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운명
쓸쓸한 영혼의 따뜻한 거처, 인간을 위무하는 고매한 운문정신
야만의 80년대를 거쳐오면서 독특한 상상력과 감수성으로 시대적 고뇌를 탁월하게 시화했던 하종오 시인의 최근 시의 변화를 뚜렷이 보여주는 아홉번째 시집『사물의 운명』이 출간되었다.
그는 이번 시집에서 기존에 그의 시세계를 장악했던 것들, 즉 세상살이의 비합리성에 대한 슬픔과 분노, 고통받는 시대와 소외된 사람들을 아프게 끌어안던 따스함 대신에 사물 속으로 깊숙이 걸어들어가 사물의 운명과 맞대면하며 교감을 나누고 생명의 꿈틀거림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유미주의적인 시세계를 보여준다. 사물과의 친근한 교감 속에서 쓸쓸한 영혼의 따뜻한 거처를 마련하고 버려진 존재들을 보듬고 위무하는 것, 그리하여 아름다운 서정시의 들판을 꾸미고 가꾸는 것. 하종오의 이번 시집은 그가 그간의 수많은 절편들을 통해 추구한 고매한 운문정신의 빛나는 절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사물의 몸을 쓸어안고 그 안과 밖을 넘나들며 내 몸과 사물이 하나가 되어 삶이 완결된 세계를 구축하는 것, 바로 그것을 지향하는 그의 순결한 시정신이 시집 곳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하종오 시인의 시정신의 변화의 한 주기를 마감하는 시집
하종오 시인은 자서(自序)에서 "사물이 내 생을 지배"한다고 쓰고 있다. 그의 생을 지배하는 사물이란 무엇인가. 그는 사물의 운명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표제작「사물의 운명」에서 시인은 꽃과 칼의 대립적 이미지를 선명히 드러낸다. 갈등하는 시인의 내면의 두 양상과 그것의 조화를 모색한 이 시는 사물 나아가 삶의 본원적이며 숙명적인 속성을 상징한다. 이는 곧 시인 자신의 숙명이기도 하며 그의 시세계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것은 최근 그가 추구하는 운문정신의 발현과 위기이며, 이전 그의 시를 장악했던 민중주의와의 갈등과 대립이다.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를 비롯한 초기 시집에서 하종오 시인은 민중적 삶과 투쟁에 대한 집중적인 탐구로 즉물적인 서정의 차원을 뛰어넘는 미학적 성취를 이루어왔다. 그러나『님詩篇』과 『쥐똥나무 울타리』를 거치면서 그의 시정신은 변모하기 시작한다. 즉 생의 고통과 경이를 발견하고, 현실의 삶과 초월의 꿈을 넘나들며 인간을 위무하는 고매한 운문정신을 노래하는 유미주의적 시세계로 변화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번 시집『사물의 운명』은 그 변화의 연장선에서 시인 자신의 내부에 자리잡은 운문정신의 지향의지를 보다 심층적으로 체계화하며 장황한 서사의 위험을 탈피한, 생생한 이미지가 살아 있는 시집으로 자리매김될 만하다. 자신의 내면적 갈등과 고통을 구체적인 사물의 몸 속으로 투영시키며 그는 자신의 시정신의 변화의 한 주기를 마감한다. 내 발길은 강으로 나아가는데 / 마음이 나를 거리에다 세운다(「마포」)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 운문정신을 지향하는 시인의 내면 속에는 숙명과도 같은 갈등이 내재하고 있다. 그것은 시인의 운명이다. 원심력과 구심력을 동시에 안을 수밖에 없는 만물의 속성처럼 삶이 그러하며 시도 마찬가지이다. 하종오 시인은 그러한 숙명에 대한 깊은 통찰과 예리한 인식을 기반으로 존재를 따뜻이 위무하는 시편들을 쏟아놓고 있다. 시집『사물의 운명』은 그가 이전에 수많은 절편들을 통해 구축해놓은 민중지향적 시세계에서 인간주의적 세계로의 변화의 정점에 위치한다.
하종오 시인은 1954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다. 1975년『현대문학』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1980년부터 <反詩> 동인으로 활동했고, 1983년 신동엽 창작기금을 수혜했다. 시집『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사월에서 오월로』『분단동이 아비들하고 통일동이 아들들하고』『꽃들은 우리를 봐서 핀다』『정』『깨끗한 그리움』『님詩篇』『쥐똥나무 울타리』 등이 있으며, 굿시집『넋이야 넋이로다』, 시극집『어미와 참꽃』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