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신을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되어간다!
“인간이라는 직업을 직접 살아낸다는 것은 인생의 우여곡절을 감내할 수 있게 돕는 삶의 기술을 체득하여 늘 좀더 깊이 기쁨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산다는 것은 피치 못할 시련을 당해내고 역경에 맞부딪치고 불확실성을 감당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약함이 꼭 중압이나 장애만은 아니며 놀라운 풍부함의 장소가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을 깨닫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요!”
_‘한국의 독자에게’에서
“‘인간이라는 이 망할 직업!’ 이렇게 말하는 저자라면 어떤 이야기라도 들어줄 용의가 있다. 그리고, 여기 ‘장애인 철학자’ 알렉상드르 졸리앵의 인생론이 있다. 면밀한 사색과 유연한 성찰을 통해서 그는 ‘인간이라는 직업’을 살아낸다는 것의 의미를 이모저모 밝힌다. ‘동업자’로서 여러 번 무릎을 칠 수밖에 없었다. 당분간 이 직업을 떠날 수 없는 모든 이를 위한 훌륭한 ‘직업 안내서’다.”
_이현우(『로쟈의 인문학 서재』 저자)
불가능의 중심에서 일구어낸 삶의 진실과 의미
가장 기대할 수 없었던 곳에서 희망이 다시 솟아난다!
당신은 알고 있는가? 우리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인간이라는 직업’을 가지게 되었음을, 그리고 삶을 살아가는 내내 ‘인간이라는 직업’의 일터에서 일하고 있음을. 또 당신은 알고 있는가? 우리 인간은,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일터에서 일하면서 수습 기간을 거쳐 인간이 되어간다는 것을.
여기 ‘인간이라는 이 망할 직업!’이라 외치는 장애인 철학자 알렉상드르 졸리앵이 있다.
탯줄이 목에 감겨 질식사 직전에 기적적으로 태어나 뇌성마비를 갖게 된 졸리앵은 이 장애로 평생 단 하루도 어려움이나 문제에 부딪히지 않고 지나간 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고통과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고통에 대한 철저한 숙고를 통해 『인간이라는 직업』에서 ‘인간이라는 직업’이 근본적으로 인간의 한계이자 고통의 장소인 몸과 마음으로 치루는 고통에 대한 전투이자,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절망과 삶에 대해 희망을 놓아버리지 않기 위한 전투, 수많은 차이와 그에 따른 편견어린 시선에 대한 전투, 정상인과는 다른 사람들을 잉여로 만드는 사회에 대한 그리고 그것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내면의 수동적 합리화에 대한 전투, 수많은 고통을 가진 동료들만이 아니라 정상인 ‘동업자’들과 함께 치루는 전투라는 점을 ‘면밀한 사색과 유연한 성찰을 통해’ 밝히고 있다.
“이 책에서 나는 인간의 실종이라는 커다란 일터를 탐험하는 도전에 나섰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사람이라면 자기 몫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고, 이 몸을 지닌 채 살아야 하며, 남들의 시선을 감당해야 하고, 참으로 존재하기 위해 ´남들이 뭐라 할까´라는 염려를 떨쳐버려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현실을 충만히 살면서 어리석음을 깨고자 한 니체의 계획을 완수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일체의 환상과 편견을 없애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닥의 바닥까지 내려가 그곳에서 평화와 기쁨, 사랑을 찾아내야 합니다. 이 길을 떠나기 위해 짐을 싸거나 거추장스러운 물건들을 챙길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저 날마다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그리고 지금 있는 수단만 갖고 나아가겠다는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5쪽)
하지만 이 전투는 흔히 혹은 쉽게 예상하듯 단지 고통스럽고 외롭고 폭력적인 전투가 아니다. 삶의 기쁨을 위한 즐거운 전투이며 절망으로 자신의 삶을 저버리지 않기 위한 희망의 전투, 불행에 침잠하기보다는 행복과 웃음을 향한 전투 즉, 좀더 나은 삶을 위한 전투이다. 이 전투의 과정에서 그가 자신의 장애를 가진 몸으로 일궈낸 성찰들은 그 자신의 삶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인간이라는 직업’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삶을 위한 더없이 중요한 진실과 의미를 담은 것이며 모든 인간의 삶과 삶을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을 빛나게 한다. 그것이 저자 알렉상드르 졸리앵 자신의 ‘고통을 통한 앎’의 결과이고, 그를 가르친 것이 ‘비극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다.
