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의 책 소개
“안녕 소녀여 무슨 노래를 부르니 눈을 감고 릴리트요”
이방의 소녀가 부르는 경계의 시
―박은정 시집, 『아무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
1975년 부산에서 태어나, 2011년 『시인세계』신인상을 통해 등단한 시인 박은정이 첫 시집 『아무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를 펴낸다. 등단 당시 자신만의 목소리와 시적 공간을 창출할 줄 안다는 평을 받은 것처럼, 이번 시집에는 박은정만의 목소리와 시적 리듬으로 경계가 지워진 허공의 노래를 만들어내는 54편의 시가 묶여 있다.
박은정 시의 화자들은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소녀’의 모습으로 어른과 아이 사이를 넘나들기도 하고, ‘이방인’의 자세로 이곳과 저곳 사이를 넘나들기도 한다. 이 넘나듦 속에서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소리들은 노래로 다시 돌아온다. 다름이라는 경계가 지워지고 대상들의 자리가 뒤섞이는 미묘한 지점을 향해 가겠다는 것, 그리하여 외면된 것들을 듣는 귀와 외면된 것들이 말하는 입을 모두 담아내는 몸이 되겠다는 것. 이것이 이방의 소녀가 하늘과 땅 사이의 공중을 뛰어다니며 부르는 시의 노래이다.
이방의 소녀
박은정 시의 화자들은 의도적으로 소녀의 모습을 앞세운다. 어린 목소리의 화자나 여성적인 목소리의 화자를 내세운 것은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목소리에 박은정은 그만의 색을 덧입혀 새로운 시세계를 구축한다. 박은정이 입힌 색은 ‘이방인’이라는 색이다.
이방인은 그 이름에서부터 다름을 전제로 한다. 이방인은 우리에게서 배제된 자, 우리라는 집단에서 힘을 갖지 못한 자, 우리라는 소속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이다. 같은 장소에 발을 디디고 있지만 그들은 이곳의 집단에 속하지 못한다. 여기서 박은정이 먼저 내세우는 목소리로 돌아가볼 필요가 있다. ‘여성’ 그리고 ‘어린아이’. 조금만 살펴보면 그들 모두 우리 안에서 이방인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자들임을 알 수 있다.
나고야,
너는 죽었니 살았니
스무 개의 입술이 너를 반복할 때
우리는 무엇도 간섭하지 않으며 땀을 흘리고
(……)
나고야,
아무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
공중을 뛰면 발바닥이 아파왔지
어떤 부유의 밤에도
젖은 얼굴이 서럽지 않도록
―「나고야의 돌림노래」부분
“돌림노래”처럼 여성, 어린아이, 이방인은 서로를 얽어맨다. 박은정은 이곳과 저곳 모두에 속하지 못하여 “부유의 밤”을 떠도는 이방의 존재들을 여성의 목소리로 “젖은 얼굴”이 “서럽지 않도록” 보듬는다. 동시에 어린아이의 목소리로 그 슬픔을 “무엇도 간섭하지 않으며 땀을 흘리”듯 천진하게 가지고 논다. 이 속에서 이방의 소녀는 “생의 비극적이거나 빛나는 한 순간에 관한 이름이 아니라 내부에 감춰져 있지만 언제라도 발현할 수 있는 하나의 감각이 된다.”(장은석 해설, 「혼혈 소녀의 피아노」)
허공의 노래
이방의 소녀는 그 존재 자체가 우리와 다른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와 다르게 대상을 대할 뿐이다. 박은정의 시가 세계를 대하는 방식도 그러하다. 박은정은 특유의 예민한 감각으로 “뜨거운 귀”를 열어젖혀 “점멸하는 사이렌 소리” “죽은 가수의 노랫소리” “귓바퀴를 돌던 물소리” “열매가 벌어지는 소리”처럼 순간으로 잊혀가는 소리들을 듣는다.
난청을 가진 아이는 어른이 되자
울 때마다 녹물을 흘리는 여자가 되었습니다
모든 소리가 녹이 슬어
혈관을 타고 흐르는 동안
나는 불협의 감정을 사랑하고
나는 병력의 감정을 사랑합니다
(……)
여자가 귀를 두드리면
허공의 낮과 밤이 흩어집니다
검붉은 말들이 울음 없이
벼랑을 내달립니다
―「녹물의 편애」부분
난청을 지닌 아이는 온전하지 않기에 다른 이들이 무심코 지나치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또 그렇기에 남들과는 다른 “녹물을 흘리는 여자”로 성장할 수밖에 없기도 하다. 이 고독한 성장을 시인은 슬퍼하거나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스스로 주변부에 머무르고자 한다. 나아가 중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달”리며 노래하기까지 한다. 하여 소녀의 목소리는 처량하지도 쓸쓸하지도 않으며, 노래는 “낮과 밤이 흩어”지듯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시의 순간들을 불러온다.
