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집시-난민들의 삶을 취재한 타부키의 문제적 르포!
열 살짜리 마케도니아 소년 S에게 집시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개같이 사는 거요.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 보고 생각해보세요.”(본문 22쪽)
요즘 해외 통신에서는 난민, 불법체류자, 이주민 등과 관련한 뉴스가 연일 화제다. 2023년이면 미국인 7명 중 1명은 이민자일 것이라는 통계 발표, 얼마 전 중동과 아프리카를 떠나 지중해를 건너다 800여 명이 사망한 난민 대참사 소식, 외국인 거주자 및 이민자에 대한 혐오범죄로 7명이 사망한 남아공 사건 등의 보도는 극히 일부일 뿐이다. 숱한 정치-종교-역사 분쟁이 들끓는 현대 국제사회에서 난민 문제는 거대한 이슈다. 특히 유럽은 난민 수용에 있어 포화 상태라며 자국민 감정 동요를 빌미로 여러 사후 대책 마련에 제동을 걸고 있다. 이 난민 수용 문제는 늘 가시거리에 있으나 심각하게 방치되어 있지 않았던가.
이 책 『집시와 르네상스』(1999)는 부제 ‘피렌체에서 집시로 살아가기’가 말해주듯, 서양 문명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꽃피웠다고 알려진 메디치가의 도시 ‘피렌체’를 무대로, 그 외곽에 내쫓겨 살아가는 집시들을 취재한 르포 형식의 논쟁적 글이다. 생전에 늘 정치 현실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참여지식인 타부키는 여기서 ‘집시’라고 통칭된 피렌체 유랑민 문제를 당시의 밀레니엄 화두로 선택해 집중 조명했다. 특히 이들 대부분은 1990년대 초 유고연방 해체 및 1998년 코소보 사태 이후 피렌체로 건너온 세르비아, 코소보, 마케도니아 난민들이다.
작가가 「메모」에서 이 글을 ‘르포르타주의 르포르타주’라고 밝혔듯, 미국 대학 소속 연구자로서 피렌체 집시 상황을 기록하기 위해 온 친구 류바와 동행한 현장들은 이 글의 모티프이자 사유 풍경이 된다. 두 사람은 피렌체 외곽에 설치된 올마텔로 수용소, 포데라초 수용소, 브로치-피아제 수용소 등을 방문하며 그 비참한 현장을 스케치하고 집시들을 인터뷰한다. 동시에 피렌체 시내에서 열리고 있는 막대한 돈이 투자된 화려한 전시회와 대규모 패션&영화 비엔날레 현장을 극명히 대비시킴으로써, 오늘날 자본주의가 초래한 역사 없는 도시의 상투성과 어긋난 정책 방향, 정치인들에 의해 값싼 선거공략으로 이용되는 과시용 ‘환대정책’의 실상, 시 당국과 한통속이 된 미디어의 속물성을 간결하고 명확하게 조명해낸다.
오늘날 이민자 수용 문제의 축소판: 피렌체의 빛과 어둠
“『집시와 르네상스』는 상당히 도발적인 책이다. 낭만적 뉘앙스를 담고 있는 이름 ‘집시’와 근대를 꽃피운 ‘르네상스’의 병치는 호기심을 자극하면서도 교묘한 대비를 이룬다. 다문화 시대 또는 글로벌화와 함께, 현대에는 어디서든 다양한 형태의 집시 또는 유랑민 집단이 형성될 수 있다. 이 책에서 피렌체를 통해 집약적으로 제시된 집시 문제는 오늘날 이민자 수용 문제의 축소판과 같다.” ―김운찬
작가 타부키는 집시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기 이전, 우리가 아는 피렌체란 어떤 도시인가라는 프레임 설정부터 문제삼는다. 즉 이 르포르타주는 우리가 아는 피렌체의 통속성, 이 상투적 신화화를 깨뜨리는 것에서 출발한다. 한마디로 피렌체는 오늘날 자본주의가 통용되는 통속적인 도시의 표본이다. 오늘의 피렌체는 정치가들 스스로가 마케터가 되어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대신 구찌, 아르마니, 베르사체 등을 내세우며 “패션이 예술을 능가했다”고 호들갑을 떠는 도시다. 타부키는 현대판 르네상스를 부르짖으며 패션&영화 비엔날레가 한창인 이 도시의 중심에서 문화와 역사의 빈곤, 자본주의의 맹목을 본다. 즉 메디치가의 영광이란 15세기 말 ‘군사 쿠데타’에 가까운 강제집권에 불과했음을, 피렌체는 유대감이 결여된 부르주아의 속물적 이해타산이 만들어낸 피상적 도시였음을 역설한다.
이는 타부키의 말대로 비단 피렌체만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날 자본주의가 뿌리내린 현대 도시의 폐쇄성과 배타성은 어느 도시나 마찬가지로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15~18세기 피렌체를 지킨다는 명목하에 메디치 영주체제가 ‘부랑자들, 방랑자들, 행상꾼들, 노래꾼들, 거지들’을 상대로 선포한 ‘포고령’을 예로 들며, 피렌체가 지닌 역사적 폐쇄성이 오늘날 이민자 수용 문제의 전형으로 이어짐을 목도하게 만드는 타부키의 통찰력은 실로 놀랍다. 이는 자국민을 보호한다며 타민족과 타문화에 대해 배제의 이데올로기를 작동시키는 작금의 국가정책에서도 심심찮게 드러나는 현실이다.
작가는 그간 우리가 보지 못한 피렌체의 외곽으로, 부표같이 떠 있는 집시들의 열악한 터전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이를 최대한 다각도에서 조망하도록, 타부키는 류바와 주고받은 대화, 관련 논문이나 참고문헌, 집시들과의 인터뷰, 스크랩한 신문기사, 시위 현장 녹취록 등을 고스란히 우리 앞에 풀어놓는다. 작가가 번호로 매긴 간결한 에피소드들과 풍광들은 그 자체로 우리가 여태껏 간과해온 피렌체를 사유하게 하는 증언들인 셈이다. 수용소 내의 열악한 기간시설, 위법과 준법 사이를 오가는 집시들의 생계 악순환 문제, 자원봉사자들의 활동과 이를 못마땅해하는 시 당국, 책임을 회피하는 시장, 돈 한 푼 안 내는 집시를 도둑놈으로 몰아붙이는 피렌체 시민들의 수용소 건립 반대 시위 현장의 목소리, 정치가 및 경찰과 곧잘 타협해 왜곡된 집시 현실을 보도하는 언론 등 여러 현장이 카드놀이하듯 펼쳐진다. 타부키는 이 33개로 구성된 프레임을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피렌체의 어제와 오늘의 르네상스가 지닌 실상을 폭로하고, 이 도시의 얼굴과 역사를 만들어나갈 주체는 과연 누구이며, 우리 각각은 다가올 현실을 어떻게 재구성해나갈 수 있을지 되묻는다.
타부키가 이 글을 발표한 1990년대 후반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난민 수용 문제는 절박한 화두다. 그뿐만 아니라 그때에 비해 지금 난민들의 상황이 개선되었다고 할 수도 없다. 어떤 국가나 민족에도 속하지 못한 채 목숨을 걸고 이 땅에서 저 땅으로 맨몸을 들이밀며 싸워야 하는 난민들의 상황은 여전하다. 이탈리아 내 이민자 수용 문제를 전면적으로 건드린 이 문제작은, 우리에게 집시 문제와 관련해 다각도에서 질문을 촉구하는 성찰의 책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