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 이야기, 밥상 이야기:
‘무엇을 먹을까’ 다음엔 ‘어디에 담을까’
거리마다 맛집이 들어서고, 식도락 TV 프로그램이 융성하며, 어디서든 ‘무엇을 먹을까’가 진지한 고민거리다. 그런데 여기에 빠진 이야기가 있다. ‘어디에 담을까’의 문제다.
몇 년 전, 한식 세계화 열풍이 불었을 때, 저자를 가장 안타깝게 한 것은 다름 아닌 그릇이었다. 여러 가지 음식이 한국을 대표한다고 아우성들이었는데 어떤 방송에서도 그 음식이 담기는 그릇에 관한 이야기는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어떤 방송에서는 플라스틱 그릇에 담긴 떡볶이를 그대로 내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음식은 그릇에 담길 때 비로소 완성되며, 삶의 행복은 귀하게 차린 밥상에서 시작된다는 것이 저자의 믿음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누구나 조금만 정성을 기울이면 즐길 수 있는 밥상, 술상 연출법을 제안한다. 소소한 일상을 아름답게 즐기는 생활의 기예다.
한편, 가짓수는 많지 않더라도 정성껏 차린 밥상머리에서 가족과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고 친구들을 불러 술상을 보는 풍경이 사라진 것 또한 우리 시대의 안타까운 풍경 중 하나다. 저자는 외식 문화로 굳어진 우리의 밥상 문화를 집으로 소중한 사람들을 함께 즐기는 문화로 다시 바꾸어보자고 제안한다.
■ 이윤신이 말하는 그릇으로 멋지게 사는 법
음식에 어울리는 그릇을 찾다:
음식을 담을 때 먹음직스럽게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맛있게 만든 음식은 거기에 꼭 맞는 어울리는 그릇을 선택해야 비로소 빛난다. 예컨대 두께가 얇고 넓적한 음식은 접시에, 볼륨이 있는 음식은 볼에 담는 것이 예쁘다. 전이나 생선구이 등은 접시에, 나물 종류나 찜 등은 오목하고 깊이가 있는 그릇에 쌓아올리듯 담으면 먹음직스럽게 보인다.
술잔을 고르며 행복을 음미하다:
술상에서 가장 중요한 기본 법칙은 와인과 위스키를 제외하고는 병째로 올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주든 정종이든 막걸리든 도자기 병에 따르고 술잔도 거기에 맞추어 낸다. 그리고 모인 사람들이 직접 고를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잔을 준비한다. 소중한 사람들과 술을 마시기 전에 각양각색의 술잔을 음미하며 어디에 술을 따라 마실지 고민하는 순간, 행복은 시작된다.
그릇을 들여다보며 이야기를 시작하다:
식구들 밥상이든 손님 초대상이든 한가지로 맞추지 말고 다양한 그릇을 준비해 변화를 즐겨보자. 앞접시를 모두 다른 종류의 그릇으로 고르되 형태만 원형으로 통일하는 방법, 혹은 그릇 종류는 두 가지로 하고 원형과 사각 접시로 변화를 주는 방법 등이 있다. 그렇게 식탁을 차려놓으면 자리에 앉는 순간부터 서로의 그릇을 들여다보며 자연스럽게 대화가 시작된다.
짝을 맞추어 그릇 컬렉션을 만들다:
새 그릇을 살 때 집의 모든 그릇을 바꾸려 하지 말고 우선 두 개, 혹은 네 개쯤 짝을 맞추어 사서 용도를 달리하며 자주 써보자. 밥그릇도 좋고 접시도 좋다. 두 개, 혹는 네 개 정도를 같은 것으로 맞추어 모으다보면 나중에 그릇이 늘어났을 때도 중구난방이 될 위험 없이 다른 그릇과 어울리게 놓을 수 있다. 그릇 모으는 재미, 연출하는 재미를 즐길 수 있다.
찬장을 열어 그릇 전시를 즐기다:
문이 달리지 않은 열린 찬장을 써보자. 그릇이 한눈에 보이면 부엌이라는 공간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국그릇, 밥그릇, 접시 등 용도별로 그릇을 쌓아보자. 엎어놓기보다는 위로 향하게 쌓아 바로 꺼내 쓸 수 있게 한다. 먼지를 두려워하지는 말자. 그보다 더 즐거운 일들이 기다린다. 굳이 음식을 담아내지 않아도 그 자체로 그릇을 감상할 수 있다. 아이들이 스스로 쓰고 싶어하는 그릇이 생길지도 모른다. 멋을 좀 아는 부인, 뭔가 특별한 엄마가 되기에 참 쉬운 방법이다.
