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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러 평전 - (자아를 위한 분투, 그리고 개인심리학의 탄생)
The Drive for self
에드워드 호프먼
김필진, 박우정
글항아리
2019년 7월 12일 발행
580쪽 | 140*210 | 양장
9788967356477
정상
28,000원

역사적 맥락에서 재조명하는 알프레트 아들러의 삶과 격동의 시대

프로이트와의 결별 이후 개인심리학의 정립까지
아들러의 삶의 여정을 가장 치열하고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1930년대 이후 미국에서의 삶 집중 조명

한때 서점가에 불었던 아들러 열풍도 사그라드는 추세다. 아들러 심리학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책이 나오면서 다소 생소한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이자 정신의학자 알프레트 아들러가 사람들에게 친숙한 인물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과연 아들러와 그의 이론을 제대로 이해했느냐는 또 다른 문제일 것이다. 이 책은 알프레트 아들러라는 인물과 그의 개인심리학 이론을 새롭게, 그리고 깊이 있게 다룬다.

아들러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전기인 이 책은, 현장 심리학자이자 전기 작가로 미국 예시바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대중을 상대로 긍정 심리학에 대한 강연을 펼치고 있는 에드워드 호프먼 교수의 저작이다. 그가 1994년에 쓴 이 책은 아들러의 전생애를 한 권에 담고 있으며, 아들러의 개인심리학 이론이 세상에 등장하기 이전부터 첫 등장과 발전까지의 과정을 모두 보여준다.

개인심리학은 아동의 열등감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한다. 열등감의 자극은 전반적인 심리학적 움직임이 열등감을 보상하거나 또는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총력을 기울이게 한다. 이 타고난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모든 아동은 인정받고 격려받는다고 느낄 필요가 있다는 게 아들러 개인심리학의 핵심이다. 따뜻하고 다정했던 정신의학자는 우리에게 인간은 사회적 감정, 즉 동료애, 동지애, 우정, 공동체, 사랑을 위한 능력을 타고났으며, 삶에서 중요한 것은 성적 욕구가 아니라 삶의 초기에 느끼는 무력감과 열등감이라는 것을 일러주었다.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전기 작가. 1976년 미시간대학교에서 심리학과 심리 교육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81년부터 플로리다주 할리우드 파빌리온 정신병원의 수석 심리학자이자 브라질 상파울루의 메토디스타 유니버시아드, 독일 베를린의 메르키셰스 심리 훈련소 등에 재직하며 오랜 기간 임상심리학자로 활동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일본 도쿄대학교, 간사이대학교, 리쓰메이칸대학교 등에서 객원 심리학 강사를 역임했으며, 2003년부터 뉴욕 예시바Yeshiva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심리학을 가르치고 있다. 또한 대중을 상대로 긍정 심리학에 대한 흥미로운 강연을 펼치고 있다. 『인간이 될 권리: 에이브러햄 매슬로 전기The Right to be Human: A Biography of Abraham Maslow』 『빌헬름 라이히: 내일을 꿈꾸었던 남자Wilhelm Reich: The Man Who Dreamed of Tomorrow』 『순진한 공상들: 아동기의 정신적 경험과 영감적 경험Visions of Innocence: Spiritual and Inspirational Experience of Childhood』 등 많은 책을 펴냈다.
서문 │ 한국어판 서문 │ 머리말

제1부

1장 빈에서 보낸 어린 시절
2장 급진적인 의사가 되기까지
3장 독립
4장 정신분석학과 함께한 초기
5장 프로이트와의 결별
6장 개인심리학의 탄생
7장 세계대전
8장 심리학의 혁명가
9장 붉은 빈
10장 오스트리아를 넘어: 국제적 명성

제2부

11장 사회적 격변기의 신세계
12장 깃발을 꽂다
13장 귀국
14장 미국 재방문
15장 대중화의 대가
16장 뉴욕으로의 이주
17장 "폭죽 같은 책들"과 군중 정치
18장 불황기의 번영
19장 미국과 유럽의 변화
20장 아버지의 분노

