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호 중단편 소설전집을 펴내며
최인호의 소설은 1970년대 이후 한국문학이 거둔 뜻깊은 성과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모더니티의 유동과 예측 불가능성의 형상화라는 점에서 그의 소설은 향후 우리 문학의 중요한 전범 중의 하나로 남게 되었다. 현대사회가 야기하는 병리적 강박이나 각종 매체들이 일상 영역을 잠식해오며 전파하는 환각적 이미지의 포착, 타자와의 정서적 단절과 무관심, 합리성의 외피 밑에 숨어 있는 원시적 파괴적 욕망과 정념의 분출 같은 우리 시대의 민감한 증세에 대해 그의 소설은 선진적이면서 발랄한 접근을 보여준다. 모더니티가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는 우리 시대에 그의 소설은 거듭 다시 파고들어가 채굴해야 할 풍부한 광맥을 은닉하고 있다.
작가의 말에서
이번 중단편 소설전집의 발간은 소위 최인호 문학의 정리가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나는 마지막 주자로서 스타트 라인에 서 있다. 헐떡이면서 달려오는 지친 내 모습을 나는 고개를 돌려 지켜보며 기다리고 있다. 그는 내게 조금이라도 빨리 배턴을 넘겨주려고 필사적으로 달려오고 있다. 나는 이 순간 손을 뻗어 그 배턴을 마악 받으려고 하고 있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오직 결승점일 뿐, 0.01초를 단축하려는 기록도, 1등이라는 등수도 이젠 내게 상관이 없다. 결승점을 통과하여 테이프를 끊을 때까지 심장이 파열되어 찢어질 것 같은 치열함 속에서 달리는 것. 그 문학의 비등점을 향해 나는 다만 끓어오를 것이다. 타오를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날아오를 것이다.
각 권 수록 작품(1967년∼2001년)
1권 타인의 방(1967년∼1972년)
견습환자|2와 1/2|무너지지 않는 집|순례자|술꾼|모범동화|사행(斜行)|예행연습|타인의 방|뭘 잃으신 게 없으십니까|침묵의 소리|미개인|처세술개론|영가(靈歌)
2권 황진이(1972년)
황진이 1|황진이 2|전람회의 그림 1(*―이하 중편은 *로 표시함)|전람회의 그림 2|전람회의 그림 3|무서운 복수(複數)(*)
3권 즐거운 우리들의 천국(1972년∼1977년)
병정놀이|기묘한 직업|전쟁우화|더러운 손|죽은 사람|신혼 일기|즐거운 우리들의 천국|가면무도회(*)|개미의 탑
4권 돌의 초상(1977년∼1982년)
두레박을 올려라(*)|다시 만날 때까지|하늘의 뿌리|돌의 초상(*)|진혼곡|인간희극|방생|위대한 유산|천상(天上)의 계곡
5권 달콤한 인생(1981년∼2001년)
이별 없는 이별|산문(山門)(*)|달콤한 인생|몽유도원도(*)|깊고 푸른 밤|이상한 사람들
젊은 작가들이 읽은 최인호 소설
첫번째 방에서 만난 소년이 애처로운 목소리로 묻는다. 울 아버지 못 보셨어요? 두번째 방의 청년은 왜 우리가 이곳에 있을까? 우린 왜 이곳에 있지? 그건 참 이상한 일이야, 하고 뜬금없이 중얼거린다. 더 깊숙이 들어가면 치매 노인의 몸을 깨끗이 씻기고 노인의 흰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빗겨내리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을 만날 수 있다. 욕실을 뽀얗게 채운 수증기. 백 살이나 먹은 노인은 관목처럼 마른 몸을 여인에게 맡기고서 고즈넉한 표정으로 여인의 노랫소리를 듣는다. 어쩌면 우리는 잠시 그 노랫소리에 취해 나른함에 빠질 수조차 있으리라. 최인호의 소설은 수많은 미로를 가진, 수많은 타인들의 방이다. 그의 소설을 읽는 동안 우리는 번차례로 찾아오는 희열과 전율에 몸을 떤다. 마치 귀신을 만나러 간 소년처럼. ―서하진(소설가)
