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만이 보여줄 수 있는 힘과 깊이와 아름다움
90년대 한국 문화계를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는 영상문화의 번성과 문자문화의 위기에 대한 각종 담론들을 단숨에 불식시켜줄 작품이 출현했다. 문학만이, 오직 문학만이 보여줄 수 있는 힘과 깊이와 아름다움이 담긴 작품 - 바로 신경숙의 두번째 장편소설 『외딴방』이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문학동네』 창간호(94년 겨울)에 처음 선을 보인 뒤 총 4회에 걸쳐 분재된 이 작품은 독자와 언론의 열렬한 관심과 호응은 물론 문단에서도 다양한 진영에 걸쳐 일치된 찬사를 이끌어낸 문제작으로서 이 작품의 등장은 혼미를 거듭해온 90년대 작단을 향해 문학다운 문학 소설다운 소설을 요구해온 우리 모두에게 완벽한 해갈의 기쁨을 선사해줄 것이다. 더욱이 작가는 자신의 영혼의 내출혈의 소산인 이 작품을 계간지에 발표된 그대로 출간하지 않고 섬세하게 다듬고 보완해서 고도의 문학성과 품격을 지닌 미학적 세공품으로 완성시켜놓고 있다.
열여섯에서 스무 살까지, 그 시간의 빈터
『외딴방』의 문학적 의미와 가치는 다양한 각도에서 성찰될 수 있겠지만 우선 작가 개인의 이력과 관련하여 이 작품이 신경숙 문학의 또다른 시원을 밝혀주는 중요한 이정표 구실을 한다는 점에서 시선을 모은다. 『외딴방』 이전 작품에서 찾을 수 있는 신경숙 문학의 밑자리는 거센 도시화와 산업화의 밀물에 밀려 점차 쇠락과 소멸의 길을 걷고 있는 농촌 공동체의 다사롭고 넉넉한 품이었다.(그것의 가장 극명한 표현이 첫 장편 『깊은 슬픔』에 나오는 이슬어지라는 환상적 아름다움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작가의 유년 시절의 체험과 긴밀하게 맞물린 그 공간은 대도시의 번잡하고 이기적인 삶의 방식과 대비되어 한편으로 아련한 향수와 동경을, 다른 한편으로 애절한 정서적 울림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사람들은 정작 신경숙의 언어의 연금술에 도취된 나머지 그녀의 농촌체험과 성년의 도시체험 사이에 어떤 단절 혹은 공백이 가로놓여 있다는 점을, 다른 어떤 것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고유의 체험이 은밀히 숨겨져 있다는 점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외딴방』이 우리 앞에 선을 보이고서야 우리는 비로소 신경숙이 그토록 드러내놓길 꺼렸왔던, 그러나 언젠가는 기필코 말해야만 했던 유년과 성년 사이의 공백기간, 열여섯에서 스무 살까지의 그 시간의 빈터 속으로 입장할 수 있게 되었다. 『외딴방』을 통해서야 우리는 신경숙 문학의 또다른 시원, 그 아프고 잔인했던 시절, 열악한 환경 속에서 문학에의 꿈을 키워나가던 소녀 신경숙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 작가의 자폐적 기질, 아름다움에 대한 끝없는 동경, 삶의 속절없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고요히 수납하는 태도 등이 어디서 발원했는지를 알고 싶다면 우리는 이 작품을 펼쳐들어야 한다. 『외딴방』이 이 모든 물음에 대해 의미 있는 해답을 던져줄 것이다.