끝맺는 말 │ 감사의 말 │ 주 │ 옮긴이의 말 │ 찾아보기
 자아를 위한 분투, 그리고 개인심리학의 탄생

아들러의 아들을 감동시킨 유일무이한 전기 
 
이 책의 서문은 알프레트의 아들 정신의학자 쿠르트 아들러가 직접 썼다. 아들러와 관련된 저작은 많이 나와 있지만, 대부분 아들러와 프로이트의 초기 관계와 뒤이은 결별 등 이런저런 이야기에만 집중되어 있거나 아동, 성인, 가족과 관련된 이론과 치료 기법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쿠르트 박사의 말을 빌리자면 이 책 『아들러 평전』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버지(아들러)와 아버지가 살았던 시대를 생생하게 그려낸 최초의 본격적인 전기”다. 이 책은 아들러의 인생사뿐 아니라 그가 직접 만났던 수천 명의 사람과 현대 심리학 전체에 영향을 미친 위대한 심리학자로서 성장한 이야기들을 모두 담았다. 프로이트와의 관계 등 지엽적인 내용에만 매진한 다른 책들과 차별적으로, 호프먼 교수는 특히 미국에서의 아들러의 경력까지 자세하게 서술했다. 평생을 ‘프로이트의 추종자’로 불리며 쌓였던 아들러에 대한 오해가 이 책을 통해 풀린다. 또한 처음으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무수한 자료를 바탕으로, 아들러의 미국에서의 생활을 상세하게 알렸다. 아들러의 개념들을 알기 쉽게 소개하는 것 외에도 아들러의 생애를 의미 있는 역사적 맥락에서 제시한다는 점에서 역시 특별하다. 이 책 한 권을 통해 아들러와 그의 삶, 격동의 역사를 모두 만나보게 될 것이다. 
 
빈에서 보낸 어린 시절
 
오스트리아 빈은 오랫동안 유럽의 자연적 관문이자 전략적 요충지로서 무역의 중심지가 되어왔다. 음악 수도라는 국제적 명성을 얻으며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등 뛰어난 음악가들이 이곳에서 만인을 매료시켰지만, 유대인 등 여러 소수집단의 입장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억압적이었다. 그러다 1848년 민중 혁명이 일어났다. 유대인에게 부과되었던 특정 제약들이 해제되었다. 반유대주의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진보적인 시각 덕분에 1860년 약 6000명이었던 빈의 유대인 인구는 1900년에는 거의 15만 명으로 치솟았다. 세기말 빈으로 몰려든 헝가리인 유대인 가운데 알프레트의 친할아버지 시몬 아들러가 있었다. 시몬의 둘째 아들이었던 알프레트의 아버지 레오폴트는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고, 지적인 요구도 별로 없는 곡물상이었다. 알프레트의 어머니 파울린은 근면한 어머니이자 주부였다. 
 
그들의 둘째 아들이었던 알프레트 아들러는 1870년 2월 7일 빈 부근의 루돌프스하임에서 태어났다. 아들러에게는 형 지크문트(1868년생), 동생 헤르만, 루돌프, 이르마, 막스, 리하르트 등 총 일곱 남매가 있었다. 아들러는 자신의 심리학적 접근 방식이 어린 시절 덕분이라고 언급하곤 했다. “늘 친구들에 둘러 싸여 있었고 인기가 많았다,” “개인심리학의 핵심적 동기가 된 협력의 필요성을 이해하게 된 것은 아마 타인들과의 이런 유대감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어린 알프레트에게 형 지크문트는 만만찮은 존재였다. 똑똑하고 고압적이던 지크문트는 알프레트를 툭하면 궁지로 몰았고, 늘 그에게 좌절을 안겨주었다. 구루병 등 여러 질병을 겪었던 알프레트와 달리 지크문트는 아주 건강했다는 점 또한 좌절에 한몫했다. 이후 알프레트가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다. 동생 루돌프가 디프테리아라는 병에 걸려 함께 자던 알프레트 옆에서 세상을 떠났다. 얼마 후, 알프레트 역시 폐렴에 걸려 의사로부터 “가망이 없다”는 선고를 들었고, 기적적으로 회복한 알프레트는 이 일을 계기로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아들러는 이후에도 레오폴트슈타트, 헤르날스, 베링 등 여러 지역을 옮겨가며 살았다. 레오폴트슈타트는 당시 유대인 민족색이 가장 강한 지역이었는데, 그에게는 유대인 혈통에 대한 긍지가 없었다. 알프레트의 부모는 더 나은 미래를 보장하는 수단으로서 교육을 중시했고, 그들의 아들이 엘리트 직업에서 선망받길 바랐다. 그렇게 알프레트는 평판 좋은 김나지움(사립 중등학교) 두 곳에서 8년의 시간을 보내고 빈대학 의예과에 합격했다. 아들러는 처음부터 개업의가 되기로 결심했다. 당시 빈대학 교수들은 치료보다 실험주의와 진단의 정확성을 강조했고, ‘치료적 허무주의’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무정함은 알프레트의 동기와는 완전히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아들러는 매일 저녁 카페 그린슈타이들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며 토론하기를 즐겼다. 그렇게 세 번의 자격시험을 겨우 통과하고, 아들러는 빈 폴리클리니크에서 가난한 환자들을 치료하게 되었다. 아들러는 사회주의에 강하게 끌렸고,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들을 통해 지적인 흥분을 느꼈다. 경제 이론과 분석보다는 구체적인 사회적 행동에 의해 인간의 삶이 향상될 수 있다는 사회주의의 낙관적 견해에 훨씬 끌렸다. 
 