알렉상드르 졸리앵과 그의 『인간이라는 직업』은 ‘현실의 풍부함, 인간 존재의 풍부함’과 ‘인간의 맛깔진 비정상’을 새롭게 발견하고 인식할 수 있도록, 하나하나 다르고 독특한 인간을 ‘풍부하고 유일하고 축소할 수 없는 개별성’을 지닌 존재로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가 우리의 몸을, 우리의 삶을, 우리의 현재를 ‘왜?’라는 질문 없이, 유보조건 없이 누릴 수 있도록, 자신을 가로막거나 묶는 사고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기쁨과 더 큰 행복으로 향하는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돕는다.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되어’가며 그 태어난 조건과 되어가는 과정은 모두 다르지만 그들 모두 ‘인간이라는 직업’을 받아들이고 나날의 전투를 행함으로써 ‘인간으로 되어간다!’는 진실의 온전한 무게를 알렉상드르 졸리앵은 자신의 전투가 기록된 이 책 『인간이라는 직업』을 통해 자신의 온몸과 마음으로 전해주고 있다.
■ 본문에서
“인간됨의 끝까지 가고 일상의 우여곡절을 감당하려면 우리에겐 삶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삶의 기술이란 즐거운 금욕이며, 바로 여기서 이 책을 움직이는 커다란 물음이 나옵니다. “어찌 하면 좀더 낫게 살 것인가?””(6쪽)
“한국이 내게 인간이라는 직업을 심화할 기회를 주고 일상 한복판에 정신성을 갖다놓도록 도와주었기에 나는 새 출발을 할 절호의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나는 서울 지하철을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를 좋아합니다. 시내에서 길을 잃기도 하면서 이 새로운 세계를 탐색하고 다니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서 나는 이유 없는 삶, 즉 왜냐고 묻지 않는 삶을 살아보려 진심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유 없이 산다는 것은 차츰차츰 ´남들이 뭐라고 할까´라는 부담을 벗는 것이며, ´훗날´이라는 것의 독재에서 풀려나 나 자신을 온전히 현재에 내어주는 것이며, 쓸데없는 목표 같은 것을 줄이고 유보조건 없이 인간이라는 직업에 몰두하는 것입니다.”(7쪽)
“나는 삶이 내게 세 가지 소명을 주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장애인의 소명, 가장의 소명, 그리고 작가의 소명입니다. 내게 주어진 장애인으로서의 소명이 감당하기 쉽지만은 않았음은 말할 나위도 없겠습니다. 그 무엇에든 집착하는 순간 반드시 고통이 찾아듭니다. (…) 장애는 장애가 아니니, 내가 그것을 장애라 부른다. 장애가 단지 말이요 꼬리표요 마음속에 세운 것이요 각종 비교가 뒤범벅된 것임을 아는 순간부터, 나는 진정 장애가 무엇인지에 대한 시각이 트였습니다. 다시 말해 이 『금강경』 구절 덕분에 내게 장애가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고도 나를 일개 장애인으로 깎아내리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순간순간마다 나는 매번 다른 식으로 장애인입니다. 다만 마음이 삶이라는 큰 강의 흐름을 일반화하고 경직시킬 따름입니다.”(7-8쪽)
