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츠하이머로 고통받는 아버지와 함께
살아가고 기억하고 사랑한 나날에 대한 기록
처음에는 충격, 비통함이 찾아왔습니다. 마음속으로 치매의 어두운 이미지들을 그려보았죠.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다 끝났구나. 그 병이 내게서 아버지를 빼앗아갈 테고, 다시는 우리가 행복해질 수 없겠구나, 하고 말입니다. 지금은 알고 있습니다. 삶의 끝 또한 삶이라는 것을요. 아르노 가이거, 슈피겔 인터뷰
『유배중인 나의 왕』은 오스트리아 작가인 아르노 가이거가 오랫동안 알츠하이머병으로 고통받는 아버지에 대해 쓴 자전적인 이야기로, 지난 삶의 기억은 물론 개인의 인격과 일상생활을 해나가는 능력마저 서서히 잃어가는 알츠하이머 환자인 아버지를 애틋한 시선으로 지켜보며 함께하는 나날을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란 소년, 2차 세계대전에 징집되어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고생 끝에 귀향한 다음 세상을 향한 마음을 닫아건 청년, 결혼을 하고 손수 지은 집에서 네 자녀를 길러낸 남자, 이 모든 삶의 이력을 찬찬히 되짚어봄으로써 한 인간 아우구스트 가이거로서의 아버지를 이해하고 그를 통해 몇십 년간 소원했던 부자관계를 회복해나가는 과정이 오롯이 담겨 있는 책이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 아르노 가이거는 1997년 데뷔한 이래 지금까지 꾸준히 작품활동을 이어오고 있으며 독일서적상, 프리드리히 횔덜린 상, 요한 헤벨 상, 아데나워 재단 문학상 등 유수의 문학상을 수상해 이미 그 문학성을 인정받은, 현재 독일어권 문단에서 주목받는 작가 중 한 명이다. 특히 이 작품은 2011년 발표하자마자 슈피겔 베스트셀러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작가의 뛰어난 언어적 기교와 능숙한 필치, 예술적 상상력을 통해 “감동적인 휴먼 다큐멘터리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예술작품” “감동 이상의 것이 담겨 있는 책” 등의 호평을 받았다.
이 책은 보편적인 것도 지극히 개인적으로 묘사해야 한다는 작가의 모토에 따라, 하나의 현대적 현상이라 할 수 있는 알츠하이머병을 환자의 가족으로서 겪는 개인적인 경험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정확한 관찰과 내밀한 감정이입을 통해 알츠하이머 환자들의 세계의 핵심을 밀도 있게 담아냄으로써, 오스트리아 시골마을의 면사무소 서기로 소박한 삶을 산 실존 인물 아우구스트 가이거의 개인적인 운명은 역설적으로 모든 알츠하이머 환자와 현대사회에서의 삶에 대한 이해와 성찰로 독자들을 이끌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세대를 초월해 유의미한 물음을 던진다. 가족은 무엇이고 삶의 의미는 어디에 있으며 우리 삶을 진정 가치 있게 만드는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아르노 가이거는 비록 알츠하이머 환자의 세계가 정상이라 불리는 기준과 척도, 객관적 효용성과 능률 지향성에서 벗어나지만 아버지가 여전히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우아함, 자의식과 재치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외견상의 능력 상실이 인간으로서의 모든 품위 상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책의 원제이자 집에 있으면서도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고 어두운 밤 불안하고 초조하게 집안을 서성거리는 아버지의 모습에 대한 비유이기도 한 ‘유배중인 늙은 왕’은 결국 실용적인 삶에서 멀어졌지만 끝까지 품위를 잃지 않는 아버지를 상징한다. 한편 별도의 구성으로 아들과 아버지가 나누는 대화가 사이사이 삽입되어 서로를 향한 변함없는 애정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이제 아버지가 내 세계로 건너올 수 없으니
내가 아버지에게로 건너가야 한다!”