결혼, 그리고 의사로서의 삶을 살다 
 
1897년, 아들러는 인생에서 처음이자 유일한 사랑에 빠졌다. 라이사 티모페이브나는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러시아식으로 양육된 똑똑한 유대인이었다. 아들러는 라이사에게 완전히 빠졌고, 그녀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했다. 그러나 따로 조직 활동이 없었던 라이사는 러시아의 가족과 친지들을 그리워하며 외로워했던 듯하다. 첫째 발렌티나, 둘째 알렉산드라, 셋째 쿠르트, 넷째 코르넬리아가 태어나면서 아들러와 라이사 사이에는 서서히 갈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아들러는 자녀들의 기억에 헌신적인 아버지로 남았다. 알렉산드라에 따르면, 아들러는 늘 바빴지만 아이들이 부모를 필요로 할 때 늘 곁에 있어주었다. 또한 자녀들의 직업을 좌지우지하지 않았고, 자식들에게 고압적으로 굴지도 않았다. 알렉산드라와 쿠르트는 정신의학자가 되었고, 발렌티나는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유일하게 코르넬리아만 연극배우가 되었다.)
 
아들러는 얼마 뒤 내과를 개업했고, 환자를 치료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곧 좋은 평판을 얻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아들러는 신체와 정신 사이에 숨어 있는 신비한 결합관계를 진지하게 탐구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기관열등감organ inferiority’ ‘보상compensation’ ‘과잉보상’이라 불리게 된 용어들이 이때 처음 만들어졌다. 정치적으로 기독사회당이 지배하고 있던 상황에서 아들러는 사회민주당에 결속감을 느꼈고, 그의 첫 번째 전문서적 『재봉사를 위한 건강 지침서』를 발표한다. 아들러는 이 책을 통해 재봉사들이 처한 비참한 노동 상황을 묘사하면서 사회 활동가 및 개혁자로서 의사의 특별한 역할을 강조했다. 4년 후, 아들러는 『의학소식회보』에 또 두 편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저술 활동을 이어나갔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회와 함께한 초기
 
프로이트와 아들러가 언제 처음 만나게 되었는지에 대해 프로이트와 아들러 측에서 모두 각자에게 유리한 입장을 내놓았지만, 둘 다 사실이 아니다. 확실히 알려진 바는 이렇다. 프로이트에게 치료를 받고 감명한 의사 빌헬름 슈테켈은 1902년 프로이트에게 혁신적인 접근 방식에 관심을 보일 동료들을 위해 매주 모임을 열어달라고 촉구했다. 프로이트가 이에 응해 빈의 의사 세 명에게 베르크가세 19번지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와달라고 초대장을 보냈고 그중 한 명이 바로 알프레트 아들러였다. 아들러가 보관하고 있던 프로이트의 빛바랜 우편엽서가 이 초대장이 수요심리학회의 시작이었음을 증명한다.
 