“인간이라는 직업은 악착스런 집착과 비극을 부정하려 진을 빼거나 결핍을 지워버리고 피치 못할 고통 곁을 그냥 지나치느니 차라리 불완전한 점들을 그대로 지닌 채 이 세상을 살아가라고 우리에게 권합니다. 고통을 두려워하면 할수록 점점 더 괴로워진다는 잔인한 법칙이 있습니다. 이건 대단히 불행한 일이지만, 나는 행복에 손을 뻗어 그 행복을 테두리 속에 가두고 나라는 존재와 내가 하는 행위 속에서 행복을 느끼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내 삶의 먼지를 탈탈 털어내고 모든 집착을 벗고 매일매일, 매번의 숨과 삶을 새로운 눈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9쪽)
“소수자로서의 체험이 우리가 지닌 조건을 넘어선 어떤 독특한 문을 열게 할 수 있다. 존재 전체를 감당할 수 있는 마음 상태로 단련하기 위해 약자와 직면하기 시작하는 것. 그것이 이 여정을 설명하는 근본적이고 무모한 직관이다.”(20쪽)
“똑바로 서서 방향을 유지하는 기술은 분명히 보다 행복한 지평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 진전을 방해하는 것은 고통도 아니고 실패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절망이다. 희망하기를 멈추는 것, 그건 도전해보지도 않고 패배를 인정하는 일이며, 우리 노력 하나하나를 헛되게 하는 짓이다. 즉 자신이 취약하며 개선의 여지가 있음을 다시 인정하는 일이고, 불확실한 땅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며, 왜 싸우는지, 왜 기쁘게 싸우는지를 알려고 노력하는 것이다.”(42쪽)
“최악인 것은 내가 오랫동안 이런 꼬리표들이 진짜라고, 즉 ‘장애인=불행한 사람’이라는 공식이 확고하고 입증된, 반박할 수 없는 법칙이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의사조차도, 예컨대 내가 보통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는 들어갈 수 없을 거라고 확실히 말했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꼬리표는 뗄 수가 없었다. 얼마나 많은 이런 모진 진단들이 일체의 희망을 닫아버리고, 축소하고 저주했던가!
그런데 바로 이 판단의 고정성 때문에 현실의 풍부함, 인간 존재의 풍부함이 축소돼버린다. 이 풍부함 앞에서 비록 감탄은 못할지언정 적어도 놀라기는 해야 할 것임에도 말이다. 때로는 이 확립된 진실들을 일상적 체험이 감미롭게 무너뜨린다. 누구나 장애인을 보면 저 사람은 불행할 것이라고 예단하지만, 정작 그 장애인은 옆 사람들의 기운을 북돋워주는 존재다. 반면에 창창한 앞날이 보장된 머리 좋은 엘리트인데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불편한 삶 속에 침잠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는 행복할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46-47쪽)
“우리는 한 인간을 정말로 ‘우울증 환자’ ‘금발’ ‘평발’ ‘흑인’ ‘이기주의자’ 같은 말로 한정할 수 있을까? 이런 지칭이 정말 우리가 개개인 속에 있는 신비를 포착할 수 있게 도와줄까? 나는 이런 말들에서 오히려 위험을 본다. 물론 판단이라는 것을 일절 금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너무 성급한 단정으로 생기는 상처를 피해야 한다는 것이며, 적어도 좀더 낫게, 다른 식으로, 불필요한 요소를 다 제거하고 군더더기 없이 보려는 노력이라도 해보자는 것이다.