나는 너를 듣지 못한다 침묵의 서정을 알지 못한다 그러니 소녀여 무슨 노래를 부르니 눈을 감고 릴리트요 가만히 당신을 부르면 우리가 언제 이렇게 닮았던가요 당신이 울고 내가 웃고 이렇게 두 귀가 빨개지고 침이 고이고 안녕 소녀여 부디 벌려다오 너의 릴리트를 너를 부르면 기분이 이상하다 붉다 아니 달콤하다 너는 운명처럼 익지 않았다
―「벌려다오 너의 릴리트를」 부분
노래는 혼자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이와 같이 부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혼자 부르던 노래를 ‘너’와 나눌 때 새로운 감각이 발생하고, 듣지 못하던 서로의 감정을 들을 수 있다. 하여 시인은 말한다.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눈을 감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 비로소 내가 “당신”을 부르는 것이라고. 그러니 “안녕 소녀여 무슨 노래를 부르니”라고 소녀에게 인사를 건네보자. 이방의 위치에서 부르는 소녀의 노래에 귀를 열어보자. 그리고 이 노래에 동참해보자. “우리가 언제 이렇게 닮”았는지 깨닫게 되는, 서로가 서로를 얽어 지탱하게 해주는 시의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의 시를 읽으며 소녀의 모습을 한쪽으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시 속에서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는 여러 소녀들을 감고 흐르는 리듬에 담긴 성분들을 느낄 수 있다. 천진하면서도 위태롭고, 연약하면서도 유독한 것을 향해 뛰어들기를 주저하지 않는 그들의 예민한 감각 속에서 드러나는 미세한 차이들은 모호하고 불완전한 사람의 야만이나 계보와 혈통에 집작하는 어리석음을 느낄 수 있게 만든다.
―장은석 해설, 「혼혈 소녀의 피아노」中
● 책 속에서
복화술사 하차투리안
하차투리안은 유랑을 한다
왈츠를 추듯 정글을 턴하고
수백 년 동안 사라진 기억을
단숨에 기억해내는 유연함
하차투리안은 단련되어간다
침묵으로 만든 꽃다발을 창에 걸고
무수히 오르내리는 밤들처럼
앞발을 들고 하차투리안
입을 열면 비가 내리고 강이 범람하고
떠내려간 사람들이 언덕을 기어오르지
당신에게 어울리는 표정은 말문이 막힌 표정
그러니까 슬프고 발랄한 침묵으로
오늘은 이상한 일들이 많을 테니까
귀가 먼 부랑자가 노래를 부른다
하차투리안 하차투리안
우리의 전사 하차투리안
눈을 감고 입을 다물어도
날마다 비밀을 발설하지
하차투리안이 걷는다 두 팔을 흔들며
그의 마법이 뚱뚱해졌다 날씬해졌다
늑골 속에서 회오리가 분다
감정의 무감각과 무기력을
유일한 취미라고 하면 어떨까
당신의 입에서 나비가 날아다니고
내일 하루도 늙지 않고 죽을 수 있다면
하차투리안 하차투리안
눈을 감고 입을 다물어도
생을 되풀이하는 복화술사
문득 살아온 날들이 행방불명된다
육식 소녀
마을의 도살장에는
아름다운 예수님이 태어나고
손에는 열락으로 죽은 새
오리나무 아래 소녀의 잠은
깊고 달다
모두가 검은색이었고 곧 사라졌지만
서로의 잔인한 감각을 본받는 아이들이 자라고
늙은 애비들이
제 아이를 사냥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식성을 닮을수록
외로워지는 사람들
등뒤로 식칼을 돌리자
가장 먼저 입을 벌린 자들이 죽음을 맞도록
더운 숨을 뱉을 때마다
소녀는 숙성했다
식도를 넘어가는 부드러운 육질들
오랜 식육자들의 창자는 흙빛이어서, 서로의 내장에 고개를 파묻고 저를 울먹였다
누가 인간적인 급소를 찾아낼까
푸줏간의 잠이 깊어지면 문드러진 고깃덩이들이 같은 말을 반복한다
마지막까지 마음을 돌려주지 않는 고기는 제 주검으로 아름다워질 것이다
소녀가 눈을 감고 식칼을 돌린다
두 팔을 벌리고 공중으로
모두가 검은색이었고 곧 사라졌지만
밤마다 소녀의 입에서는
가시덤불 같은 어금니가 자라고
● 시인의 말
아름다운 사랑을 위해선
네 개의 다리가 필요했다
사라지는 것들
언젠가 사라지는 것들
네 번의 겨울이 지나는 동안
사랑은 아름답지 못했고
한 번의 꿈이 지난 자리에
꽃과 구름이 몰려온다
나의 무덤이 내내 깊어지기를
밤이면 낯선 당신에게
두 팔을 묻었다
2015년 3월
박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