그릇이 삶이다, 삶이 곧 예술이다: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사랑하는 법
더불어 그릇 인생을 되돌아보며 쓴 스물여덟 편의 산문으로 이뤄진 이 책은, 몇 번이고 구워내길 반복해도 늘 뜻대로만 되지는 않는 그릇 만들기에서 배운 삶의 철학 이야기로도 읽힌다. 철학이란 것이 거창한 관념이 아니라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태도를 지칭하는 거라면 말이다. 저자는 물레를 차고 가마에서 그릇을 굽는 동안 인생을 배웠다. 그릇은 중용을 지킬 줄 아는 사랑을 필요로 한다. 흙이 예뻐 자꾸 주무르다보면 폭삭 주저앉아버리기에 그릇을 만들 땐 어느 순간 손을 탁 뗄 줄 아는 무심함이 필요하다. 한편, 초벌구이를 마치고서는 습기가 남아 있지는 않은지 하나하나 돌봐주면서 정성을 기울여야 가마에서 깨지지 않는다. 이때 조금만 방심해도 얄미운 애인같이 도망가버리기 일쑤다.
살뜰히 보살피되 거리를 두어야 하는 작업, 안양 반지하 공방에서 시작해 25년을 넘게 그릇을 만들며 깨달은 삶의 이치는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하루하루 녹록치 않은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공감을 자아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우리 인생은 다루기에 따라 ‘스테인리스’ 인생이 될 수도 있지만 ‘도자기’처럼 곱게 가꿀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렇게나 해도 상관없고, 막 던져도 깨지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여긴다면 스테인리스처럼 거칠고 투박한 삶이 될 것이다. 그러나 소중하게 다루고 아낄 줄 안다면 우리 일상도 곱게 빚은 도자기처럼 아름답게 만들어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삶을 다루는 태도다. 내용을 담는 형식이다. 인생도 인생을 담는 그릇에 따라,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진다. 조금만 더 조심스럽게, 정성스럽게 살아보자는 것, 이것이 그릇이 들려주는 인생의 지혜다.
“도자기는 깨진다. 유리도 깨진다. 그러나 유리잔이 깨진다고 와인을 금속잔에 마시지는 않는다.”(172쪽)
흙은 너무 관심을 가져도 또 지나치게 방심을 해도 안 된다. 꼭 사람과 사람 사이 같기도, 혹은 애인 사이 같기도 하다. 처음 흙을 만질 때, 그 물성에 푹 빠져서 자꾸 만지고 주무르고 손을 대는데 도가 지나치면 군더더기가 많아지고 깔끔하지가 못해 완성도가 떨어지게 된다. 적당한 자제가 필요하여 어느 순간 손을 탁 떼는 것이 프로답다. 또 성형이나 건조 과정에서는 끝까지 돌보아주어야 실패가 없다. 이때 방치했다가는 얄미운 애인같이 도망가버리기 일쑤다. 갈라지거나 깨지거나 하여 완성에 다가갈 수 없다. (…) 선풍기는 열심히 돌아가고 있는데 거의 바람개비 수준이다. 의자에 몸을 바싹 붙이고 앉아 꼿꼿이 세운 등허리에서 한 줄기 땀이 주르륵 흐른다. 그런 때의 충만감은 믿을 수 없다.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걸까…… 표현하기 힘들지만 나는 알고 있다. (146∼147쪽)
그 당시 그릇을 만들며 조금 거창하게 말하면 자기성찰의 기회를 많이 가질 수 있었다. ‘흙이 나를 거부하거나 나를 거절하는 존재인가?’ 하는 고민과 함께. 그러나 작업의 고통은 달콤하다. 분명히 내가 해결할 것이고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애타지만 나에게 넘어오리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그만큼 달콤하지 않나.
도자라는 것이 황당무계한 공상 세계에 있는 건 아니지만 숫자로 표시되는, 확실하게 예측 가능한 세계에 있는 것 또한 아니다. 그려내거나 나무를 자르고 돌을 쪼거나 기계로 자르면 가능할지 몰라도 도자는 다르다. ‘가마’라는 1250도의 불길 속에 넣어야만 한다.
젖어 있을 때의 흙은 어찌 그리도 예쁜지. 그리고 초벌했을 때의 그 살구빛은 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그러나 뜨겁게 달구어져 나오는 완성품은 번번이 나를 실망시켰다. 그 예쁘던 것이…… 이건 아니야, 아니야. 머리를 쥐어뜯고 싶다. 내 손끝에서 아름답게 변신했던 촉촉하기만 하던 흙덩어리는 이제는 보기 싫은 괴물로 변해 내 눈앞에서 던져진다. 나는 상심해서 어찌해도 마음이 달래지지가 않는다. 이런 현실을 몇 백 번 겪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드디어 내 맘에 꼭 드는 지금의 청연 시리즈가 나오게 되었다. 그렇게도 좋을 수가 없었다. 며칠이나 몸살을 앓을 정도로 갖고 싶던 것을 손에 넣었을 때처럼 기쁨에 들떠 혼자 들여다보고 좋아라고 히히거리면서 정신 나간 듯이 만들어댔다. 밥그릇, 국그릇, 반찬그릇, 과일접시, 국수그릇, 커피잔, 종지…… (151∼15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