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
현실의 변화는 컸다. 현실사회주의권의 몰락과 더불어 진행되기 시작한 이념의
동요는 우리 사회의 문화적 정신적 성격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이러한 현실의
변화 앞에서 그동안 변혁의 책무에 충실하던 진보적 작가들이 적지 않은 동요을
겪었다. 그들은 이념지표의 불확실성 속에 대안 모색의 일환으로서 지난 연대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자세를 보였다. 최근 출간된 김형수의 시집도 이러한 문학적
지형도의 연장선상에서 읽힌다. 두 번째 시집을 낸 지 3년 만에 출간한 "빗방울에
대한 추억"은 민중적 정서에 깊이 뿌리 내려 인생의 애환을 노래하고
희망을 절규했던 이전의 시편들과는 달리, 시대상황의 방황 속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는 시인의 진지한 성찰의 편력을 엿볼 수 있다.
시인은 지난 시대의 민중시인들이 메시지에
집착한 나머지 시가 응당 가져야 할 미학에 대해서는 소홀했던 점을 반성하면서,
또한 오늘의 많은 시들이 아름다움만을 추구함으로써 모순에 가득찬 현실로부터
비켜서거나 개인적인 일상성에만 매몰되는 경향을 묵살하면서, 삶 속에 깃든
따뜻한 인간애를 인화하는 한편 시대의 변화에 흔들리는 자신에 대한 직시를
통해 세상과 삶의 진실을 향햐 나아간다.
"빗방울에 대한 추억"을 감싸고
있는 것은 한때 역사의 홍역에 젊음으로 응답했으나 실현을 보지 못한채 후유증을
모질게 앓고 있는 이의 쓸쓸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희망과 좌절,
기쁨과 슬픔이 빠르게 교차되어 가는 이 시집의 색깔은 무어보다 시인이 겪고
있는 마음의 병과 관련된다. 그 마음의 병은 "얼마큼이나 걸으면 시대의
아픔을 잊을 수 있을 까 얼마큼이나 멀어지면 역사의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남한강
기행 -歸巢」)라는 시구절 속에 간명하게 표현되어 있듯이 시대의 아픔이나
역사의 고뇌같은 정신의 지각변동으로 인한 것이다. 이는 시집 전편을 휘감는
마음의 자리이기도 하다.
그것은 "맑스가 무너지고 레닌이
쓰러지고 또한 / 우리들이 꿈꾸었던 혁명의 신화들이 물거품"(「멈출수
있다면」)된 데에서 출발한다. 시인의 삶 속에 여전히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역사의 후유증은 시인을 순순히 세상 속으로 섞여들지 못하게 한다. 다만
자신을 "서둘러 냉전기를 산 지상의 실패한 혁명가"(남한강 기행
- 산촌 순례)라고 부르며 쓸쓸히 시간을 통과하게 한다.
한 시대를 가득 채웠던 거창한 이념이나
명분이 사라짐은 "나의 안테나 고장난 건 아닌가 / 화면이 흐려서 아무것도
안 보이"(「안테나」)고 "세상은 좋아지고 나만 나빠졌다"(「함께했다고
생각하면 마음 편하다」)는 쓸쓸한 열패감을 낳는다. 더욱이 먹고 살기 팍팍한
이 땅에서 "손가락 하나 다친 데"(「내 나이 그새」)없이 살아온 것이
"그래 잘한 짓인가 / 자랑해도 될 일인가"라고 잡문하며, "후광도
물러앉고 늦봄도 김남주도 떠나간 세상 / 쭉정이들만 남아 하품하는 틈에"초라한
몰골로 끼어 있는 자신을 바라본다. 그런 자신을 "돼지야 난 도야지야"(「소크라테스보다
행복한 돼지를 미워하며」)라며 자기비하에 빠진다.
그렇게 "그림자 길게, 아주 길게
드리워놓고"(「남한강 기행-산촌순례」)황혼이 만지작거리는 대로 영혼을
방치한 채, 마음의 병에 시달리는 시인은, "삶의 길도 시의 길도 꽉 막혀
막막한 날"(「가전 마을에 쉬어 가며」)정처없이 삶의 바깥으로 마음의 발길을
옮긴다. 남한강의 발원지로부터 오장폭포, 고수부지, 산촌 순례를 거쳐 수묵화를
구경하며 내면의 상처를 낯설게 바라볼 반성의 거리를 갖는다. 나아가 마음
바깥의 구체적인 현실과 지난 시절을 마주하게 된다. 그 속에는 김영감의 술노래가
있고, 수천 군중의 소나기박수를 맞는 임수경이 있고, 백골단이 무서워 떠는
가두시인과 9시 뉴스를 보는 요양중인 시인과 구걸하러 오는 고르비가 있고,
문익환 목사의 장례식이 교차한다.
회자정리하듯 과거의 망령들과 결별을
준비하는 시인은 마치 잎진 미루나무들이 잔가지를 부딪쳐, "욕심 하나로
부지해온 자기의 존재를 뉘우치"(「남한강 기행-歸巢」)듯이 스스로의 삶을
갱신하려는 의지를 다진다.
"시를 쓸 수 있는 자리 / 이 자리
끝까지 피하지 말자 / 세끼 밥을 굶는 한이 있더라도 / 스자 쓰자 마음껏 써제끼자"(「학정을
견디며」)
현실의 삶 속에서 시인은 기쁨보다는
슬픔을 껴안고 있지만, 그 슬픔이 좌절로 곤두박질하지 않고 좌절속에서도
희망의 빛을 결코 놓지 않은 채, "절망에 지친 땅강아지처럼" "파묻히면
나오고 파묻히면 또 나오고"(「길고 긴 침체의 늪에서」)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새처럼 내 자리에 다시 가 앉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돌아갈 것이다 / (.....) / 텔레비와 잡지와 산더미 같은 시와 재미없는
소설과 / 또 들을거리와 걱정거리와 / 그리고 일감과 가족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한 주먹도 안 되는 / 그 적이 바로 내 안에 든 나라면
/ 돌아서라 다시 서울을 향해"(「겨울비」). 그리고 "강하고 억센 시
한편을 읽었으면 좋겠어"(「길고 긴 침체의 늪에서」)라며 삶과 문학에 대한
새로운 탐색의 의지를 지핀다.
이처럼 "빗방울에 대한 추억"은
지난 역사가 육신과 영혼에 새겨놓은 고뇌에서 출발하여 다시 삶의 현실로 발길을
돌리기까지 나태한 현실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젊은 영혼의 결연한 의지를 담고
있다. 이 시집이 누리는 성찰하는 시의 아름다움은 바로 그로 말미암은 것이다.
섣부르게 의망을 노래하는 시들이 호황을
누리고 있는 요즈음 이 시집은 지긋하게 수면을 향해 떠오르는 잠수함의 동체를
보여주듯 독자들에게 묵직한 감동을 안겨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