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괜찮아. 충분히 사랑받았거든.”
차분하고 조밀한 언어로 묘파해낸 애틋한 성장통, 그 여름날의 스케치
제 또래가 실제로 겪고 있는 가족 문제, 진로에 대한 고민, 관계의 서툶, 그런 평범한 것들을 담았다고 생각해요. 이 소설의 에피소드는 모두 만들어진 것들이지만, 등장인물들이 직면한 문제들은 모두 대학에 온 뒤 저나, 저와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 고민하던 것에서 출발했어요._수상작가 인터뷰 중에서
이 시대 대학생이 쓸 수 있는 성장소설의 모범답안! _김미월(소설가)
가장 젊은 상상력, 한계를 뛰어넘고 금기를 박살내고 현재를 돌파할 새로운 이야기를 발굴하고자 제정된 문학동네 대학소설상이 올해로 3회째를 맞이한다. 그 새로운 이야기를 향한 갈증을 채워줄 올해의 수상작은 정지향의 『초록 가죽소파 표류기』. 본심에서 수상작으로 결정하기까지 오 분도 걸리지 않았을 정도로, 심사위원 전원이 그 탁월성을 인정했다. 본심은 심사를 하기 위해 모였다기보다 어째서 『초록 가죽소파 표류기』가 수상작이 될 수밖에 없는지 서로 확인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 더 가까웠다. 잔잔한 감성 속에 숨어 있는 젊은 세대의 뼈저린 현실인식이 돋보이는 이 소설은 사랑과 우정, 가족 간의 갈등, 사회로의 진입 실패와 재능에 대한 회의, 정체성의 혼란 등, 이 시대 젊은이들의 고민을 정교한 플롯과 다양한 에피소드로 설득력 있게 전개해나간다. 예리하면서도 따스함을 잃지 않는 세심한 시선으로 동 세대 젊은이들의 성장통을 성공적으로 소설화한 작품이다.
“오늘 심사는 오 분 만에 끝날 것 같아요.”
본심이 시작되기 전에 심사위원 한 사람이 내기를 해도 좋다는 듯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나를 포함한 나머지 심사위원 두 사람은 에이 설마요, 하는 표정으로 응수했다. 과연 심사는 오 분 만에 끝나지 않았다. 정확히 이 분 십오 초 만에 끝났다. 그러니까 컵라면이 채 익지도 않을 시간이었다.
“초록 가죽소파 표류기요.”
“초록 가죽소파 표류기.”
“초록 가죽소파 표류기입니다.”
심사위원 전원의 의견이 완벽하게 일치했던 것이다. 그러니 그 자리는 심사를 하기 위해 모였다기보다 어째서 『초록 가죽소파 표류기』가 수상작이 될 수밖에 없는지 서로 확인해보기 위해 모인 자리에 더 가까웠다.
_김미월, 수상작가 인터뷰 중에서
“내가 한국에 간다면, 그때 말했던 것처럼 네 ‘소파’를 내어줄 수 있어?”
소설을 쓰지 못하고 있는 지방 예술대 학생인 ‘나’는 “수많은 쓸모없는 주제의 동아리 중에서도 가장 쓸모없는 걸 하는 동아리”에서 만난 선배 요조와 동거중이다. 그런 ‘나’에게 인도 여행중에 알게 된 입양아 민영이 찾아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열여덟 살에 여행을 시작해 사 년째 세계를 떠돌고 있는 민영은 ‘카우치 서퍼’이다. ‘카우치 서퍼’란 호스텔이나 게스트하우스 대신 각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소파에서 잠을 자며 여행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다. ‘나’는 “내어줄 소파 하나 없는 방”에 살고 있지만 ‘소파를 내어줄 수 있느냐’는 민영의 물음에 흔쾌히 응답한다. 그런 ‘나’에게 요조는 투덜거린다.
―그리고, 이 방에 소파가 어디 있어?
―그냥 그걸 ‘소파 빌려주기’라고 부른다니까.
―소파는 그렇다 쳐도, 이 주변엔 아무것도 없잖아. 어떤 관광객이 이런 데 숙소를 잡냐?
