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함평에서 태어났다. 소설가가 된 후배 김씨에게 나도 소설 쓰고 싶다 했더니 비웃었다. 그래도 되고 싶은 것은 소설가였다. 광주여자고등학교 다닐 때 뭔가를 쓰느라 원고지가 쌓인 것이 책상 한가득이었
다. 그러나 이루어진 것은 없었다.
할머니의 표현은 “꼭 관청의 사다리처럼 키는 큰 것이 해질 때 왜 우두커니 서 있냐”였다. 식구들을 불안불안하게 했던 내가 결혼하고 아이를 다섯 낳았다.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를 빌리자면 너무 많은 아이를 낳아 묶여버린 셈이다.
영특하다고 여기던 첫째 아이를 등굣길에 잃고 ‘그늘의 버섯’으로 불리던 무난했던 삶은 크게 조롱받았다. 여름에 문을 열지 않아도 더운 줄 모르던 시기를 겪으며 늘 신의 공격을 받을까봐 불안해했다. 정신적 불안이 회복되고 나서 다니던 광주 학생독립운동 도서관에서 ‘글사랑 독서회’라는 책 읽기 모임을 만들었다. 가톨릭센터에서 한 문학 계간지에서 본 김유택 선생님의 강의를 들었고, 거기서 만난 사람들과 소설 모임을 만들었다.
의욕은 있으나 결과가 지지부진할 때 독서회 출신 몇 명과 음식점을 열었다. 음식점은 성공했지만 내가 뭘하고 있는 건가 싶어지면서 문득 놓아버린 글쓰기가 아쉬었다. 그래서 틈나는 시간에 내가 만나온 사람들에 대한 글을 썼다. 컴퓨터를 들여놓을 생각은 못했다. 밥 먹으러 온 손님들의 눈에 가소롭게 보일까봐였고, 휴대전화에 자판기를 연결해 몰래 한 줄 한 줄 써내려갔다. 그렇게나마 스스로를 위로했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