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북디자인이라면, 있는 책도 다시 사고 싶어진다!”
갖고 싶은 책을 만드는 북디자이너, 피터 멘델선드의 표지 이야기
#클래식 피아니스트, 북디자이너가 되다
30대 초반의 전업 클래식 피아니스트. 그는 기로에 놓여 있었다. 과연 이 길로 계속 나갈 수 있을 것인가. 꽤 괜찮은 실력을 갖춘 피아니스트지만, 그 세계에서는 ‘꽤 괜찮은’ 정도로는 생존하기 어렵다. 게다가 아이도 태어났다. 의료보험도 없다. 캄캄한 앞날을 고민하다가 우울증 증세마저 보이기 시작했다. 이것도 저것도 ‘내 길’이 아닌 것 같았을 때 그의 아내가 한마디 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 남자의 인생이 바뀐다. “디자인은 어때?”
그때까지 그의 ‘디자인’ 경력이라고는 자신의 결혼식 청첩장과 친구들이 하는 밴드의 CD 재킷 정도가 전부. 하지만 그 한마디가 마치 스위치가 된 것처럼, 그때부터 그는 디자이너가 되기 위한 최소한의 교육을 받고, 디자인에 관한 책을 찾아 읽는다. 그리고 어머니 친구의 친구인 ‘북디자인계의 교황’ 칩 키드(크노프 출판사의 수석 디자이너)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동화 같은 일이 벌어진다. 그의 포트폴리오는 칩 키드의 표현을 빌리면 “청하지도 않았는데 받아야 했던 산더미처럼 쌓인 원고들 가운데서 위대한 소설 한 편을 발견한 것”에 비교할 수 있을 만한 일이었던 것. 이렇게 드라마처럼, 전직 피아니스트였던 그 남자, 피터 멘델선드는 미국 굴지의 출판사 크노프사에 채용된다.
11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니까 이건 현재 크노프사의 부수석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600권이 넘는 책의 표지를 디자인했고, 카프카, 도스토옙스키, 보부아르, 푸코 등 기라성 같은 작가들의 전집 디자인은 물론 <용 문신을 한 소녀>(한국어판 제목은 <여자들을 증오한 남자>), <스노우맨> 등 최신 베스트셀러의 표지 디자인을 도맡아한 북디자이너의 11년을 집대성한 책인 것이다.
#디자인 작품집, 혹은 그 이상
미국에서 디자이너로 성공하면 밟는 수순이 있다고 한다. “이름을 알릴만큼 그런대로 괜찮은 디자인들을 만들고 나면, 그리고 필수적인 인터뷰에 참여하고 의무적으로 해야 할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필요한 단체들의 위원회에 참석하고 나면, 디자이너가 자신의 작품에 관한 책을 출간하는 것이 필수적인 일”이 되는 것이다. 현재 가장 ‘핫한’ 북디자이너의 한 명인 피터 멘델선드의 <커버>도 결국 성공적인 디자이너의 ‘작품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대부분 ‘책의 형태로 나온 디자인 포트폴리오’에 지나지 않는 디자이너들의 책과는 달리, “책이란 글로 쓰인 것이어야 하고 더 나아가 그 책의 저자가 쓴 것이어야 한다”라는 지은이의 ‘개인적인 편견’에 따라, 이 책에는 책 표지를 디자인한다는 것에 관한 지은이의 견해가 풍부하게 실려 있고, 그의 디자인으로 책을 내게 된 저자들의 마음에서 기꺼이 우러나온 상찬이 들어 있으며, 또 성공한 디자인뿐 아니라 여러 가지 이유로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그러니까 ‘킬된’) 디자인들도 풍성하게 수록돼 있다.
디자인 ‘정규교육’을 받지 않고 서른이 넘은 나이에 북디자이너가 된 피터 멘델선드, 그래서 여전히 남들은 당연히 다 알고 있는 것들을 배워가고 있는 이 특이한 북디자이너의 표지들은 (아마도 그렇기에) 신선하고 아름다우며 그 책의 본질을 담고 있는 것들이다.
#“재미있고, 스마트하고, 아름다운”
시몬 드 보부아르 전집을 위한 표지 디자인은 1968년 혁명의 벽보들과 담벼락 스텐실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철학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혁명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었던 한 작가를 위한 탁월한 선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표지에 손글씨를 입힌 이 책에 대해 뉴욕타임스는 “충격적인 성공은 아마도 눈길을 끄는 표지 덕분일지도”라는 평을 하기도 했다.
카프카 전집의 표지 디자인은 모두 ‘눈[目]’을 모티프로 하고 있다. 팝아트 같은 단순한 형태와 강렬한 색채로 이뤄진 이 표지들은 미국의 소설가 제인 멘델손의 표현에 따르면 “모두 재미있고, 스마트하고 아름”다우며 “모두 읽기, 쓰기, 인식의 시각적 본질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는 것이다. ‘눈’이라는 하나의 모티프를 통해 이처럼 다양하고 책의 본질을 꿰뚫는 동시에 하나의 시리즈로서 통일성까지 이뤄낸 것이다.
