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뒷면에 숨겨진 경이로운 진실을 섬세하게 포착
진보와 발전의 논리가 시의 내면을 장악하던 80년대에 가혹한 역사의 중압으로부터 비롯된 상투성을 극복한 몇 안 되는 시인으로 주목받았던 고형렬 시인의 첫시집『대청봉 수박밭』은 직관적인 힘과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시인 자신이 체험한 삶의 섬세한 순간들을 포착함으로써 개성적인 시세계를 구축한 시집이다.
그는 일상을 무심히 보아넘기지 않고 사소한 사물들과 관심을 기울일 필요조차 없는 평범한 관계라고 할지라도 그 근원과 현상을 동시에 바라보며 관념과 기억과 현실에서의 삶의 내용을 동시적으로 파악한다. 즉 그는 현실과 당위의 뒷면에 숨쉬고 있는 경이로운 진실을 효과적으로 포착해내고 있는 것이다. 분단구조의 규범과 그 상황을 구원하고자 하는 일체의 담론들을 관념적인 것으로 파악하며 오히려 흔한 일상 속의 삽화들, 평범한 인물들의 무심한 삶에 주의깊은 시선을 보내고 있는 그의 시들은 시대와 사회의 제반 문제를 미학적으로 극복하는 성과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혼탁한 현실 너머의 훼손되지 않은 근원적 세계를 지향하고 있으며 그 세계의 한가운데에 그의 고향이 숨쉬고 있음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고향에서 뒤섞여 살던 사람들의 삶의 결들은 곧 그에게 언어의 실감을 제공하는 질료가 되고 있는 것이다. 가난한 삶의 문턱을 넘나들던 고향의 이웃들과 함께 체험한 삶의 근원적인 것들을 그의 시는 섬세하게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고형렬 시인은 1954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속초 사진리에서 성장했다. 1979년『현대문학』에 「장자(莊子)」외 4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대청봉 수박밭』『해청』『해가 떠올라 풀이슬을 두드리고』『서울은 안녕한가』『사진리 대설』『바닷가의 한 아이에게』『마당식사가 그립다』, 3인 시집『포옹』, 장시집『리틀 보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