‘나’는 민영이 관광객이 아니라 여행자이고, 자기의 친구라고 변명을 하고 싶었지만, 그전에 먼저 자신이 살고 있는 방을 둘러본다.
실은 요조의 말이 맞아. 내 방은 말이야, 보증금 오백에 월세 삼십오짜리야. 어린 왕자는 어른들이 집의 가격만을 궁금해한다고 투덜댔잖아? 그 집이 붉은 벽돌로 지어졌는지, 제라늄이 피어 있는지, 비둘기가 날아다니는지 따위엔 관심이 없다고.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런 풍자가 통하질 않지. 지방 대학가의 오백에 삼십오짜리 자취방이라고 하면 누구라도 정확하게 그 풍경을 떠올릴 수 있으니까. 그런 방에 누군가를 초대하는 건 오히려 무례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 방들 중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기타를 치고, 누군가는 책을 읽고 있었을 거야.”
‘나’와 요조는 방학이 시작되어 학생들이 떠나 텅 비어버린 지방 대학가 자취촌을 ‘고아의 도시’라고 부른다. ‘고아의 도시’는 “새벽이면 골목을 돌며 아이들이 내놓은 술병을 주워모으던 할아버지들”이 사라지고, “학사주점과 당구장, 노래방”들도 문을 닫고, “편의점들만 방공호처럼 덩그러니 남아 이십사 시간 내내 불을 밝히는” 공간이다. “창문이 모두 닫혀 있어서 아무도 살지 않는, 버려진 동네”처럼 보이지만, 누군가는 어딘가에서 기타를 치고, 책을 읽고 있는 ‘남아 있는 삶’의 공간이기도 하다.
―근데 정말 아무도 못 봤네. 이 동네에 아무도 없는 거야?
―아니. 있지. 지금도 봐.
나는 세탁기로 다가가서 정지버튼을 눌렀어. 물소리가 그치자 어디선가 기타 소리가 작게 들려왔어. 몇 겹의 벽과 창을 거치느라 뭉툭해진 소리였지만 말이야. 나는 창을 활짝 열었지. 소리가 조금 더 선명해졌어. 맞은편에 주르륵 늘어선 건물들이 보였어. 창문들이 모두 닫혀 있어서 아무도 살지 않는, 버려진 동네처럼 보였어. 하지만 그 방들 중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기타를 치고, 누군가는 책을 읽고 있었을 거야. 민영과 나는 창에 매달려 확인하듯 창문들을 하나씩 바라보았지. 방안 가득 고여 있던 후덥지근하고 묵은 공기가 창밖으로 나가고, 뜨겁긴 마찬가지지만 깨끗한 바람이 방안으로 훌쩍훌쩍 넘어들어왔어.
여름이었지.
가장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예술가 소설! _신수정(문학평론가)
‘표류기’라는 제목에서 보이는 대로 『초록 가죽소파 표류기』는 세 남녀의 사회로의 입사과정을 그리고 있는 일종의 성장소설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소설이 전형적인 성장소설의 패턴을 인용하면서도 살짝살짝 비트는 방식이다. 이 소설은 자신들이 처한 ‘현실’에 눈감지 않으면서도 그 현실이 강요하는 사회로의 ‘굴욕적인’ 입사 역시 거부한다.
주인공 ‘나’는 자신이 제대로 살고 있는 게 맞는지, 아르바이트를 더 열심히 하거나 글쓰기 같은 건 빨리 때려치우고 토익학원에라도 다녀야 하는 건 아닌지, 재수를 해서 더 좋은 대학에 가야 하는 건 아닌지 생각한다. 그렇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뭔가 정상적인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싶기 때문이다. 이런 ‘나’에게 요조는 말한다.
이제 와서 학원 같은 델 다녀서 회사에 들어가려고 해봤자 소용없어. 내가 몇 번 해봐서 아는데, 면접을 보러 가잖아? 그러면 일평생을 킁킁거리며 살아온 냄새의 달인 늙은이들이 있어. 그 사람들은 네가 입을 열기도 전에 말할 거야. ‘킁킁 너한테선 부적응자 냄새가 너무 많이 나요.’ 그럼 네가 좆나 정색하고 막 땀을 흘리면서 그런 말을 해대. ‘아닙니다. 저는 이제 사회의 좆나 작은 톱니바퀴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기름을 한 달에 한 방울밖에 안 흘려주셔도 저는 몸안에서 기름을 만들어내서라도 열심히 돌아가겠습니다. 왜 그러고 싶은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그러겠습니다.’
