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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약력
박지원(朴趾源, 호 연암[燕巖], 자 중미[仲美], 1737~1805)은 조선 최고 명문가로 손꼽히는 반남 박씨 집안의 후예다. 할아버지 박필균은 중요한 관직을 두루 거친 노론의 핵심 인사였고 팔촌 형 박명원은 영조의 사위다. 장인은 송시열과 김창협의 학통을 이은 노론 산림처사 이보천이며, 문학의 스승이자 처삼촌인 이양천은 홍문관 교리를 지냈다. 당당한 집안에다 서울 출신(중앙에서 밀려난 곁가지가 아닌)이고 젊어서부터 글재주로 이름 높았지만 도덕적 이상과 정치.사회의 혼탁함 사이에서 번민이 깊었고 마침내 벼슬을 포기하고 만다. 「거지 광문이」(광문자전)를 쓴 열여덟 살 때나, 2년 뒤 「허생」 관련 자료를 접한 스무 살 때나 박지원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비롯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1777년에는 집안의 정적 홍국영이 정권을 잡는다. 박지원은 도망치듯 황해도 금천군에 자리한 연암협(‘연암’은 여기서 딴 것이다)으로 갔다가 1780년 홍국영이 실각하고서야 서울로 되돌아온다. 같은 해 팔촌 형 박명원이 청나라로 가는 사절단의 정사가 되자 따라나서 약 다섯 달 동안 북경, 열하 일대를 여행한다. 그 경험을 갈무리한 원고가 ‘열하일기’다. 「허생」 「범이 꾸짖다」(호질) 같은 글이 껴 있고 고전적 규범을 벗어난 표현이 많은 이 원고는 곧 온 나라에 물의를 일으켰고 임금까지 당황하게 만든다(문체반정[文體反正]). 그 결과 당시 임금 정조로부터 견책과 함께 반성문 제출을 명받았지만 공부와 글쓰기의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 조상의 공로에 따라 과거를 거치지 않고 안의 현감에 임명되자 평소 주장에 따라 벽돌, 수차, 의복 들을 실제로 제작해 실험하기도 했다. 박지원은 글과 실천을 통해 ‘고전을 본받되 창의력을 발휘할 것’(법고창신[法古創新]), ‘제도와 기술을 발전시켜 나라와 백성을 잘살게 할 것’(이용후생[利用厚生]),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일 것’(북학론[北學論])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그가 남긴 글과 뜻 깊은 주장은 오늘까지도 그 빛을 잃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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