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한 감성의 분출을 보여주는 유강희의 첫시집
유강희의 첫시집 "불태운 시집"이 전달하는 감응은 실로 대단하다. 약관의 나이였던 198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어머 니의 겨울」이 당선되어(당시 심사위원:김종길 김현) 번득이는 시재(詩才)를 한껏 과시하면서 시단의 집중적인 주목을 받았던 그 가 등단 이후 9년 만에 내놓은 첫시집은 치열한 열정과 맑디맑은 순정성을 균제된 형식미로 담아낸 빼어난 시집이다. 9년이라는 세월의 무게가 이 한 권의 시집에서 참으로 성숙된 완성미로 표출되고 있는 것은 그가 세월의 중심부에서 젊음의 힘과 아름다움 을 오직 시쓰기의 숭엄한 작업에 전부 쏟아부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므로 유강희의 첫시집 "불태운 시집"은 형이상학적 수 사와 현란한 비유, 불필요한 감정의 과잉 등과는 거리가 먼, 요즘 보기 드물게 정직한 감성의 분출을 보여주는 젊으나 원숙한 시 편으로 가득 차 있다. 젊은 시인 유강희는 1967년 전북 완주에서 태어나 원광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8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어머 니의 겨울」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고통스러운 세상을 물들이는 슬픔의 강력한 감염력
"불태운 시집"에 실린 유강희의 시들은 슬픔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슬픔을 길어올리는, 슬픔을 끌어안아 마침내 세상과 사 물의 속내를 따뜻하게 밝혀주는 시들이 유독 많다. 막내의 슬픈 얼굴(「막내」), 사막의 피라미드보다 슬픔이 크다(「장미 가시 위에 쓴 遺書」), 슬픔을 먹고 자라는 조선낫(「조선낫」), 얼마나 큰 슬픔의 물결이간대(「금강 하구에서」), 한 칼에 / 슬픔 을 벨 수 없다면 / 별 수 없는 일(「파도리」) 등 그의 시들 중 여러 곳에서 등장하는 슬픔이라는 말은 단지 개인적인 감정의 어 휘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눈에 비치는 온갖 사물들과 나아가 삶 자체를 끌어안는, 즉 대상들에 대한 지독한 사랑을 의 미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가 포착하는 세상의 슬픔이란, 실향 피멍 든 어머니의 가슴 아버지가 휘두른 한 번의 쇠망 치에 죽은 늙은 흑염소 노인 등 일상의 친숙한 존재와 풍경들 속에 묻어 있으나 예사롭지만은 않다. 시인은 슬픔을 방치하거나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세상의 슬픔도 싹둑싹둑 자르는 / 그 낡고 못생긴 엿장수 가위가 / 되고 싶고, 그런 마음으로 詩를 쓰고 싶은(「엿장수 가위」) 열망을 지니고 있으며, 그리하여 슬픔이란 것도 가끔 꺼내어보는 / 어릴 적 흑백사진처럼 정겹게만 느껴(「그 술집」)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슬픔을 노래하는 그의 시는 맑고 따뜻하다. 세상의 여 리고 힘없는 사람들의 슬픔 속으로 스며들어가 진심으로 하나가 되려는 그의 시는 바로 고통스러운 세상을 물들이는 슬픔의 강력 한 감염력을 지니고 있기에 따뜻한 사랑의 시학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가 뛰어난 시적 재기(才氣)를 보이며 힘겹게 토해 내는 시들이 마음속 절망의 그림자를 환히 비추는 힘을 발휘하는 것도 슬픔과 고통 속에서조차 대상에 대한 따뜻한 사랑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소월과 백석을 잇는 청아하고 아름다운 절창
생기 있는 시적 감수성과 빼어난 상상력이 돋보이는 유강희의 시는 멀리는 소월과 백석(白石)을, 가깝게는 신경림과 송수권 의 시를 계승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선배시인들의 상상력을 자신의 경험 속에서 빼어나게 육화시킴으로써 눈이 번쩍 뜨 일 만큼 청아하고 아름다운 절창들을 여럿 보여주고 있는 유강희는 90년대 후반에 새롭게 주목받는 젊은 시인으로 손색이 없다. 우리에게 따뜻하고 생명력 있는 건강한 시와의 행복한 만남을 그의 시는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