은퇴와 어머니와의 별거를 겪은 아버지는 주위에 대한 관심을 끊고 “마치 마음속 마지막 용수철이 튕겨나간 듯” 모든 일에서 손을 놓는다. 아르노 가이거를 비롯한 자식 중 누구도 아버지가 일상생활에 필요한 능력을 서서히 잃어가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공허와 무위로 하루하루를 채워가는 아버지를 결국 그냥 내버려두고 만다. 화를 내보기도 하고 간청해보기도 하고 비난해보기도 하지만 결과는 언제나 비참한 실패였고 집안을 짓누르는 우울한 분위기를 견디다 못한 자식들은 하나둘 집을 나가 뿔뿔이 흩어진다. 아버지가 단순히 의기소침한 게 아니라 치매에 걸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의 끔찍했던 시간, 그동안의 당혹감과 경악, 아버지의 문제가 아니라 병이었다는 “진상”의 깨달음, 이제 혼란에서는 벗어나지만 더없이 소중한 시기를 무의미하게 흘려보내고 말았다는 뼈저린 후회와 분노, 죄책감, 예전의 모습을 점점 잃어가는 아버지를 곁에서 지켜보는 안타까움과 고통 등이 솔직한 고백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진다.
어떤 삶의 요구에도 의연하게 버틸 거라고 믿었던 강인한 부모님이 약해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한다는 것은 어느 자식이든 받아들이기 힘들다. 하지만 아르노 가이거는 치매 환자의 삶을 새로운 기준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배우며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아버지의 현실을 인정하고 아버지가 겪을 고난을 조금이나마 줄이고자 보살피는 역할에 조금씩 적응해나간다. 가족들과 함께, 간병인들과 함께 조금씩 부담을 나눠지고, 나중에는 가까운 요양원에 모셔 전문 인력의 도움을 받으면서 아버지를 돌본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인지능력과 기억력이 점점 약해지면서 아버지는 자다 말고 깨서 자식들을 찾거나 밤중에 잠옷 차림으로 동네를 배회하기도 하고 아들과 자신의 동생을 혼동한다. 그리고 자꾸만, 집에 가고 싶어한다.
“집에 있으면서도 여기가 집이 아니라는 고통스러운 의식”은 아버지와 가족을 괴롭히는 치매 증상의 하나다. 정신적으로 혼란스러운 치매 환자는 안정감을 상실하고 그래서 그 느낌을 되찾을 수 있을 만한 장소를 그리워하는데 아무리 친밀한 장소에 있어도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르노 가이거는 당신이 손수 짓고 건사해온 집을 알아보지 못하는 아버지를 그의 지난 삶을 통해 이해하고자 한다.
아르노 가이거의 아버지 아우구스트는 오스트리아의 작은 시골마을 포어아를베르크, 권위적이고 다혈질인 아버지와 현명하고 과묵했던 어머니 아래서 아홉 명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자랐다. 1938년 오스트리아가 나치에 의해 독일에 합병된 지 몇 년 후 열일곱 살의 나이로 징집되었고, 패전 후 러시아군 포로로 잡혔다가 갖은 고초를 겪은 끝에 귀향한 후에는 대학에 가서 전기공학을 공부하겠다는 전쟁 전의 계획을 뒤로한 채 면사무소에 서기로 취직한다.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지만 그때 아버지는 두 번 다시 집을 떠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아들은 깨닫게 된다.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아버지가 끊임없이 집에 가고 싶어하고 멀리 떠나지 말고 집에 있으라는 말을 되뇌는 데는 그런 이유가 있다는 것을. 그렇게 조금씩 자신이 알지 못했던, 아니 알려는 노력을 충분히 하지 않았던 아버지에 대해 이해해간다.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를 기억하기 위한 이 책은 알츠하이머의 발병부터 진행과정과 요양원에서의 노후까지를 다루고 있지만, 알츠하이머에서 흔히 연상되는 고통과 상실, 혼란과 갈등뿐만 아니라 “삶의 끝 또한 삶”이라는 인식에서 알 수 있듯 삶에 대한 무한한 긍정 또한 담고 있다. 빛나는 문장들을 통해 전해지는 병과 노년에 대한 깊은 성찰, 삶과 인간에 대한 성숙한 이해는, 그리하여 고령화 시대를 살며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될 우리 모두에게 울림을 주며 현재를 돌아보고 미래를 준비하는 이정표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처음 이런 상황에 부딪혔을 때는 고통스럽고 기운 빠지는 일로만 여겨졌다.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부모님이 강인하고 삶이 무엇을 요구하든 의연하게 버틸 거라고 믿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아닌 부모님이 약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그동안 나는 이 새로운 역할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치매 환자의 삶을 새로운 기준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_13쪽
아버지에게 치매 밖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족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환자의 현실을 인정하고 그가 겪을 고난을 조금이나마 줄이려고 노력하는 것뿐이다.