중학교 3학년 시절에 읽었건만 「깊고 푸른 밤」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도로 번호들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15번 도로, 127번 도로, 129번 도로, 395번 도로 등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미국 서부의 도로 번호들은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에 시달리던 내게는 환각으로 들어가는 문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치 경전의 반복되는 문장들을 읽을 때처럼 읽으면 읽을수록 문장의 뜻은 희미해지고 머릿속에는 서늘한 이미지만이 또렷하게 남았다. 한때는 그걸 도시적 이미지라고 생각했지만, 그 이미지가 전도서의 모랫빛 세계와 닮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는 더 많은 세월이 흘러야만 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 도로 번호들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덧없이 흩어지나 떨어지는 동안에도 반짝이는 갈색 아름다움을 닮았다. 중학교 3학년 시절부터 잠깐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그런 아름다움에 다가가고 싶었지만, 여전히 내게 그 아름다움은 멀리 있다.―김연수(소설가)
작고 평범한 일들이 산산조각나고 재구성되며 마침내 그것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을 때, 그것들이 별안간 이야기의 빛나는 뼈대로 모아질 때 느끼는 희열과 감동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 법이다. 대단히 현대적이며 젊은 감각의, 조용하면서도 슬프고 정열적인 소설을 읽다가 나는 이 책이 어느 누구의 야심만만한 첫 소설집이구나! 싶어 작가의 이름을 기억해두고자 책 맨 앞장을 펼쳐봤다. 그것은 최인호 선생이 이미 25년 전에 쓴 소설들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의 옛 소설을 읽자마자 어릴 적 지붕 위로 던져버렸던 이빨이 생각났고 마치 지금은 있는 힘껏 두레박을 올려야 할 때이듯, 그것을 찾으러 지붕 위로 올라가야 하지 않겠는가, 자못 망설이지 않을 수 없다. 최인호, 그는 문장을 대패처럼 쓸 줄 아는 작가다.―조경란(소설가)
깊고 푸른 밤을 지나, 길 없는 길을 걷고 걸어, 지금은 무지개를 뛰어넘기 위해 먼 거리의 지평선을 내달리는 그가 보인다. 먼길을 돌아 이윽고 도착한 그는 다채로운 생의 시간들을 지나온 늙은 어부가 되어 바닷속 깊숙한 비밀을 나직나직 들려준다. 그의 목소리에는 살갗에 와닿는 짙은 물기와 코끝에 맴도는 은근한 냄새가 들어 있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인생에 대한 어떤 애틋함과 연륜에 푹 빠지게 된다.―천운영(소설가)
[깊고 푸른 밤] 이후 이십여 년의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선생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다채로운 소설들이 긴 시간을 아우르며 섞여 있는 작품집 {달콤한 인생}을 읽다보면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든다. 대숲을 통과해 부는 바람 소리를 들었고 소리없이 밀려오는 검은 비구름을 보았다. 이윽고 후둑후둑 나무 잎사귀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요란스럽더니 지금은 온통 비 비린내와 흙 냄새뿐이다. 우산 하나를 받쳐들고 물안개 피어오르는 산자락 어딘가에 발을 담그고 싶어졌는데 문득 시 구절이 떠올랐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이여. 나는 최인호 선생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였다. 내가 좀 앞질러 태어나거나 선생이 좀 참았다 태어나서 같은 레이스를 뛸 수 있었다면…… 이런 생각을 한 젊은 작가가 어디 나 혼자뿐이겠는가. 하지만 선생은 여전히 같은 레이스를 달리고 있었다. 아주 저 멀리 선생의 등에서 팔락이는 번호표가 보이는 듯하다.―하성란(소설가)
*2002년 4월 30일 발행
*ISBN 89-8281-497-3 04810(set)
1권:89-8281-498-1 / 2권:89-8281-499-X / 3권:89-8281-500-7 / 4권:89-8281-501-5 / 5권 89-8281-402-7
*신국판/1권 368쪽, 2권 320쪽, 3권 320쪽, 4권 392쪽, 5권 336쪽/값 각권 8,500원
*담당편집: 김현정, 장한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