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백한 영혼이 부르는 마녀의 노래
1988년(청하 刊)에 출간된 김혜순 시인의 첫 시집『어느 별의 지옥』은 죽음의 질서에 대한 항의의 언어로 충만하다. 이 시집에서 다양한 변주를 통해 드러나는 죽음의 이미지는, 시인이 죽음을 단순한 종말이 아니라 끈임없는 지속과 영속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죽음에 대한 이러한 독특한 인식은 한편으로는 끔찍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능숙한 솜씨를 자랑하는 것이기도 하다. 시인 특유의 냉소와 아이러니, 짐승의 울부짖음과도 같은 신경질적인 외침, 그리고 육체적·생리적 체험들을 과장해서 드러냄으로써 얻어지는 희극적 효과 등의 시적 방법을 통해 김혜순 시인은 죽음의 극복이 아닌 죽음 그 자체에 대한 철저한 인식을 냉엄하게 보여준다.
죽음은 영원히 실재하며, 삶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마스게임 같은 것이라는 도저한 인식은 죽음은 곧 되살아남이라는 종교적 인식을 부정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그 철저한 부정은 죽음은 절대로 끝나지도 변질되지도 않은 채 운명을 지배한다는 인식이다. 이토록 도저한 죽음의 상상력은 역설적으로 순백한 영혼이 지닌 고백성사와도 같다. 시집 곳곳에 배어 있는, 삶과 죽음에 던지는 저주의 말과 마녀의 주술은 오히려 순백한 삶과 항상 깨어 있는 정신을 추구하는 시인의 고결한 영혼의 울림인 것이다.
김혜순 시인은 1955년 경북 울진에서 태어나 건국대 국문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현재 서울예전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97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입선하였으며 1979년『문학과 지성』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또 다른 별에서』『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우리들의 음화』『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