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고양이는 실제로는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어쩌면 찌르찌르와 미찌르의 파랑새보다, 어린 왕자의 B612 소행성보다 더 찾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바람 따라, 마음 닿는 대로 거니는 고양이라니! 이쯤 되면 우리는 작가의 빈곤한 상상력을 탓해야 할 듯합니다.
우리의 비아냥거림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 고양이는 천연덕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봄바람에 취해 눈을 지긋이 감고 한껏 여유를 부립니다. 언제나 화면 가득 빨간 제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른 게 뭐가 어때서? 세상 어디에 똑같은 고양이가 단 한 쌍이라도 있냐고 되묻는 표정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언젠가 이 맹랑한 고양이를 본 적이 있는 듯합니다. 가슴속 깊이 묻어두었던 오래 전 기억이 자꾸 움직거립니다. 마음껏 행동하는, 길들여지지 않는 빨간 고양이. 미지의 세계에 대한 끝없는 동경으로 가득 찬 마투는 우리가 어린 시절 간직했던 한없이 자유로운 정신을 닮았습니다. 물론 요즘 어린이들 모습과 겹치는 까닭도 여기 있습니다.
빨간 마투가 발견한 새알은 새로운 관계의 시작을 알리는 전주입니다. 이제껏 끝없이 거닐던 빨간 마투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새알은 처음에는 제법 맛있는 먹이일 뿐, 아무 의미도 아니었습니다. 그나마 한끼 식사치고는 너무 적어서 불만이었죠. 그래서 새알을 품어서 부화하면 잡아먹으려 합니다.
이 순간, 마투에게 조그만 변화가 생겼습니다. 아무에게도 얽매이지 않던 빨간 마투가 새에게 따뜻한 온기를 건네주었습니다. 나아가 부화한 아기 새에게 애써 잡은 먹이를 먹여 주었습니다. 자신의 온기와 땀을 전해 주는 모습에서 우리는 빨간 마투와 새 사이에 먹이감 이상의 관계를 예감합니다. 휘리릭∼ 날아가 버렸던 새가 다시 곁에 앉았을 때, 둘은 이미 친구가 되어 있었습니다. 자기가 아닌 다른 대상과의 관계에 눈을 뜨며 사회성을 획득하는 순간입니다. 둘은 뒹굴고 깔깔댑니다. 서로에게 기대지만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냥 함께 있는 게 즐거울 뿐입니다. 어느 날, 새가 떠나버렸을 때 그 빈자리는 너무나 커 보입니다. 빨간 마투는 오래도록 기다립니다. 여느 어린이책이 그렇듯이, 우린 새가 다시 돌아올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겨울이 지나고 새가 다시 돌아옵니다. 여기서 끝났다면 『빨간 고양이 마투』는 그저 평범한 그림책으로 머물고 말았을 것입니다. 빨간 마투는 돌아온 친구를 등에 태우고 다시 길을 떠납니다. 숲을 지나 마음 닿는 대로 걸어갑니다. 빨간 마투와 새는 사회적 관계가 자유로운 정신과 얼마나 멋지게 어울릴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어린이는 가족과 선생님과 친구들과의 관계에 눈을 뜨면서부터 사회성을 획득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관계를 주도하는 쪽은 대부분 어른입니다. 어른은 어린이가 세상을 잘 모른다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가르치거나 길들입니다. 『어린 왕자』에서 늑대는 사랑이란 서로를 길들여 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른들은 자주 서로라는 단어를 삭제합니다.
따라서 사회적 관계와 자유로운 정신은 물과 기름처럼 잘 어울리지 못합니다. 사회적 관계를 넓혀갈수록 빨간 고양이는 마음속 가장 밑바닥에 꼭꼭 갇혀 버립니다. 모두들 그렇게 어른이 되어 갑니다.
하지만 빨간 마투와 새는 일방적이지도, 가르치려 들지도, 무언가를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사회적 관계를 맺었지만 한 곳에 머무를 이유가 없습니다. 한결 멋들어진 수염을 휘날리며 자유롭게 제 길을 갑니다.
