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이 책을 거꾸로 꽂지 마시오
절대 이 책릉 거꾸로 꽂지 마시오
문이 곰릉 열고 탈출할 수도 있믕
_ 「른자동롬원」
이 시의 마지막 행을 읽고 곰이 문을 열어야지 문이 곰을 열다니, 이거 인쇄가 잘못된 거 아냐? 하고 생각한 당신은 멀쩡한 어른이다. 이성과 교양과 합리적인 판단력을 갖춘 훌륭한 사회 구성원 중의 하나일 것이다. 반면 잠시 고개를 갸우뚱한 후에 책이나 고개를 요리조리 돌려 보고 아하, 하고 웃은 당신은 조금 이상한 어른이다. 아니면 어린이다.
‘문’이나 ‘곰’ 같은 명사보다는 ‘릉’이나 ‘믕’처럼 중요하지 않은 글자를 먼저 읽는 당신에게 세상은 다소 냉담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삶을 풍요롭고 살 만하게 하는 것은 그 모든 작고 사소하고 이상하고 엉뚱한 일들이며, 그것들은 멀쩡한 글자를 ‘괜히’ 뒤집어 보는, ‘시인’의 눈에 의해서만 발견된다는 것을.
동시를 먹고, 동시를 걷고, 동시로 사는 ‘이안’의 새 책, 『글자동물원』
봄에 아주까리를 문 앞에 심은 것은 정말 잘한 일이야. 내 키보다 더 큰 키에 내 두 손을 합친 것보다 더 큰 잎을 내두르며 모르는 사람을 성큼 막아서더라니깐! 힘이 좀 부친다 싶으면 나비 동생, 벌 언니, 사마귀 대장까지 불러서. 어떤 날은 맘씨 좋은 청개구리 동무가 찾아와 뿌룩뿌룩 불침번을 서 주고 가기도 하고.
옆집에서 묶어 기르는 진돗개보다 믿음직스러워 나는 외출할 때마다 이렇게 말하지.
아주까리 형님,
저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_ 「아주까리」
시인 이안의 일상은 동시 그 자체이다. 격월간 동시 전문지 『동시마중』을 꾸려 두 달에 한 번씩 동무들과 발송하고, 국내 최초 동시 전문 팟캐스트 <다 같이 돌자 동시 한 바퀴>도 진행한다. ‘권태응어린이시인학교’의 교장으로 해마다 시를 닮은 아이들을 만나고, 평론을 쓰고, 전국의 학교나 창작교실 등에서 동시를 가르치기도 한다. 그러느라 봄에 문 앞에 심은 믿음직스러운 아주까리 형님에게 날마다 인사한다. “저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글자동물원』에는 그렇게 부지런히 동시를 살아 낸 시인의 시간들이 고스란히 담겼다. 차곡차곡 쌓여 딱 알맞게 발효한 동시들은 감동적인 풍미를 선사한다. 화가 최미란의 그림은 시인의 표현대로 “시에 까륵까륵 사랑스런 간지럼을” 태우는 듯 조잘조잘 즐겁다.
슬픔 한 알에 웃음 한 알
웃는다
돌사자가 웃는다
콧등에 떨어진 빗방울이 윗니에 걸렸다가
톡!
입 속으로 떨어질 때,
웃는다
돌사자가 웃는다
이제 9천6백7십9만 8천9백5십9번만 더
빗방울을 받으면
진짜 사자가 된다고
엉덩이에
1억 번 번개 주사를 맞은 다음
바위에서 풀려난
돌사자가 웃는다
_ 「돌사자상에 비가 오면」
2008년 『고양이와 통한 날』, 2012년 『고양이의 탄생』두 권의 동시집에서 감각적인 탐구와 형식적 실험을 통해 존재의 원형을 추적하는 작업에 몰두해 온 이안의 시 세계는 세 번째 동시집에 이르러 의미 있는 변화를 맞이한다.
두어 해 전 내게 힘든 시간이 찾아왔다. 검고 무거운 천막이 나를 덮쳤다. 검은 천막은 힘이 셌다. 숨 을 내쉬기도 어려웠다. 가만히 있다가는 죽을 것만 같았다. 검은 천막을 어떻게든 슈퍼맨의 망토로 바 꿔 내야 했다. (…) 한 알 두 알 동시를 지어 먹으며 나는 조금씩 빛으로 나올 수 있었다. (‘책머리에’ 중에서)
“여덟 살 하진이”의 웃음 구멍이 “오른쪽으로 두 칸 이사”하는 시간(「하진이1」「하진이2」), 자루에 넣어 둔 “개 짖는 소리”가 옆집 개 두 마리보다 더 크게 자랄 시간(「자루」), “채송화 앞에 쪼그리고 앉아/ 발바닥에 오르는/ 전기를” 기다리는 시간(「채송화」), 돌사자가 “9천6백7십9만 8천9백5십9번”의 빗방울을 기다리는 시간을 헤아리며 시인은 깨달았다.
어느 날 나는 알았다. “너는 자다가도 웃으니 좋구나!”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해 주시는 것으로 거 의 날마다 한 알씩 내 안에 웃음을 저금해 주신 어머니의 뜻을. 슬픔이 찾아올 때마다 한 알씩 꺼내 먹으라는 거였구나. (‘책머리에’ 중에서)
슬픔 한 알에 웃음 한 알, 그 공정하고도 깨끗한 대응이 우리를 어둠으로부터 건져 내는 힘이었던 것이다. 빛에는 그림자가 따르고 눈물 속에는 웃음이 산다. 마찬가지로 그림자 저편에는 빛이 있고 웃음 속에는 눈물이 산다. 그리하여 『글자동물원』의 종이 울타리 안에 깃들어 사는 것은 눈물이 웃음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으로부터 잉태한 다양한 결의 소리다. “마당에 돋은 방귀/ 아니 빵 한 덩이”가 내지른 “뿌욱!” 소리(「버섯 방귀」), “바로 따서 맛보아도 좋지만/ 얇게 썰어 볕에 널어 말렸다가/ 겨우내 두고 먹어도” 좋은 “사과나무 웃음소리”(「사과나무 웃음소리」), “꿔궈궈궈궈궈꿔거겅 꿩 꿩” 기다란 활주로를 땀나게 내달리는 소리(「꿩」), “너무나 커/ 들을 수 없는 소리”(「구름 붕붕」).
땡그랑, 저금통에 바닥에 웃음 떨어지는 소리
세상에는 드러나지 않은 슬픔이 아직 많고 나에게는 어머니가 저금해 주신 웃음이 여전히 많다. 이번 동시집은 내가 세상에 갚아 주는 어머니의 웃음이다. 어머니가 나에게 그러신 것처럼, 나는 어린이들 마음속에 한 알 두 알 내가 빚은 웃음을 저금해 주고 싶다.(‘책머리에’ 중에서)
짧은 방학마저 바쁘게 의무에 시달렸을 아이들에게 웃음을 빚어 저금해 주고 싶다는 시인이 있어서 다행이다. 그래서 우리는 짜고 슬픈 울음차 대신 으름덩굴에 으름으름 핀 으름꽃 우린 으름차를 마실 수 있다. “울음덩굴 아니고/ 으름덩굴이어서/ 정말 다행”(「으름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