말 뒤에 숨어 있는 것은 하나의 존재, 풍부하고 유일하고 축소할 수 없는 개별성인데, 선입견의 무게는 끝내 단호함을 뽐내는 하나의 층(層)으로 이를 덮어버린다. 이러한 겉치레 때문에 단순하고 편견 없는 접근이 어려워진다. 훨체어, 시각장애인용 흰 지팡이, 오직 이런 것만 눈에 띄는 것이다. 그러나 훨체어를 놀랍도록 숙달된 솜씨로 타고, 흰 지팡이를 능숙하게 다루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것이 사람들 눈에 보이는가? 사람들은 과연 보려고 하는가? 그리고 그런 부속물들이 어째서 반드시 불행의 징표란 말인가? 이처럼 밖으로 보이는 표시들이 ‘행복한 맹인’을 아예 상상하지 못하게 하는 까닭도 이런 것이다. 일반적인 진술을 조심하고 개인을 그 진실에 입각해 (겉보기보다 항상 더 밀도 있게) 고찰해야 하는데 말이다.”(48-49쪽)
“내게 유일한 자부심은 이런 것이다. 권리와 의무를 남과 똑같이 지닌 인간이라는 것, 같은 조건, 인간의 고통, 인간의 기쁨, 인간의 요구 사항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이 자부심은 우리 모두를 한데 묶어준다. 청각장애인이나 다리를 저는 사람이나 모두 마찬가지다. 에티오피아인이나 언청이나 마찬가지고, 유대인이나 앉은뱅이나 마찬가지며, 맹인이나 다운증후군 환자나 마찬가지고, 이슬람교도나 노숙자나 마찬가지며, 당신이나 나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인간’인 것이다!”(50쪽)
“한 사람 한 사람이 고유한 하나의 ‘사례’이고 맛깔스러운 예외인 것이다.”(51)
“사람들이 인지하는 것은 타인이 겪은 번민의 편린들, 환자의 고통일 뿐이다. 사람들은 당장 지금 여기 있는 것만을 느낀다. 기쁨과 행복이 쉽게 여럿이 나눌 수 있는 것이라면 고통은 혐오감을 주고, 수치스럽고, 사람을 고립시킨다. 그러곤 거기에 고문이 또하나 덧붙는다. 남들의 판단을 받는 것, 이해받지 못하는 것, 너무 버거운 무게를 홀로 짊어지는 것. 그 어느 때보다도 누가 다정히 귀 기울여준다면 고통이 줄어들 것만 같은 그런 시점에 말이다. 고통받는 사람이 자기라고 생각하는 것, 그것은 어려운 연습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 곁에 있을 수는 있다. 있으면서 힘이 되어주려고 노력하고, 특히 판단을 삼갈 수 있다. 고통당하는데 누가 있어준다는 것―아무리 있는 듯 없는 듯하더라도―, 그것은 모든 걸 통제한다고 뻐기는 담론보다 훨씬 윗길이다. 눈길 한 번, 미소 한 번, 말 한 마디, 이것이 내 몫의 행동이다. 사랑하는 존재가 파멸해가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채로 그저 곁에 있어준다는 것, 힘을 주는 몸짓을 찾아내려 애쓴다는 것, 이는 어려운 과제다. 그러는 동안 절망이 압도해버린다! 연약한 미소, 불분명한 말, 숱한 노력 끝에 얻어낸 지원, 이런 것들이 부질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그런 것이 없다면 핵심이 빠진 것이다.”(66-67쪽)
“고통을 갖고 어떻게 하느냐, 그것이 한 개인을 키울 수 있다. 활짝 피어나기 위해 일부러 고통받을 필요는 전혀 없다. 타인이 존재함을 감사하기 위해 일부러 고립을 경험할 필요도 전혀 없다. (…) ‘고통을 통한 앎’이라 불리는 그것은 다음과 같은 체험에서 출발한다. 대가 없고 부조리하고 의미 없는 고통보다 더 나쁜 것은 없다는 체험. 젊은 엄마는 출산의 고통을 기쁘게 잊고, 트로피를 받은 승리자는 몸살과 찰과상이 씻은 듯 사라지지만, 대가도 결실도 없는 고통은 영영 지워지지 않는다. 그런 고통은 우리에게서 자유를 탈취하고 조금씩 앗아가버린다. (…) 위험을 찾아 달려가라는 것이 아니고, 고통 속에 뒹굴라는 애기도 아니다. 다만 고통에서 뭔가 얻어내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는 얘기다! 에밀 시오랑이 한줄기 빛을 던져준다. “고통은 눈을 뜨게 하고, 고통이 아니었다면 인식하지 못했을 것들을 보도록 도와준다. 그러니 고통은 오직 앎에 쓸모 있을 뿐이며, 앎을 벗어나면 실존을 악화하는 데만 쓸모가 있을 따름이다”라고.”(69-70쪽)
