만하게 하거나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획일성과 일방성을 밀어내고 모든 이미지들이 자유롭게 친화와 불화를 드러내면서 어울리도록 하고, 시의 세계를 역동적이게 한다.―오규원(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