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마음을 오래도록 붙잡은 사람이 크리스 반 알스버그이다. 하루키는 크리스 반 알스버그의 경이로운 상상력과 그림에 흠뻑 빠져 그의 전 작품을 일본에 번역 소개해 오고 있다. 젊은 작가 김영하의 번역으로 국내 독자와 처음 만나게 되는 알스버그의 작품 『벤의 꿈』과 『리버벤드 마을의 이상한 하루』를 보면 하루키의 열광에 충분한 이유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알스버그의 세계는 독특하다.
흑백의 고즈넉한 마을을 강타한 번뜩이는 상상력의 습격
어느 날, 미국 서부의 한적한 리버벤드 마을은 강렬한 빛으로 뒤덮인다. 건물이건 사람이건 그 빛에 닿기만 하면 끈적끈적하고 질긴 줄에 친친 감긴다. 보안관 네드 하디는 이상한 빛을 쫓다가 드디어 줄로만 만들어진 거대한 거인을 발견한다. 괴물을 덮치려는데 다시 빛이 번뜩이더니 모든 것이 정지하고, 화면은 책 밖을 보여 준다. 거기 한 꼬마가 색칠공부그림책에 열심히 색칠을 하고 있다. 색칠공부그림책의 표지에는 보안관 네디 하드가 그려져 있다.
『리버벤드 마을의 이상한 하루』는 형체는 있으나 질량을 확인할 수 없는 윤곽선으로만 그려져 있다. 가는 철사로 뼈대만 꾸며 놓은 조소를 마주하는 느낌이다. 이야기의 흐름이 급박하게 전개될수록 그림은 허공에 떠 있는 듯하다.
『벤의 꿈』과 『리버벤드 마을의 이상한 하루』는 각각 꿈과 책(텍스트)이 현실과 만나는지 순간을 그리고 있다. 일견, 꿈과 텍스트가 현실과 관계를 맺는다는 이야기는 많은 그림책의 소재로 씌어 왔다. 예컨대 한 아이가 꿈속 여행을 다니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는 이야기가 그렇다. 그런 어린이책에 나오는 두 세계는 분명한 경계를 두고 있다. 아이들은 짧은 순간 환상 세계를 경험하며, 이를 통해 현실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는 틀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작가 크리스 반 알스버그는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선긋기가 어른들이 만든 설정이라고 주장한다. 이 선긋기에 따르자면 아이들은 잠시 비현실의 영역에서 부유하다가 언젠가는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작가는 두 작품을 통해 경계선을 지워버린다. 현실이 꿈(텍스트)으로 전화하고 꿈(텍스트)이 다시 현실로 확장하는 순간을 절묘하게 포착해 내고 있다.
더 나아가 작가는 『벤의 꿈』의 미로 같은 그림과 『리버벤드 마을의 이상한 하루』의 질량을 알 수 없는 그림으로, 현실이야말로 모호하고 흐릿한 세상이 아니냐고 되묻는다. 견고한 현실을 헤집는 작가의 힘이 어른들에게까지 울림을 주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두 그림책을 잇는 사선의 연장선상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와 작가 김영하의 작가정신을 찾아내는 건 무리일까?
<옮긴이의 말>
리버벤드라는 전형적인 미국 서부 마을에 어느 날 끔찍한 재앙이 찾아든다. 이상한 빛이 등장하고 끈적거리는 줄이 말과 사람과 건물을 꼼짝달싹 못 하게 망쳐 놓기 시작한다. 보다 못 한 보안관이 민병대를 꾸려 마을 밖으로 달려나간다.
이야기는 얼핏 상투적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일러스트레이터로 더 유명한 크리스 반 알스버그의 작품 『리버벤드 마을의 이상한 하루』은 그러나 그런 뻔한 상투성에서 저만치 벗어나 있는 작품이다. 어둡고 긴박하게 전개되던 활극은 돌연 멈추고 이야기는 책 바깥으로 튀어나가 크레용을 쥔 어린이를 비춘다. 그림책 속의 리버벤드는, 그리고 그 용감한 보안관은 실제로 그림책 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이전의 모든 이상한 점들은 해명되기 시작한다. 어째서 마을의 길들은 어디로도 통하지 않았는지, 빛은 왜 항상 지평선 위에서만 빛나고 있었는지 따위. 그러므로 이 『리버벤드 마을의 이상한 하루』은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이면서 동시에 책과 독자의 관계, 이야기와 현실과의 관계를 묻고 있는 성인용 우화로도 읽히는 것이다.
옮긴이 김영하
1968년 경북 고령에서 태어나 연세대 경영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호출』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굴비 낚시』 『아랑은 왜』 등 많은 소설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