아이들의 자유로운 정신을 누릴 수 있게 해 주는 사회적 관계가 과연 실제로 가능할까?
『빨간 고양이 마투』를 펴내면서 내내 들었던 생각입니다.
2000년 알퐁스 도데 어린이문학상 수상작!
작가 에릭 바튀는 그림책 『내 나무 아래에서』로 우리에게 친숙한 작가입니다. 에릭 바튀의 작품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작가의 글과 그림은 극도로 절제된 리듬과 은유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원색이 주는 풍요로움 사이로 간드러진 유머를 숨겨놓았습니다. 일관된 스타일을 유지하는 작가의 작품이 나올 때마다 변화와 발전의 흔적을 찾아내는 일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입니다. 『빨간 고양이 마투』는 흐트러짐 없는 일관성과 눈부신 변화의 정점에 있는 그림책입니다.
『빨간 고양이 마투』는 2000년 알퐁스 도데 어린이문학상(2000 Prix des enfants de Daudet : 아카데미 콩쿠르 회원 미셸 투르니에가 선정) 수상작입니다. 독자들은 첫 눈에 이 책이 수상작으로 뽑힌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작가는 빨간 마투를 화면 가득 배치합니다. 빨간 마투는 똑똑한 느낌을 주는 쫑긋한 귀와 호기심 가득한 동그란 눈과 고집스러워 보이는 탱탱한 수염과 장난기 가득한 입술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한 장의 그림으로 등장인물의 성격을 단박에 보여주는 그림책은 드뭅니다. 여기에 선홍빛 털과 불그스레하게 번져 있는 배경색은 시종일관 눈길을 잡아끕니다. 붉은 색은 자유분방하고 톡톡 튀는 캐릭터의 이미지를 일관되게 보여 주면서, 동시에 각 장면에 어울리는 느낌도 살려 놓았습니다. 길을 걸을 때는 당당한 느낌을 주고, 새알을 품었을 때는 따뜻한 느낌을 주고, 친구를 기다릴 때는 고요하고 차분한 느낌을 주고, 친구와 함께 다시 길을 나설 때는 미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부풀게 해 줍니다. 자세히 보면 작가는 빨간색을 바탕에 깔고 아주 조금씩 다른 색을 덧칠해 놓았습니다. 이렇게 섞인 색이 이야기의 흐름과 절묘하게 어울리고 있습니다.
화면 구성에서도 작가는 멋진 경지를 보여 줍니다. 아스라이 지평선이 보이고 그 한켠에 나무 두어 그루 또는 들꽃 한 무더기가 바람에 나부낍니다. 그리고 더 멀리 하늘엔 낮이나 밤을 알리는 해와 달이 조그맣게 매달려 있습니다. 무심한 듯한 소도구들은 계절과 장소와 빨간 마투의 마음에 따라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소도구들을 배경으로 언제나 빨간 마투가 클로즈업되어 있습니다. 이런 화면 구성은 빨간 마투의 거침없는 자유로움을 극대화시켜 줍니다.
『빨간 고양이 마투』는 어린이 그림책을 이야기할 때 두고두고 거론될 책이 분명합니다.
옮긴이 최정수
1970년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우리말로 옮긴 어린이책은, 『꼬마 니콜라의 쉬는 시간』 『키리쿠와 마녀』 『폭력, 저리 가!』 『내 나무 아래에서』 등이 있습니다.
마음껏 행동하는, 길들여지지 않는 빨간 고양이.
아무에게도 얽매이지 않던 빨간 마투가 새알을 발견하면서 사회적 관계를 알게 됩니다. 따뜻한 온기를 새에게 건네주며 다른 대상과의 관계에 눈을 뜨는
빨간 마투. 빨간 마투와 새는 사회적 관계가 자유로운 정신과 얼마나 멋지게 어울릴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