당시 40대 중반이었던 프로이트는 빈대학 의과대학에서 교수직을 얻었고, 인간 심리에 대한 『꿈의 해석』을 출판했지만, 이 책은 당시 오스트리아의 동료 의사들이나 교양 있는 대중에게서 외면받았다. 그 와중에 슈테켈로부터 받은 솔깃한 모임 제안으로 아들러, 카하네, 라이틀러, 슈테켈, 프로이트는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모임은 처음에 꽤 다정한 동료애로 가득했고, 아들러 역시 모임이 지적인 자극을 준다고 생각해 정기적으로 참여했다. 처음에 프로이트와 아들러는 서로를 흥미롭고 독창적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겉으로 봤을 때 프로이트와 아들러는 공통점이 많았다. 하지만 그들은 나이가 열네 살이나 차이 났고, 의사로서의 기질도 달랐으며 정치적인 면에서도 달랐을 뿐만 아니라 아내들의 성향까지 반대였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수요심리학회의 회원수는 계속해서 늘어났고, 4년이 지난 1906년에는 열일곱 명에 달했다. 아들러는 「교육자로서의 의사」 「아동의 발달상 경험」 등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여전히 빈 정신분석학회에 있었지만 점차 프로이트가 모든 문제를 자신과 다르게 바라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프로이트와의 결별에서 개인심리학의 탄생까지
 
아들러의 첫 책 『기관열등감에 관한 연구』는 호평을 받았다. 수요심리학회 멤버들 역시 신경증 발달에 영향을 미치는 생물학적 요인을 이해하는 데 큰 공헌을 한 책이라고 여겼다. 수요심리학회의 규모가 커지고 전문화되면서, 회원들은 점차 서로에게 공격적이 되어갔고 때로는 무자비한 논쟁이 오갔다. 아들러는 주요 의학 학술지에 논문 「삶과 신경증의 공격성 동인」을 실으며 성적 욕구와 공격성이라는 두 가지 주요 성격 동인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공격성에 대한 아들러의 견해에 프로이트가 흥미를 보이는 듯싶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들러는 매우 상이하고 경쟁적인 심리학적 견해를 빠른 속도로 발전시켜나갔다. 1910년에 발표한 ‘리비도’가 아닌 ‘열등감’을 신경증의 토대로 강조한 논문 「삶과 신경증의 정신적 자웅동체성」은 이미 프로이트의 기본 관점을 분명하게 부정하는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아들러와 프로이트의 논쟁은 권력이나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매우 상이한 개념들을 둘러싼 것이었다. 아들러에 대한 프로이트의 비난은 더해갔고, 결국 아들러는 『중앙지』의 편집장 자리를 내놓는 것과 동시에 빈 정신분석학회에서도 탈퇴했다. 프로이트가 모임에 남아 있는 아들러 지지자들을 없애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들의 모든 관계는 끝이 났고, 생에 마지막까지 그들은 적으로 남았다. 
 
빈 정신분석학회를 떠난 아들러는 ‘자유정신분석연구학회’를 열정적으로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를 지지했던 푸르트뮐러, 그뤼너 형제, 힐퍼딩, 하이, 마다이, 오펜하임, 알렉산더 노이어, 오토 카우스, 에르빈 벡스베르크 등이 합류했다. 이후 학회가 발전하면서 ‘개인심리학학회’로 이름이 변경됐다. 
 
1912년에 출간된 중요한 저서 『신경증적 성격에 관하여』에서 아들러는 오랫동안 프로이트 심리학의 기초가 되었던 견해들을 수용했지만, 프로이트가 인간의 핵심적인 힘으로 유아 성욕을 강조했던 것과 달리 아들러는 ‘초기 열등감’을 강조했다. 자신의 저서에 만족했던 아들러는 빈 의과대학 선임 교수단에 지원하면서 이 책을 함께 보냈다. 그러는 와중에도 카페 센트랄에서의 저녁 모임은 계속되었다. 왕성한 활동을 펼쳐나가던 아들러와 동료들은 『개인심리학 저널』 창간호를 발행하는 데 성공했다. 아들러가 편집장을 맡고 편집주임 자리는 푸르트뮐러가 맡았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아들러는 징집되었다. 그리고 빈 의과대학 교수단 지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국제적 명성을 얻다: 미국에서 보낸 말년
 
