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마술로 펼쳐지는 집요한 언어탐구자의 고뇌와 절망
시집『순례』는 오규원 시인의 첫 시집이다. 오규원 시인의『순례』를 비롯한 초기 시세계는 위반과 전도의 해체주의로 이해되는 바 이 시집의 1부에 실린「순례」연작시는 이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고정적이고 관습화된 일체의 것을 거부하고 뒤집으며 안주할 줄 모르는 방황의 시들로 채워진「순례」연작시는 집요한 한 언어탐구자의 숭고한 고뇌와 절망이 정밀한 언어의 마술로 펼쳐진다. 이는 오규원 시인의 전복의 기법에 의한 해체주의 시론과 일치하는 세계이다. 따라서 언어 그 자체와 사물에 대한 진지한 탐구와 그로 인한 좌절과 탄식은 그의 시의 필연적인 결과로서 인간 실존과 삶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의식으로까지 승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언어에 대한 그의 집요한 탐구는 존재론적 은유라고 부름직한 시작법을 통해 초기시의 세계를 지배한다. 추상과 비실재를 실체로써 간주하는 이러한 인식은 시의 구체성을 획득하는 방법이다. 추상적 기호의 언어를 인격화·실체화함으로써 그의 언어는 색깔과 냄새를 지닌 살아 있는 실재로 형상화된다. 문학평론가 김준오씨는 이러한『순례』의 시세계에 대해 "언어를 집요하게 탐구대상으로 하고 언어를 독특하게 해체주의적으로 육화시킨 점에서 오규원 시는 우리 현대시사에서 예외적인 자리에 놓인다. 그의 초기시는 매우 상징적이고 상징적인 것만큼 시의 깊이를 획득하고 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시집『순례』는 해체주의적 시론으로 집약되는 오규원 시인의 초기시의 특징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우리 시사(詩史)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시집임에 틀림없다.
오규원 시인은 1941년 경남 삼랑진에서 태어나 부산사범과 동아대 법대를 졸업했으며 현재 서울예전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968년『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으며, 『분명한 사건』『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사랑의 감옥』등의 시집과 산문집『가슴이 붉은 딱새』를 펴냈다. 현대문학상, 연암문학상, 이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