“나 자신의 고통에 대해 무력하다고 느끼기기는 하지만, 도움을 받아보면 나 역시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상처를 마음 깊이 신경 쓰게 된다. 이처럼 ‘고통을 통한 앎’에는 구원해주는 교류가 필요하다.”(77쪽)
“보통 몸을 예찬할 때 사람들은 운동선수나 모델의 이미지를 가져온다. 그런데 나는 반대로 ‘식물인간’에게서 우리 본성의 토대가 되는 것을 찾고, ‘식물인간’의 허약한 체질에서 우리 몸이 실현하는 기적의 대상과 몸이 재현하는 경이를 분감하게끔 하는 사고의 궤적을 발견한다. (…)
삶이 워낙 취약한 것인데도, 조만간 내 몸도 저와 똑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인데도, 나는 소박한 기쁨이 생겨나는 것을 느낀다. 나, 나는 살아 있다. 그리고 아직 모든 것에 대항하여, 모든 것을 향하여 싸울 수 있다. 마지막 몇 시간을 살아내고 있는 저 살, 머지않아 감길 사랑하는 두 눈, 이미 모든 힘이 사라져버린 얼굴 위에 떠도는 일종의 미소는 내게 존경을 가르친다. 몸은 하나의 대상으로 축소되지 않는다. 대단한 노력을 지불하고 얻어낸 미소는 이미 멀리 있는 심장에서 나온다. 그 심장은 예전에 내 고난과 기쁨을 함께했다. 너무 빨리 죽음을 향해 가는 환자는 두려운 요구 사항을 내게 유산으로 남긴다. 내 몸을 누리라는 것이다.
‘식물인간’은 인간이라는 직업을 막 공부하기 시작한 수습생에게 항상 몸의 중요성을 의식하라고 강요하며, 몸을 거북함의 대상으로 삼지도 말고 경배의 대상으로 삼지도 말라고 권한다. (…)
비록 망가졌을망정 이 몸이 내게 탁월한 서비스를 베풀고 있다는 것을 어찌 인정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식물인간’은 아예 결정적으로 내가 그걸 확신하게 한다. 나는 기뻐하면서, 내가 걸을 수 있다는 것의 가치, 말한다는 것의 기쁨, 어렵게나마 치약 뚜껑을 열 수 있는 행복, 기차에 올라탈 수 있는 행복을 식물인간 덕분에 가늠하게 된다.”(83-87쪽)
“사회의 눈으로 보면 사람들은 아직 모두 평등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담론은 가난한 자, 장애인, 환자를 불행한 사람의 반열에 끈질기게 올려놓으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축구장에서 서로 갖겠다며 싸우는 저 빌어먹을 공 하나를 발로 차는 것조차 못하는 나는, 날더러 자살골을 넣었다고 말하는 사회를 비난하는 것을 거부한다. 내가 누구이기에 사회를 판단한다는 말인가? 나도 사회의 일원이 아닌가?
장애인하면 자동적으로 별로 부러운 팔자를 타고 나지 않았다고 은근히 암시하는 그런 생각을 우리는 깨부수어야 한다. 무관심한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고 흔들면서 자신의 취약함을 기쁨과 끈기로 받아들여야 할 책무가 있으며 생 앞에서 기쁘게 즐길 줄 아는 수많은 ‘다른’ 이들은 그 생각을 깨부수는 일에 공헌해야 한다.
잘 생각해보면 인간은 본성상 어떤 정의(定義)에도 어떤 규범에도 구속될 수 없지 않은가? 개개인의 아름다움은 바로 그 독특함에 있는 것 아닌가?”(118-1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