―그래. 민영. 돈을 벌어버려. 그리고 소파를 사서 카우치 서퍼들에게 소파를 빌려주는 사람이 되자. 나도 돈을 많이 벌어서 소파를 살 거야. 초록색으로.
나는 부끄러움을 감추느라 부러 밝게 말했어.
―응. 며칠을 누워 자도, 등 안 배기는 침대처럼 커다란 걸로 살 거야.
민영이 말했고.
―나는 진짜 가죽소파.
요조가 덧붙였지.
결국 ‘고아의 도시’에서 온 이 청춘들은 사회로 나아가되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그렇게 한다. 피디 시험을 준비하던 요조는 필기 시험장에서 사라지며, ‘카우치 서퍼’를 자처하던 입양아 민영은 잠깐 동안의 안착을 결정한다. 언어를 잃어버렸던 ‘나’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아 매일 조금씩 소설을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제 첫 장편소설을 세상에 내놓은 한 젊은 작가가 어떻게 더 큰 작가로 발돋움해가는지 그 과정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낯선 풍경이 불러올 새로운 일들에 대한 기대”가 깃든 여행자의 시선으로, 그 여정에 함께해주시길!
이 작가는 좋은 소설이 이야기의 집인 동시에 언어의 집이기도 하다는 점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듯하다. 그만큼 한 문장 한 문장 공을 들였다는 점에도 신뢰가 갔다. _김미월(소설가)
전형적인 패턴에 당대의 현장감각을 불어넣는 이 작가의 서늘하고 우수 어린 현대적 감수성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_신수정(문학평론가)
이 작품이 보여준 매끄러운 자연스러움은 소설쓰기에 관한 작가의 진지한 열정과 그간의 노력은 물론 앞으로 증명될 재능마저 보여주는 듯했다. _조연정(문학평론가)
내가 쓰는 모든 비유가 무력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가령 너무 많이 사랑하는 것에 대해 고백을 해야 할 때. 첫사랑에게 보냈던 연애편지처럼, 이 고백 또한 한없이 순진하고 단순해질 것이라는 예감이다.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매일 밤 머리맡에서 별의 그것처럼 무기력이 폭발했다. 파편들을 이불처럼 덮고 내내 진득하고 깊은 잠을 잤다. ‘애들이 뭘 안다고 글을 쓰겠어?’ 무심한 사람들의 말이 자주 꿈속까지 따라왔다.
이불을 걷어차고 배낭을 멨다. 낯선 곳을 홀로 헤매다 하나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그날의 사랑은 그날에만 있다.’ 미루어둔 감정은 영영 가라앉아버리거나 전혀 다른 모양으로 일그러져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상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을 괴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매일 열심히 사랑해야 하는 것이었다. 매일 열심히 써야 하는 것이었다.
돌아와선 ‘그날의 문장은 그날에만 쓸 수 있다’고 바꿔 쓰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무심한 사람들의 말이 맞았다. 나는 어리고 나는 뭘 모른다. 하지만 사랑을 말하고 글을 쓰는 과정 속에서만 한 가지씩 비밀을 알게 된다. 좋은 문장을 쓴 날보다 비밀을 새로 알게 된 날 밤에 더 단정하고 아름다운 꿈을 꿨다. _수상 소감 중에서
덧붙임 _정지향은 2008년 이미 청소년계간지 『풋,』 공모에 입선해 문재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번 문학동네 대학소설상의 심사를 맡았던 소설가 김미월은, 수상작이 결정된 후 수상자의 이름을 듣자마자 혹시 ‘그 정지향’이 아닌가 궁금해했다. 마침 2008년에도 심사를 맡았던 그가 정지향의 작품을 인상깊게 보았던 탓이다. 고민 많은 ‘백일장 키드’에서 이제 그는 더 큰 한 걸음을 떼어놓았다. 작가로서의 그의 여정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