외롭게 죽어간 한 가여운 넋에 대한 진혼가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내성의 문학이라 부를 수 있는 신경숙 문학의 정점이자 제목 그대로 외딴방에서 외롭게 죽어간 한 가여운 넋에 대한 진혼가라 할 수 있다. 신경숙은 잊고 싶었던 그러나 잊을 수 없는 그때 그 시절 그 장소로 되돌아가서 그 쓰라린 한 장을 다시금 언어로써 복원해낸다. 그래서 소설 속에서 그녀의 문장은 한 문장에서 다음 문장으로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의식을 갉아들어오는 주저와 망설임 곤혹감에 의해 끊겼다가 간신히 이어지고 같은 자리를 맴돌다가 다시 한걸음 내딛는 식으로 힘겨운 행보를 거듭한다. 『외딴방』에서의 작가의 고백성사는 자신의 체험을 질료로 한 글쓰기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과 그럼에도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는 의지 사이의 위태로운 줄타기를 보여준다. 거기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언표될 수 없는 것을 탐지해내는 고감도의 언어, 아니 끝없이 침묵을 향해 접근해가고자 하는 언어, 그래서 끝내 무(無)에 이르고자 하는 언어이다. 그녀의 문장 여기저기서 빈번히 등장하는 말없음표는 그런 의미에서 말로 채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나타내고자 하는 감정의 과잉을 지시하기보다는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말해야 한다는 강박이 자아낸 안타까움의 소산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생성중인 소설, 현재진행형의 글쓰기의 한 전범
이 작품의 메타픽션적인 구성 방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말을 할 수 있다. 소설을 쓰는 작가가 작품의 전면에 등장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이 작가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새로운 기법에 매력을 느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내적 필연성 때문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 필연성은 다른 말로 작가의 진정성으로 표현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작가는 작품과 일정한 거리를 취한 채 객관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자가 아니라 끊임없이 이야기에 개입해 들어가서 그 의미를 반추하고 그것의 필연성과 정당성에 질문을 던진다. 소설 속의 이야기는 작가의 머릿속에서 완료된 상태로 있다가 지면 위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글쓰기에 의해 계속 다른 의미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즉 그녀의 이번 소설은 생성중인 소설, 현재진행형의 글쓰기의 한 전범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글쓰기는 이 작품에 강한 밀도와 구체성을 부여해주는 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하여 우리는 이 작품에서 한 작가의 불우했던 지난 시절에 대한 평면적인 고백이나 미화된 과거 한 시절의 추억담이 아니라 운명의 호출 앞에서 존재증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에게 허여된 유일한 방식인 글쓰기를 통해 온힘을 다해 싸우는 한 영혼의 초상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외딴방』에서도 작가는 사위어가는 노을처럼 소멸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들의 슬프고도 적요한 운명을 단정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그것은 시간의 심연 속으로의 여행인 동시에 들끓는 감정을 냉각된 문체로 옮겨놓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녀는 기억의 퇴적층 속에 파묻힌 과거의 편린들을 하나하나 재발굴하고 거기에 아름다운 시적 후광을 부여한다. 그럼으로써 외면하고만 싶었던 과거의 고통과 비애는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수렴되고 잊고자 했던 과거의 한순간은 기억의 응달에 박혀 있는 돌부리가 아니라 다시금 살려내야 할 값진 재보가 된다. 그것은 상처의 치유와 극복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신경숙 문학의 성숙을 나타내는 가장 명료한 징표가 아닐 수 없다.