전쟁이 끝나고 오스트리아는 우울한 분위기가 지배했다. 오스트리아의 재정 상황은 좋지 않았고, 생제르맹 조약으로 오스트리아는 ‘절단되었다.’ 고통 가운데 1920년대 초, 아들러는 열정적인 심리학 사상가로 오스트리아 전후 세대들 사이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그는 빈의 폴크스하임(국민 교육 기관)의 후원으로 심리학 강연을 여럿 개설했다. 그 강연에 참석한 사람으로는 이후 일류 소설가가 된 10대 소년 마네스 슈페르버와 아동정신의학 분야에서 칭송받는 인물이자 미국에 아들러 사상을 전파한 핵심 인물인 루돌프 드라이커스가 있다. 공개 강연 이후 아들러는 점점 지명도가 높아졌고, 특히 교육 분야에서 아동 상담과 관련해 많은 활동을 펼쳤으며 중부 유럽에서 아동심리학과 가족관계 분야의 지도적 인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아동 지도에 관한 아들러의 혁신적 연구는 점점 더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전 유럽과 해외 전문가들이 아들러를 찾아 빈을 방문했고, 그 뒤 네덜란드를 시작으로 여러 차례 강연 여행을 떠나게 된다. 1925년에는 미국에서 『개인심리학의 이론과 실제』가 출간되었고, 그 무렵 아들러의 심리학 연구는 전문가들뿐 아니라 대중에게도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그의 주변에는 여러 협력자와 지지자가 있었다. 그중에는 이후 『인간 본성의 이해』의 영어권 번역을 맡기도 한 오스트리아 혈통의 젊은 미국 정신과의사 월터 베란 울프도 있었다. 또한 영국으로의 강연 여행을 통해 국제 개인심리학회가 생겼고, 런던에서 만난 세르비아 철학자 디미트리예 미트리노비치가 런던 지부장을 맡았으며, 편집장 필리프 메레와 젊은 문인 몇 명이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러나 1933년 영국의 대표적 아들러 지지자였던 크룩섕크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뒤 영국에서는 개인심리학 운동이 의미 있게 진행되지 못했다. 
 
쉰여섯에 시작된 미국 방문과 이후 뉴욕으로의 이주는 아들러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혼자 뉴욕으로 이주한 아들러는 매주 빼놓지 않고 강연을 했다. 그린버그 출판사를 만나 『삶의 과학』 『아들러는 아이들을 이렇게 치유했다』 『신경증 문제』 『아동 지도』 『아동 교육』 등 많은 그의 저서가 미국에서 출간되었다. 아들러의 사상이 시기적으로 미국의 상황과 맞았던 것도 한몫했지만, 아들러가 심리학 전문가로 미국에서 유명해진 것은 그의 다정함, 낙관주의, 따뜻함, 야심 넘치는 욕구가 결합된 개인적 특성 때문이었다. 『개인심리학 저널』은 아들러 사후 몇 달 만에 발간이 중지되었고 저서들은 절판되었다. 미국에서 그가 명성을 떨쳤던 이유는 그의 이론 자체보다는 다정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그의 성격의 영향이었다는 것이 사후 한층 확실해졌다고 이 책의 저자 호프먼은 이야기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개인심리학이라는 심리학 체계는 지나치게 한 명의 창시자에게만 의존한 것이다. 그럼에도 아들러가 심리학적 통찰력의 대중화를 강조했다는 것은 오늘날까지도 지대한 영향력을 미친다. 아들러는 프로이트나 융보다 자신의 개념을 가정과 교실에 직접 접목시키는 데 훨씬 더 열성적이었고, 그의 자립, 부모 교육, 교사 교육은 모두 받아들여졌다. 아들러 사후 잠시 그가 잊히는 듯하더니, 아들러 연구는 다시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심지어 2000년대의 한국에서 아들러의 이론을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의 책으로 재생산되어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아들러는 한국을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었지만, 자신의 책이 한국 독자들을 만나고 있는 것을 알면 분명 기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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