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자 은행원인 류환의 첫 장편소설
『상자 속의 생』이 출간되었다. 지난 몇 년간 우리 문단에서 시에서 소설로 전업한
몇몇 작가들의 시도가 대부분 감각과 감성에만 의존하는 한계를 보여왔다면
류환의 이 소서은 오랜 수련과 만만치 않은 내고을 엿보게 해주는 역작이다.
이제까지 현대사회에서 자본의 전일적
지배가 야기하는 권력과 욕망의 문제를 다룬 담론들은 수없이 많았으나, 은행이라는
구체적인 조직을 문학 공간의 전면으로 끌어들여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정치-돈-권력의
추악한 메커니즘을 본격적으로 파헤친 소설을 보디 드물었다. 류환의 『상자
속의 생』은 전문직업인의 생생한 육성으로 현장의 문제를 리얼하게 들추어낸다는
점에서 우리 소설문학의 신지평을 열어놓고 있다. 또한 개인과 가족의 일상적
문제에 집착하는 소설들이 득세하는 요즘 풍토에서 정치권력과 조직의 은밀한
역학관계와 거기에 얽힌 무수한 대립관계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보기
드문 남성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도 그 의의가 남다르다.
예순 시간 동안의 추적기
『상자 속의 생』은 현재 프리랜서로 일하는
나가 수년 전 가을에 일어났던 일 - - 평범한 은행 심사부 심사역으로 근무하며
소설을 쓰기도 하는 나에게 느닷없이 들이닥친 사건을 회상하는 추리 형식의
소설이다. 그 사건이란 입행 4년차 선배이며 촉망받는 중앙지점장인 이동진의
돌연한 죽음으로 시작된다. 그를 죽음으로까지 몰고간 어음사고의 배면에 깔린
음모와 배신의 실상이 나의 눈앞에 밝혀지기까지의 예순 시간이 흥미진진하고도
숨막히게 전개된다. 중앙지점장 이동진은 은행 안에서 화자의 든든한 울타리이면서
행내 사조직 광우회를 이끌며 은행 개혁을 주도하는 실세로서 카리스마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최연소 이사 자리를 노리던 그의 야심은 총선을 앞둔 정치권과
재계의 첨예한 이해관계 앞에 죽음을 대가로 치르며 꺾이고 만다. 그 틈새로
금융기관을 매개고리로 한 정계, 기업간 유착관계가 암시되고 지역여론의 결사반대에도
불구, 환경에 유해한 화학공업단지 조성을 서두르는 대기업의 흑심, 사채 등으로
왜곡된 금융시장구조, 수신고 경쟁의 허실 등이 극사실적으로 그려진다.
현미경적 시각으로 미세하게 파고드는
리얼리티
이 소설의 중요한 특징은 무엇보다 그
사실성에 있다. 그 세계를 잘 아는 전문가가 현장의 체험을 바탕으로 보통사람의
눈으로는 알아채기 힘든 비열한 음모의 징후들을 양파껍질을 벗기듯 하나씩
드러내는 솜씨는, 이 소설을 단지 소설로만 읽기에는 아쉬움을 느끼게 할 정도로,
체감적이며 현실과 밀착되어 있다. 두 전진 대통령의 비자금 파문이 사회적
절망감을 안겨주고 있는 이즈음 은행-기업-정치권력-사채업자-선거자금이라는
한국식 부패와 비리의 고리를 실감나게 폭로함과 동시에 보이지 않는 검은
손, 부정권력의 온실인 지하금융의 실체를 육감적으로 파헤치면서 이 소설은
현미경적 시각으로 돈과 권력이 삶에 미치는 아득한 영역까지 미세하게 파고드는
리얼리티를 보여준다. 이러한 리얼리티는 강한 리얼리티는 강한 저널리즘적
요소에 의해 더욱 빛을 발하는데, 예컨대 공해문제에 따른 환경보고서같은
부분은 이 소설을 문학작?품을 넘어 우리에게 많은 지식과 자료를 제공해주는
정보집으로 읽히게 할 정도이다. 또한 작가는 돈과 권력의 문제에서 환경문제,
UR문제까지 세기말의 총체적인 사회 문제들로 시선을 확장함으로써 광범위하고
깊이 있는 사회인식을 짐작케 한다.
"저 커튼 뒤에서, 조용하지만 위험한
것이 움직이고 있다"
『상자 속의 생』은 표면적으로는 돌연한
한 죽음의 배면에 깔려 있는 권력암투의 비밀들을 밝혀나가는 초리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이 시대와 인생의 숨겨진 비밀을 찾고자 하는 또하나의 묵중한
주제를 담고 있기도 하다.
화자인 나는 이 시대를 신성(神性)이
사라진 시대, 신(神)은 광고를 통해서만 현현하는 시대라고 진단한다. 아버지에
관한 소설을 쓰고 있는 화자는 신성 - 부성(父性)이 부재한 시대에 아버지 찾기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을 자주 갖는다. 화자는 어릴 적 아버지의 자살이
자신 때문이라는 뿌리 깊은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고 그로 인해 아내와 별거중이다.
신이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중심은 무엇일까. 화자는 탐요그러운 소비와 신제국주의적
자본의 논리가 이 시대의 중심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주변인으로
남을 수밖에 업슨 우리들의 모습과 무한복제가 가능한 자본의 배타적 지배권앞에서
아버지 찾기는 의미가 없어진다. 남는 것은 바닥 없는 허무주의뿐. 이동진의
죽음에 얽힌 비릿한 음모와 배신의 냄새를 맡으면서 화자가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밤중 어두운 숲속에서 마주친 낮선 존재에 대해 느끼는 정체 모를 공포와도
같은, 신-아버지를 잃어버린 시대에 자본이 뿜어대고 있는, 보이지 않는 저
끔찍한 힘이 아닐까. 몸에는 몹시 해로우나 우선 맛보기엔 지독하게 달콤한
유해색소 같은 왜곡된 자본의 유혹이 삶의 곳곳에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저 커튼 뒤에서, 조용하지만 위험한
것이 움직이고 있다."
도미노게임처럼……
이 소설에는 은행 안의 인물들이 무수히
등장하고 있다. 그 인물들의 움직임이 빠르게 전개됨으로써 남성적 세계에 대한
힘있는 묘사와 이야기로서의 날렵한 재미가 동시에 있다. 이 소설의 큰 장점
중의 하나인 이것은 또 한편으로는 조직이라는 거대한 힘 앞에서 방향을 찾지
못하고 마치 조종하는 힘을 의식하지 못한 채 조종당하고 있는 꼭두각시처럼
무력한 우리들의 슬픈 초상을 보는 듯해 씁씁하기까지 하다. 도미노게임처럼
한 죽음에서 촉발된 연쇄반응, 하나의 벽이 무너지면서 드러나는 추악한 진실,
그 추악함 앞에서 대책 없이 내팽개쳐지는 등장인물들. 그러나 이동진의 죽음으로
밝혀진 진실들이 정녕 그것으로 끝일까? 무너지면 다른 하나도 무너지고, 이렇게
차례대로 무너지는 것들, 도미노게임의 끝은 우리 삶에서 있기라도 한 걸까?
첫 장편소설 『상자 속의 생』을 통해서
이야기꾼으로서의 능력을 한껏 과시하고 있는 작가 류환은 부산에서 태어난
건국대 무역학과를 졸없했다. 1987년 무크지 『현실시각』에 「어느 테러리스트에게」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하였고, 1990년에는 『민둥산의 하룻밤』이라는 시집을
펴내기도 했다. 1983년 한 시중은행에 입사한 뒤 지금은 하나은행 부산지점에
근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