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코코 문학의 대표자 뷔일란트의 탁월한 풍자문학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파문으로 정치권의 도덕성 문제가 또다시 문제되고 있는 시점에서 인간의 정치적인 욕망을 날카롭 게 풍자한 우화가 나와 화제가 되고 있다. 우리들의 속물근성을 고대 그리스의 한 도시 압데라를 배경으로 알레고리화한 「당나 귀 그림자에 대한 재판」은 마치 우리의 부끄러운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해 읽는 이들을 낯뜨겁게 한다. 18세기 독일 인문주 의자 크리스토프 마틴 뷔일란트(Christoph Martin Wieland, 1733~1813)의 「압데라 사람들 이야기」의 제4권을 레오 레온하르트 가 삽화를 섞어 우화화한 이 작품은 당나귀 그림자를 둘러싼 재판이 어처구니없는 국가적 싸움으로 번져가는 우스꽝스럽고도 슬 픈 과정의 형상화이다.
작가 뷔일란트는 남부독일 비버랏하 부근의 오버홀츠하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경건한 가정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처음에 는 열렬한 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한 작품만을 썼으나 영국과 불란서의 계몽주의 문학을 접하면서 그의 관능적 향락주의의 태도 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그의 관능적인 묘사는 여전히 기품을 잃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해학과 풍자의 미학을 가미하여 로코코 문학 의 정수를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1813년 뷔일란트의 문학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그는 흔히 속물근성이라 불리는 모든 것, 즉 앞뒤가 꽉 막 힌 옹졸함, 소시민적 소극성, 옹색한 겉치레 예절, 편협한 비판, 거짓 점잔 빼기, 천박한 안일, 주제넘은 위엄, 다수란 이름을 빌린 세속성 등을 거부했다”며 뷔일란트 문학의 날카로운 풍자성을 극찬했다.
당대 인간들의 어리석음, 고대 그리스 시민들을 모델로 뷔일란트는 고향에서 시 행정에 참여한 경험이 있었는데, 그 경험을 토 대로 편협하고 태만한 시민정신 때문에 당국에 예속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시민들을 풍자하려 했다. 억압된 정치상황하에서 이러한 계몽주의의 신념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변장술이 필요했다. 그는 고대 트라키야 지방의 압데라 시민을 등장인물로 택했다. 특기할 만한 점은 동시대인들이 그리스인을 인간적 완성의 원형으로 보았던 것과는 다르게, 뷔일란트는 그리스 세계에서 영원한 속물근성의 모델을 취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빙켈만은 고대 그리스 예술의 본질을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위대”에 있다면서 찬양했다, 그러나 뷔일란트는 역사서의 숨겨진 뒷면을 읽고 그리스를 신성시하는 데 반대하면서 당대 인간들의 약점을 드러내는 모델로서 그리스를 택했다.
뷔일란트의 소설은 사회사적 관점에서 볼 때 계몽주의에 있어서 시민적 문화교육 문제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획득하는 것이다. 즉 이 작품은 계몽주의 이래 최초로 행해진 시민적 자기비판이 예술적으로 성취되었음을 뜻한다. 「압데라 사람들 이야기」는 시민적 서술문학의 첨두에 등장하는 것이다. 사실주의 시대의 고트프리트 켈러의 젤트빌라 사람들이나 뒤렌마트의 노부인 의 방문에 등장하는 귈렌 시의 시민들의 이야기가 이와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압데라 사람들 이야기」 중에서도 제4권에는 뷔일란트 문학의 풍자성이 가장 명료하고 첨예하게 나타난다. 더욱이 레온하르 트가 원문을 축약하고 단순화하여 우화화한 「당나귀 그림자에 대한 재판」에서는 삽화가 무대와 인물들을 명징하게 도해해내고 있어 흥미를 더한다.
아직도 계속되는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사악함 압데라 시의 유일한 치과의사 슈트루치온이 어느 날 이웃마을로 왕진 을 가기 위해 당나귀몰이꾼 안트락스의 당나귀를 빌려 길을 떠난다. 찌는 듯한 무더위에 휴식을 취할 겸 그늘을 찾던 슈트루치온 은 참다 못해 당나귀 밑에 드리워진 그늘에 주저앉는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동행했던 당나귀 주인이 자기는 당나귀 만 빌려줬지 당나귀 그림자까지는 빌려주지 않았다며 당나귀 그림자 사용료를 더 내라고 하는 것이다. 치과의사는 어이가 없어서 완강히 거부한다. 결국 두 사람은 왕진을 포기하고 압데라로 돌아온다. 사건은 재판에 부쳐지고, 도시 전체는 서서히 어처구니 없는 진통에 휩싸여간다.
이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동기로 인해 사건은 치과의사 편과 당나귀 주인 편이 서로 나뉘어 권력다툼으로까지 불이 번지고 시 민전쟁으로 치닫게 되어 압데라 도시국가를 파멸의 문턱까지 끌고 간다.
그러나 뷔일란트는 이 세련된 풍자극을 희비극적인 웃음으로 보상한다. 압데라 사람들은 마지막에 그들 스스로 모두 쑥스럽게 웃을 수밖에 없다. 싸움의 발단이었던 당나귀가 그만 죽어버린 것이다. 비로소 압데라 사람들의 ‘바보들의 행진』은 그치고 사람 들은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다. 이 어리석은 인간들을 바라보며 웃을 것인가? 울 것인가? 뷔일란트는 결국 웃음을 선택한다. 그는 인간적인 우둔함을 사악하게 묘사하기보다는 동정심을 느낄 정도로 우스꽝스럽게 묘사해버린 것이다.
결국 압데라 시는 뷔일란트에게 그저 ‘상징적 세계』가 아니라 역사적 거리에 구애받지 않는 모델이며, 아이러니컬한 유희 가 운데 과거의 한때를 현재 속에, 현재를 과거 속에 반영하려는 수단이 된다. 따라서 압데라 시에서 벌어지는 바보들의 이야기는 현재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시대의 이야기나 마찬가지이며, 압데라에 대한 비판은 독자의 자기인식과 자아비판을 자극하게 된다.
어느 시대에나 이와 같이 인간의 어리석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일은 빈번하게 발생했던 것이다. 가령 우리의 정치상황만 보 더라도 12?12나 5,6공의 비리가 모두 이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사건에 해당하는 일이다. 훨씬 악랄한 범죄자가 오히려 비분강개 하여 다른 죄수를 응징하는 우스꽝스런 모습이 지금도 끊이지 않고 연출되고 있음이다. 이에 다시는 12?12나 비자금과 같은 부 끄럽고도 슬픈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경계한다는 의미에서도 「당나귀 그림자에 대한 재판」은 중요한 계몽서로 자리매김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