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한 하루의 끝에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왁자지껄한 술자리. 혹은 고요히 혼자서 홀짝이는 술 한잔. 우리는 기쁠 때에도, 슬플 때에도 대체로 술을 찾는다. 기쁨은 기쁨대로 더욱 크게 부풀려 기쁘게 하고, 슬픔은 슬픔대로 앓아내고 나면 조금이라도 쉽게 떨쳐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술’은 우리의 희로애락과 함께해왔다. 아마 인류가 지구상에 존재한 이래로 쭉 그랬을 것이다.
술은 우리를 용감하게도 만들고, 때로는 흥분하게도 하며, 웃게도 하지만 또한 눈물짓게도 한다. 마음을 들키지 않을 수 있게 도와주기도 하고, 솔직해지라고 부추기기도 한다. 묘한 기운을 가진 액체다. 입으로 마시되 피를 타고 섞인다. 온몸으로 퍼지는 마법이다.
이 책에는 소주, 맥주, 막걸리, 탁주, 위스키, 칵테일, 와인 등 여러 가지 종류의 술이 등장한다. 처음처럼, 화요, 삿포로맥주, 금정산성 막걸리와 같이 우리에게 비교적 친숙한 술과 평소에 조금만 관심이 있었던 사람이라면 쉽게 접해보았을 히타치노 네스트, 필스너우르켈 등의 다양한 세계맥주, 그 밖에도 클론 5, 텍스트북 미장 플라스, 부르고뉴 알리고떼 등 다소 생소할지도 모르는 와인들까지……. 그야말로 주종(酒種)을 가리지 않고 모두 들어 있다.
그리고 그 술의 곁에 어김없이 늘 함께인 것은 ‘안주’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오랜 시간 광고대행사에서 일해온 작가이기에 직장에서의 에피소드가 이 책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우리 역시 잘 알고 있다시피, 직장생활과 술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니까.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퇴근 후 한잔은 일의 고단함과 스트레스를 해소해주었다. 사람으로 받은 상처는 아이러니하게도 사람과 함께 치유된다. 술이라는 매개체를 통하면 그 속도가 좀더 빠르다.
지금은 임원의 자리에까지 오른 그녀는 인생의 파도를 온몸으로 맞아온 자로서의 깊이와 연륜을 지니고 있다. 결코 녹록지 않은 삶에서 과하지 않은 술은 그 자체로 ‘버팀목’이었다. 어울리며 함께하는 ‘즐거움’이었다. 잠시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일탈’이었다. 삶의 자연스러운 ‘풍경’이었다. 그렇게 ‘술’은 인생의 ‘모든 것’이다.
그 밖에도 친구나 지인, 사랑했던 사람, 그리고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살뜰히 담고 있다. 한때 깊이 만났던 연인이나 잠시 스쳤던 인연, 그리고 꾸준히 한자리에 있어준 오랜 사람들까지. 술은 기억을 흐릿하게도 하지만 오히려 또렷하게 특정한 장면을 복귀시키는 매개이기도 하다. 술과 함께 익어가고 숙성되어가는 인생이 달큰하지만은 않아도 처연하도록 벅찬 것은 모두 다 ‘사람’ 때문이리라.
작가는 술과 함께 자신의 곁을 지켜준 사람들의 이름을 책의 곳곳에 숨겨두었다.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하듯 글자를 이어나가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하나의 작은 재미가 될 것이다.
작가는 술을 취미로 즐기는 단계에서 나아가 실제로 와인스쿨에서 이론과 문화를 공부했다. 좋아하면 더 알고 싶은 마음은 사람이나 술이나 다르지 않다. 술을 마실 때 단순히 향과 맛을 ‘음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숙성되어온 술의 역사를 통해 ‘이해’했다. 그리하여, 각각의 와인 레이블에 숨겨진 의미나 역사적인 이야기도 곁들여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다. 마담 클리코나 안느 그로이처럼 유명한 와이너리의 특색과 주인장의 성향이나 에피소드들까지도 맛깔나게 안내한다. 알고 먹는 맛은 한층 더 향긋하면서도 풍미가 깊다.
술은 그렇게, 잊혀진 기억을 꺼내놓게 하고, 소원해진 사람을 다시 곁으로 불러내게 한다. 광고인으로서 한평생 살아온 작가에게 이제 작은 바람이 있다고 말한다. 술과 인생에 제대로 잠겨 있는 광고, 마시지 않아도 위로의 한 모금이 되는 광고, 술의 진심․웃음․눈물이 하나로 버무려지는 광고, 그런 광고를 만드는 것.
살다가 어디선가 언제라도 그런 술 광고를 만난다면, 이 책을 읽은 우리 모두는 각자 다른 곳에서 곁을 지켜준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일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분명 따로이지만 충분히 함께일 것이다.
아직 취하기에는 이른 밤, 우리는 여전히 술잔 앞에 있다. 당신 곁에 있다. 그리고 치명적이고도 고혹적인 이 책이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