이제 아버지가 내 세계로 건너올 수 없으니 내가 아버지에게로 건너가야 한다. _14쪽
아우구스트 가이거의 위트와 지혜. 아버지에게서 말이 더디게 새어나오고 듣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감탄스러운 문장들이 점점 드물어지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이 모든 게 사라져간다는 것이. 마치 피를 흘리는 아버지를 슬로모션으로 지켜보는 느낌이다. _14~15쪽
집에 있으면서도 여기가 집이 아니라는 고통스러운 의식은 이 병의 증상이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치매 환자는 정신적으로 혼란스러운 탓에 안정감을 상실하고 그래서 그 느낌을 되찾을 수 있을 만한 장소를 그리워하는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친밀한 장소에 있어도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는 까닭에 자신의 침대마저 안식처라고 생각되지 않는 것이다. _16~17쪽
1970년대 말 날씨가 춥거나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면, 우리는 주방 식탁에 둘러앉아 인생 게임을 했다. (……) 당시 우리는 짐작하지 못했었다. 게임에서 거치는 여정은 실제 인생에서 우리는 기다리는 것에 비하면 식은 죽 먹기였다는 것을. 또한 까맣게 몰랐었다. 낙오하느냐 앞으로 나아가느냐는 사실 운에 달린 경우가 많다는 것을. _107~108쪽
아버지에게 알츠하이머병은 분명 이득이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자식들과 손자들은 알츠하이머를 통해 여러 교훈을 얻었다. (……)
인생의 마지막 단계인 노년은 끊임없이 변해서 늘 다시 새롭게 배워야 하는 일종의 문화양식이다.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더는 줄 게 없어도, 적어도 늙고 아픈 것이 어떤 것인지는 알려줄 수 있다. 좋은 쪽으로 가정하면, 이것도 아버지로서의 일이고 자식으로서의 일일 수 있다. _153~154쪽
우리 사이에 뭔가가 있다. 세상을 향해 내 마음을 더 활짝 열게 만든 뭔가가. 그것은 말하자면 보통 알츠하이머병의 단점이라고들 하는 것, 즉 관계 단절의 반대다. 때로는 관계가 맺어지기도 한다. _204쪽
▶ 이 책이 받은 찬사
감동 이상의 것이 담겨 있는 책. 노이에 취리허 차이퉁
병든 아버지와 자식들의 관계에 대한 긴 보고서이자 사랑의 증언. 디 벨트
오랫동안 아버지와 소원했던 아들이 아버지를 새롭게 발견하고 아버지와 아버지가 보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치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결코 부정하지 않지만 한탄하지도 않는다. 다정함이 얼마나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는지 상기시켜주는 책.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이 책은 감동적인 휴먼 다큐멘터리일 뿐만 아니라 예술작품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사랑의 이야기다. 타게스안차이거
가이거는 극적인 클라이맥스 없이도 독자들을 사로잡는다. 더없이 심각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비극적이거나 우울하지 않다. 오히려 기지와 삶에 대한 긍정으로 가득하다. 독일 아마존 독자
▶ 옮긴이 김인순
고려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독일 칼스루에 대학에서 수학했으며 고려대 독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고려대에 출강중이다. 옮긴 책으로 『저지대』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 『깊이에의 강요』 『법』 『열정』 『유언』 『반항아』 『결혼의 변화』(상․하) 『하늘과 땅』 『성깔 있는 개』 『기발한 자살 여행』 『독 끓이는 여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