그가 디자인한 책들은 고전에서 현대문학, 장르 소설, 만화, 논픽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망라한다. 교양 과학서의 베스트셀러 작가 제임스 글릭의 <인포메이션> 표지 디자인의 경우, 멘델선드는 표지에 ‘the information’이라는 단어를 60번쯤 반복해 마치 코드가 홍수처럼 밀려오는 듯 표현했다. 제임스 글릭은 이 표지에 대해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은 책을 요약할 중심 이미지를 찾지만 피터는 이미지가 아니라 아이디어를 찾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마도 가장 성공적인 멘델선드의 표지는 스웨덴의 스릴러 작가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 첫 권 <용 문신을 한 소녀>일 것이다. 거의 70종의 시안 디자인을 내놓은 끝에 결정된 이 형광빛 문신 이미지 표지의 책은 거의 1,000만 부가 팔려 나갔다. 크노프 더블데이 출판그룹의 대표이자 편집자인 소니 메타는 이 책이 블록버스터가 되는 데 이 참신한 표지의 역할이 상당했다고 평가했다.
이 책에는 실제로는 출간되지 않은 표지들도 많이 소개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이 <롤리타>를 위한 가상의 표지다. 이는 애초부터 출간을 염두에 두지 않고, 그저 지은이가 이 논란 많은 책을 어떻게 디자인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한 끝에 얻은 결론이다. 그는 이를 위해 나보코프의 텍스트를 면밀히 읽고, 지금껏 나온 <롤리타> 표지들에 대해 숙고해보고 그 자신의 해석을 내린 후에 표지를 디자인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책 재킷 디자이너들은 하나의 텍스트를 표현하는 책임을 위임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스스로를 텍스트의 변변찮은 장식가로 보지 않는다면 말이다.”
위의 말처럼 피터 멘델선드에게 책 표지 디자인이란, 그저 책의 내러티브, 줄거리를 좇아 그 내용을 충실히 표현하는 것 이상이어야 한다. 내러티브를 넘어서, 그 내러티브가 가리키고 있는 숨은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 디자이너가 할 일이라는 것이다. 거창하지만, 그의 표지 디자인은 그런 목표를 달성해낸다. 바로 ‘본질적인 것을 시각적으로 번역하는 것.’
#그의 북디자인에 작가들이 찬사를 보내는 이유
디자이너에게 가장 훌륭한 저자는 이미 이 세상에 없어 디자인에 간섭할 수 없는 저자라지만, 이 책에는 멘델선드의 표지 디자인으로 책을 낸 여러 저자들의 글도 실려 있다. 대표적으로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북구의 스릴러 작가 요 네스뵈가 있다. 자국에서 책을 낼 때 디자이너와 긴밀히 협의하는 그이지만 외국에서 번역본이 출간될 때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각 나라에 맞는 ‘로컬라이제이션’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번역본의 표지들이 (당연하게도) 모두 다 그의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런 그가 피터 멘델선드의 표지 디자인에 대해서는 “문화적 레퍼런스와 시각적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는, 보편적으로 느껴지고 이야기에 대한 보편적 출발처럼 느껴지는 디자인”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독자들이 “책을 읽는 내내 기억하고 있어주길 바라는 그런 재킷”이라고 상찬을 늘어놓는다. 어떤 저자는 자신의 책이 멘델선드가 디자인한 훌륭한 표지에 어울리는 내용이길 바란다는 극찬을 늘어놓고, 또 다른 저자는 이런 디자인이 바로 ‘예술 작품’이라고 단언한다. 또 어떤 이는 모든 작가가 자신처럼 피터 멘델선드의 디자인으로 책을 출간하는 행운을 누려야 한다고까지 말하기도 한다.
이처럼 작가들이 피터 멘델선드의 디자인에 찬사를 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그가 책의 핵심을 파악하고 디자인하기 때문이다. 그가 디자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보다 ‘읽기’, 즉 독서다. 예를 들어 제임스 조이스의 전집 표지를 다시 디자인하기 위해 그는 해당 도서를 다시 읽은 것은 물론이고 조이스에 관한 책들, 전기를 읽고 초판과 그 이후 나온 판본들을 보기 위해 희귀본 컬렉션과 도서관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가 독자로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훌리오 코르타사르의 <사방치기놀이(Hopscotch)> 표지를 디자인한 과정을 보여주는 부분은 특히 놀랍고도 감동적이다. 책에 실린 표지 ‘시안’만 25종에 달하며, 책에 실리지 않은 시안이 수십 종이 넘는다 하니 말이다. 그는 이처럼 ‘바로 그 표지여야만 하는’ 단 하나의 표지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책 표지 디자인에 대한 생각, 디자인하는 과정, 성공적인 결과물과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표지들, 편집자 혹은 마케터와 커뮤니케이션 하는 방법 등, 이 책은 북디자이너를 위한 주옥같은 충고와 자료 들로 가득 차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이 북디자인이라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만 유용한 것도 아니다. 물질로서든 정신적인 것으로서든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권의 책 속에 수많은 책의 세계가 펼쳐지는 이 책을 좋아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