지난 한 시대의 거대한 풍속화이자 뛰어난 성장소설
떠나온 시간 속을 거슬러올라가는 글쓰기의 모험은 그러나 특정인의 체험에 갇힌 패쇄회로에 머물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이 작품에서 보게 되는 것은 몇몇 인물의 운명의 부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난 한 시대의 거대한 풍속화이다.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개발독재의 뒷받침을 받고 진행된 천민자본주의의 추악한 뒷모습을, 그리고 80년 광주의 비극과 삼청교육대의 인권유린을 그 어떤 폭로수기보다도 더 생생히 접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가까운 한 시대를 총체적으로 형상화한 역사소설이자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이후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가장 감동적인 노동소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어둡고 답답한 현실 속에서 내밀하게 작가의 꿈을 간직한 한 소녀의 진솔한 내면 기록이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한 편의 뛰어난 성장소설로도 읽힌다. 거기엔 직업훈련원과 공장과 야간고등학교로 이어지는 고단한 노동현장의 풍경이 있고 사진작가가 되기를 꿈꾸는 혹은 소설가가 되기를 소망하는 근로여학생들의 힘겨운 나날이 있다. 또 노조 결성을 둘러싼 사용자와 노동자 간의 숨막히는 대결이 있고 폭압적인 군사정권의 야만적인 행태가 노출되기도 한다. 신경숙 소설의 서정적 음조 이면에는 이처럼 세상의 폭력성과 악마성에 대한 첨예한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이 작품은 예각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깊은 우물과 백로들의 저녁숲, 그리고 외딴방
신경숙의 모든 작품이 그러하듯이 이 작품 역시 다채로운 상징과 은유가 긴밀하게 요소요소에 박혀 빛을 발하고 있지만 아마도 여러 번 반복되어 가장 선명한 인상을 남기는 이미지로 쇠스랑을 빠뜨린 우물과 저녁숲에서 백로들이 고요히 날개를 접고 자는 풍경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신경숙의 외딴방은 바로 이 두 이미지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깊은 우물의 폐쇄성과 자기충족성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산업화의 대세에 밀려 쇠락해가는 농촌 공동체와 생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유년기를 상징한다면 백로들이 자는 저녁숲은 작가가 동경해 마지않는 미래의 아름다운 삶, 도달하고픈 미적 실존의 평화로움을 표상한다. 그러나 우물의 어둠에서부터 빠져나와 백로의 숲에 이르기 위해선 외딴방이란 통과제의적 시련의 지대를 거쳐야만 하는 것이다. 그 외딴방의 고립과 고독 속에서 누에고치와도 같이 힘든 시간대를 무사히 통과하고서만 작가가 될 수 있는 운명의 열쇠는 주어지는 것이다. 과연 작중의 소녀는 고생 끝에 그 외딴방으로부터 떠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거기엔 보상이 필요하다. 바로 소녀 신경숙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희재언니의 죽음이 희생제물로 요구되는 것이다. 희재언니의 죽음은 단순히 나 아닌 타인의 죽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일정 부분을 담보한 존재의 죽음을 의미하며 따라서 그녀와 무관한 죽음이 아니라 그녀의 개입이 불가피한 죽음이다. 자살한 희재언니의 방문을 밖에서 걸어잠근 게 바로 그녀라는 점은 - 그 무의도성에도 불구하고 - 두 존재의 운명적 얽힘을 강력하게 환기시킨다. "왜 하필 나였느냐"는 소녀 신경숙의 울음 섞인 항변은 어차피 그녀일 수밖에 없었다는 운명의 가혹한 본질에 대한 통찰에 다름아니다. 소설 『외딴방』의 탁월성은 바로 이러한 과정을 짐짓 담담하게, 그러나 사실은 치열하게, 지극한 자세로 그 극한까지 파고들었다는 점에 있다.
대상을 나타나게 하면서 사라지게 하는 글쓰기의 비의
마지막으로 한마디. 언어의 명주실로 정확하고 치밀하게 짠 이 한 시대의 풍속화 앞에서 우린 무슨 소리를 할 수 있을까. 이미 정평이 난 그녀의 풍부한 울림을 담은 문체나 감성을 상찬하는 것을 넘어서 우린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 걸까. 많은 사람들은 이 작품의 자전적 성격에 주목할 것이다. 그러나 과감하게 이야기해서 작가 신경숙은 드러내기 위해서 글을 쓴 게 아니라 감추기 위해 썼으며 그녀의 자기노출은 궁극적으로 또다른 자기은폐임을 우리는 인식해야 하지 않을까. 그녀는 모든 것을 말했으되 실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글쓰기에 대한 글쓰기, 그 무한 중첩을 사유하다 보면 글쓰기의 대상은 점차 지워지고 남는 것은 자신의 존재의 뿌리를 향해 다가가고자 하는 어떤 열망만이 남게 된다. 그래서일까. 작가가 작품 속에서 희재언니를 항상 희미한, 그러면서도 투명한, 그래서 금방이라도 지워질 것 같은 존재로 표현한 것은. 작가는 희재언니를 한편으로 망각의 심연에서 불러내면서 다른 한편 한사코 지워없애는 이중작업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대상을 나타나게 하면서 사라지게 하는 글쓰기의 비의. 이 비밀스러운 힘을 포착할 때 우리는 신경숙 문학의 또다른 매력 앞에 서게 된다.
