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감히 따를 수 없을 만큼 혼자 앞서간 사람, 류선열 시인이 존재했다는 것은 문학사적 사건이다. _이안(시인)
류선열, 그이는 눈빛이 서늘했을 것 같습니다. 그의 시가 눈부시다가 서늘한 그늘이었다가 마침내 아릿해지는 걸 보면 압니다. 그는 오래전 살았으되, 시는 오늘을 가는 중입니다. _이상교(시인, 동화작가)
● 타계 26주년, 오늘의 문학사적 사건으로 떠오른 시인 류선열
시인 류선열은 1984년 동시 「샛강 아이」로 아동문예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그는 1989년, 갑작스러운 병환으로 37년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만다. 5년의 작가 생활 동안, 자기만의 개성적인 어법으로 새로운 작품 세계를 구축해 나가던 시인은 특히 1980년대 동시로서는 찾아보기 드문 산문시에 뚜렷한 성취를 남겼다.
비록 생전에 많은 작품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그가 쓴 1편의 장편 동화 『솔밭골 별신제』는 1988년 계몽사 어린이문학상을 받으며 그의 동화작가로서의 역량을 보여 주었고, 그가 남긴 70편의 동시 작품은 오늘날까지 문단의 꾸준한 관심과 재조명을 받아 왔다. 아동문학평론가 김제곤은 동시로 당대의 시대정신을 구현한 시인으로 임길택, 가네코 미스즈와 함께 류선열을 꼽았으며(『창비어린이』 2015년 여름호) 아동문학평론가 김이구는 류선열의 시 「국수꼬리」를 인용하며 이제 막 시를 시작하는 시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일침을 놓기도 했다. “이런 시를 읽고 가슴이 두근두근, 나도 이를 능가할, 이에 필적할 작품을 쓰자, 이런 결기가 부글부글 끓지 않는다면 시를 놓을지어다. 시인의 내면에서는 그런 신열이 일어야 한다.”(『어린이와 문학』 2015년 1월호) 동화작가이자 동시인인 이창숙은 “어쩐 일인지 나는 권정생 선생님이나 임길택 선생님의 시보다 류선열 선생님의 시를 읽으며 더 가슴에 금이 많이 갔다”(『어린이와 문학』 2014년 12월호)고 언급하기도 했다. 시인 이안은 오늘날 류선열이 “권정생, 임길택, 가네코 미스즈와 나란히 놓일 만큼 큰 이름이 되었”으며, “시간의 풍화를 견뎌 내고 마침내 현재로 넘어오는 데 성공한 시인은 우리 문학사 전체를 통틀어 살펴도 매우 희귀한 사례”라 짚었다.
● 현재로 꾸준히 소환되는 시인 류선열,
‘마음을 앓고, 동심을 일으켜, 온몸으로’ 써 내려간 그의 동시들
시인의 첫 동시집은 사후 13년 만인 2002년에 출간된 『샛강 아이』(푸른책들)다. 류선열 시인이 전병호 시인에게 해설을 부탁하며 직접 건넨 원고 묶음을 토대로 유고 동시집이 출간된 것이다. 그 후 류선열이라는 이름은 현재로 꾸준히 호출되며 그의 문학 세계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켜 왔다. 그의 이름은 시인 이상교가 류선열의 시 「호랑이 사냥」을 2008년 『창비어린이』 여름호에 소개한 것을 계기로 좀 더 너른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2014년에는 그의 산문시 정신을 계승한 시인 송진권의 첫 동시집 『새 그리는 방법』(문학동네)이 동시 문단의 주목을 받으며 류선열 문학이 우리 아동문학사의 흐름에 끼친 영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2015년인 현재, 김이구, 김제곤을 비롯한 아동문학평론가 들이 시정신과 시대정신을 강조하기 위해 소환하는 대표적인 시인이 되었다.
산골에서 나고 자랐으며 초등학교 교사였던 류선열은 물질문명에 따른 공동체의 파괴에 마음을 앓고, 시적 실험을 통해 스러져 가는 전통문화와 동심을 회복하려 한 시인이었다. 유년기의 산골 마을 풍경, 자연과 하나되어 노니는 아이들의 생활을 주로 다룬 그의 작품들은 산문시와 자유시, 그 둘의 혼용, 아이들의 놀이에 전래 동요를 삽입한 작품 등 다양한 창작 시도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는 현실로 되살아난다. 독자들은 그의 동시를 통해 다양한 동시를 맛보는 즐거움과 더불어 자연과 함께 어우러지는 아이들의 환호성과 맥박의 두근거림, 그 동심의 원형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느낄 수 있다.
● 류선열 동시의 원형을 되살린 동시집 『잠자리 시집보내기』
2015년 2월, 숨겨진 가제본 하나가 기다렸다는 듯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유족이 보관 중이던 가제본은 시인이 숨을 거두기 1년 전인 1988년, 손수 시 한 편 한 편을 인쇄해 오려 붙이고 각 부와 표지를 꾸며 만든 것이다. 전병호 시인이 보관 중이던 원고 묶음과 수록된 시는 같지만 이 가제본에는 ‘잠자리 시집보내기’라는 제목이 달려 있고, 시인의 육성이 담긴 서문과 각 부의 머리말, 그리고 각 부 제목, 목차, 김옥배 시인의 그림이 함께 실려 있다. 또한, 시인의 육필로 퇴고의 흔적이 남아 있어 작품의 원형은 물론 시인의 편집의도까지 헤아릴 수 있는 더없이 귀한 자료로 여겨진다.
▲ 가제본 『잠자리 시집보내기』
2015년 가을 출간된 동시집 『잠자리 시집보내기』는 가제본에 담긴 시 60편과 그 외 시인이 문예지에 발표했던 시 10편 가운데 시인의 작품 세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 44편을 엄선해 묶은 것이다. 시인의 본래 의도를 살리기 위해 가제본에 남은 퇴고의 흔적을 반영하고 서문과 각 부의 머리말을 발췌해 함께 실었다.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방언의 경우 각주를 달고 오늘날의 맞춤법에 따라 시어를 매만져 아이들의 이해를 돕고자 했다. 이 동시집의 출간은 “초롱초롱한 눈망울들에게 이슬이 뚝뚝 떨어지는 아름다운 시를 주고 싶다”는 시인의 못다 이룬 바람을 현재의 아이들에게 생생히 전하는 일이 될 것이다.
● 시와 한몸되어 산마을 아이들의 삶을 감각한 화가 김효은의 그림
화가 김효은은 류선열의 시가 감각하는 소리와 맛, 촉감과 냄새 들을 판화 기법을 사용하여 한 장 한 장 사진을 찍듯 담아냈다. 그가 재현한 풍경들은 한순간에 우리를 “부신 햇살 먹고 사는” 아이들이 있는 산마을로, “파리 동동 잠자리 동동” 노랫소리 들려오는 개울가와 골목길로 데리고 간다. “골바람을 맨살로 맞고” 오는 산마을 아이들을 배냇이불처럼 포근히 품어 주는 그의 그림은 독자의 가슴에 오래도록 기억되는 감동과 여운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