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1874년 인상파의 첫 전시회를 두고 이어진 세간의 평가였다. 오늘날 전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미술 사조인 인상주의는 이렇듯 조롱과 혹평으로 시작되었다. 작품의 온화한 이미지와는 달리, 당시 인상주의는 기성 예술계에 대한 저항을 지향하는 회화운동이었다. 아카데미를 비롯한 기성 예술계로서는 고전에 대한 소양도 없고 데생 솜씨도 부족하며 하찮은 일상을 소재 삼아 그리는 인상주의 회화를 인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미술계에 들이닥친 이 ‘전위운동’은 쏟아지던 야유와 조소를 딛고 10여 년간 여덟 차례의 전시를 감행하며, 세계 미술시장을 뒤흔드는 ‘예술의 혁명’이 되었다. 『미술관 옆 카페에서 읽는 인상주의』는 바로 이 인상주의의 여명과, 그들을 낳은 시대인 근대를 살피는 책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그림 안에 문학, 역사, 신화 등 어떤 의미를 집어넣으려 하는 기존의 풍토에 반발하여, 그림을 순수하게 그림으로서만 즐기고 싶어했다. 자신들이 지금 보고 있는 햇빛 아래의 자연과 거리와 사람들을 그림으로써 즐거움을 주고 싶었고, 화면에 떠도는 분위기를 그저 음미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는 그들이 체험하고 있던 근대사회를 그대로 캔버스에 옮기는 결과를 낳았다. 즉, 아무런 의미도 주장도 담지 않으려 했던 인상주의 화가들의 화면에 역설적으로 ‘근대’가 고스란히 담기게 된 것이다.
그들이 그린 ‘근대’는 유럽이 산업사회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19세기 후반으로, 그야말로 산업혁명과 근대화의 시대, 영광스러운 유럽의 시대였다. 기술혁신과 문명의 진보가 밝은 미래를 가져오리라는 믿음이 확고했으며, 법적으로는 평등한 사회가 이루어져 왕후귀족이 물러난 자리에 시민들이 자리잡아 도시문화를 번영시켜나갔다. 실로 인상주의 화가들이 그려낸 하늘의 빛만큼이나 찬란하게 빛나는 시대였다. 하지만 급성장한 도시 문명의 이면엔 어둠 또한 스며들었다. 법적으로는 평등했다고 해도 사회적으로나 의식적으로나 평등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추방된 왕족을 대신해, 선대로부터 내려온 토지를 지닌 귀족들과 대자본을 등에 업은 부르주아들이 가난한 이들 위에 군림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이 어둠을 어떻게 포착했을까? 그림으로 사회 모순을 고발하거나 비판하는 것 따위를 가장 기피하던 그들의 관심사는 자신들의 눈에 비친 인상을 그저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무런 메시지나 정치적인 의도를 배제한 그 점 덕분에, 인상주의는 오히려 사회의 어둠을 더 적나라하게 담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빛’을 구사했던 인상주의의 참신한 묘법에 담긴 건 근대사회가 만들어낸 모순이라는 ‘어둠’이었던 것이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는 인상주의를 개괄하는 예술서지만, 근대사회를 읽을 수 있는 역사서이기도 하다. “회화는 ‘보는’ 것보다 ‘읽는’ 쪽이 먼저”라는 감상법을 제기해온 작가 나카노 교코는 이 책에서, 인상주의에 특화하여 근대 역사를 이야기하는 시도를 선보이고 있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남긴 작품들을 통해 당시의 정치적 상황, 시민사회의 성장, 노동자와 여성의 삶 등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작은 책 한 권으로 인상주의를 빠르게 개괄할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무서운 그림』 시리즈로 국내에도 많은 팬의 보유하고 있는 저자가 직접 작품 해설을 곁들여, 그림 읽는 즐거움까지 선사하고 있다. 인상주의를 비롯해 회화 감상을 위한 아무런 예비지식도 없는 사람들까지도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이 책은, 미술관 데이트를 앞두고 있는 당신을 구원해줄 것이다.
오늘날 인상주의 회화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사랑받고 있기 때문에, 한때 이들 회화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과 소란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좀처럼 믿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작품의 온화한 이미지와는 달리 인상주의 화가들은, 기성 권위에 저항하고 새로운 시대의 ‘전위운동’을 지향하여 마침내는 세계 미술시장을 뒤흔든 ‘예술의 혁명가들’이었습니다. (12쪽)
루이 르루아라는 평론가는 신문에다 “이 그림은 대체 뭘 그린 걸까?”, “벽지라도 이 그림보다는 낫겠다”, “필시 이 그림에는 인상이 듬뿍 담겨 있으리라”라고 야유하며 전람회에 출품한 화가들을 ‘인상주의’라고 불렀습니다. 이렇듯 ‘인상주의’는 조롱의 의미를 담은 명칭이었습니다. (16쪽)
자신을 반쯤은 기술자라고 여겼던 네덜란드 화가들과 달리, 근대의 예술가인 인상주의 화가들은 높은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완전히 다른 화법으로 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겠다는 생각으로 이론을 갈고닦았고, 예술에 생애를 걸겠다는 각오를 다졌습니다. 반 고흐는 그런 예술가상의 표본입니다. (59쪽)
인상주의 예술가들은 사회의 밑바닥에서 헐떡이는 이들에게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신화도 역사도 성경의 내용도 그리지 않고 ‘지금이라는 시대’에 초점을 맞추었다지만, 정작 ‘지금’을 살고 있던 육체노동자에게서는 눈을 돌렸던 것입니다. (134~5쪽)
「검진」은 창관에 고용된 창녀들이 정기검진을 받는 모습입니다. 그림을 보는 입장에서도 괴로울 정도의 광경이니 이를 그린다고 하면 더더욱 싫었을 텐데, 어째서 창녀들은 이걸 허락했을까요? 창녀들은 로트레크를 자신들과 같은 부류라고 인정했던 겁니다. 만약 마네나 카유보트 같은 화가가 자신들의 이런 모습을 그리겠다고 했으면 창녀들은 길길이 날뛰었을 것입니다. (151쪽)
‘물랭 루주’에 들어박히기 전에 로트레크는 몽마르트르에 사는 한 가난한 외국인 화가와 공방에서 알게 되면서 친해졌고 파스텔로 그의 초상을 그렸습니다. 그것이 이 「반 고흐의 초상」입니다. (203쪽)
반 고흐는 자연광을 있는 그대로 붙잡으려 했던 모네에게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아무리 밝은 색채를 사용해도, 반 고흐는 모네의 행복한 빛과 온화한 공기의 느낌을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북쪽 출신인 그의 고뇌는 아를의 빛 속에서도 벗겨지지 않았습니다. (20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