『외딴방』!
제11회 만해문학상 수상
「평론가 30인이 뽑은 90년대 대표작가와 작품」 『출판저널』 선정
「20세기를 대표하는 소설 50선」 『조선일보』 선정
「90년대 대표소설」 『시사저널』 선정
「90년대를 움직인 30권의 책」 『뉴스플러스』 선정
「청소년들이 읽어야 할 좋은 책」 대한출판문화협회 선정
새로운 리얼리즘의 가능성을 연, 최근 우리 문학이 거둔 최고의 수확!
과거의 경험을 오늘의 현실에 비추어 섬세하게 그리고 치열하게 반추하고 있는 『외딴방』의 다양한 형식 실험은 결코 내용에서 분리된 기교적 장난이 아니다. 눈물과 땀 속에 피처럼 선택된 다양한 글쓰기의 전술 그 자체가 순간순간 작가가 중층적 현실과 대면하는 결단의 문제로 되는 이 소설에서 우리는 작가의 윤리의 문제가 그대로 작품의 미학적 문제로 전이되는 희귀한 창작의 현장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외딴방』은 기존의 문학적 방법에 의거하는 듯 그를 넘어서 우리 문학의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였다. 요컨대 이 작품은 내용과 형식 양면에서 새로운 리얼리즘의 가능성을 연, 최근 우리 문학이 거둔 최고의 수확 가운데 하나다.
- - 제11회 만해문학상 심사평 중에서
개정판 작가의 말
내가 쓴 작품을 발표하고 난 뒤에 가장 많이 읽어보는 사람은 아마도 나일 게다. 예외가 있었으니 이 작품이었다. 95년도에 책이 출간된 뒤에 지금껏 단 한 번도 정독을 하지 않았다. 그저 몇 번 책표지를 쓰다듬거나 물끄러미 바라봤을 뿐이다. 마음이 어찌 그리 되었다. 지난봄에 상·하로 나뉘어 있는 작품을 한 권으로 합본하기로 출판사와 합의하고 새 교정지를 받아 정독과 수정을 동시에 진행했다. 쉬다가 다시 하고 쉬다가 다시 하는 사이 두 계절이 훌쩍 지나갔다.
어느 날인가 이 작품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있는 성신여대의 김륜옥 선생과 심야에 긴 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우리말이 풍부하게 끌어안고 있는 긴 여운과 독일어가 요구하는 정확한 뜻이 내가 쓰고 있는 문장에서 수도 없이 충돌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두 나라가 쓰고 있는 언어의 차이에서 비롯된 부분이기도 하나 그 충돌 지점은 새삼 내게 시가 아닌 산문 정신을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 이 작품을 수정하는 데 그분의 말씀이 많은 지침이 되었다. 감사드린다.
『풍금이 있던 자리』 이후로 오로지 소설쓰기에 몰입해 있었던 지난 칠, 팔 년이 단 하루로 느껴지는 요즘이다. 문학으로부터 입은 은혜와 피로가 동시에 느껴졌다. 이 작품을 다시 읽는 시간이 내겐 휴식이었다. 잘 쉬었으니 이제 다시 새 섬광 속으로 건너가야겠다.
1999년 11월에
신경숙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