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강희 시인이 새 동시집 『뒤로 가는 개미』를 펴냈다. 『오리발에 불났다』(문학동네, 2010), 『지렁이 일기예보』(비룡소, 2013)에 이어 세 번째 동시집을 내놓게 된 유강희 시인은 “이번 동시집은 유독 설레고 떨리네요.” 하고 수줍게 소회와 감동을 전했다. 1987년 약관의 나이에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데뷔해 문단의 주목을 받은 그다.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약 30년을 줄곧 시와 동시를 짓고 살아온 그다. “독특한 시선과 문체를 지닌 서정시인”(문학평론가 오형엽)이라는 평을 받기도 한 그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참신한 작품들로 문단 안팎의 인정과 사랑을 받아온 천상 시인이다. 그런 그에게 새삼 ‘설렘’과 ‘떨림’을 안긴 동시집이라니, 과연 『뒤로 가는 개미』는 어떤 동시집일까.
총 50편의 시가 실린 이번 동시집에서 유강희는 세계와 대상을 향한 지극한 애정을 토대로 만물에 자리한 고갱이를 탐구한다. 전작들에서 상투적 인식에서 벗어나 사물과 일상을 새롭게 바라보고 “서로서로 감응하고 동조하는 존재들”(아동문학평론가 김이구)에 집중코자 한 시인의 시선을 캐치한 독자라면, 그의 동시세계가 낯설지 않으리라. 나아가 특유의 재치와 익살스러움을 잃지 않으면서도 작고 하찮은 것일지라도 눈을 떼지 않고 삶의 진리를 포착해내는 데 성공한 이번 시편들은 전작에서보다 더욱 깊어진 유강희 시인의 궁극한 경지를 느끼게 한다. 해설을 맡은 손택수 시인은 ‘동심의 직관’ ‘세미화(細微畵)의 시선’ 그리고 ‘새로운 동일성’을 키워드로 『뒤로 가는 개미』를 읽고 “우리가 잃어버린 어떤 소박하고 근원적인 세계를 향하게” 한다고 평했다.
동심의 직관
― 타성에 젖지 않은 말간 눈, 사물의 핵심을 꿰뚫는 동시
전체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된 『뒤로 가는 개미』는 여는 시 「나팔꽃」부터 마지막 「누군가는 불고 있다」에 이르기까지, 일상의 면면한 다양한 존재들과 눈 맞추고 말을 건다. 손택수의 말을 빌자면 유강희 시인은 그 마주침을 통해 사물의 편에 서서 사물들로 하여금 그동안 참아 왔던 말을 술술 풀어내도록 돕는다. 이에 동참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시인을 따라 두 귀 쫑긋 세우고 누가 불러 주지 않나 기다리는 사물들을 호명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옆을 보라. 화장지는 왜 늘 혀를 내밀고 있는 걸까, 다리를 꼬부리고 있는 안경은 무얼 저리 곰곰이 생각하는 걸까 질문하자. 길가에 핀 꽃과 나무를 보면 누가 길가에 줄줄이 막대 사탕 꽂아 놓았을까 상상하고, 매미가 살다 간 지붕 뚫린 빈집에는 누가 살까 두리번거리자. 장수풍뎅이는 왜 장수풍뎅이일까 부여된 이름조차 의심하자. 이러한 궁금증이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가나 졸졸 따라가본다면, 당신도 어느새 우리 삶에 숨겨진 누군가의 숨은 뜻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어릴 적 내 얼굴을 드디어 찾았다
여치랑 앉아서 내리는 비도 또랑또랑 같이 보자
_「여치 얼굴」 전문
유강희는 타성에 젖지 않은 말간 눈을 지닌 시인이다. 강가를 거닐다 만난 초록 여치에게서 오래 전 잃어버린 얼굴 하나를 떠올린 그는, ‘책머리에’에 동시 쓰는 까닭을 밝혔다. “내가 동시를 쓴다는 건 내 안의 ‘참 아이’를 찾아가는 일일 거예요. 고백건대, 난 그 여름 만났던 초록 여치를 닮은 동시를 쓰고 싶은 거예요.” 그의 말처럼 동심, 즉 타성적 태도를 버리고 세계에 내재한 본질을 탐색하는 아이의 마음은 사물의 핵심을 향해 육박해 들어가는 직관의 힘을 획득하며 가히 동시의 본바탕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수많은 존재들과의 만남은 스침으로 그치지 않고 이번 동시집에서 특별한 인연이 된다.
세미화의 시선
― 대상을 향한 극진한 사랑이 포착한 생동(生動) 하는 세계
유강희의 동시는 대상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골똘한 눈이요, 존재의 속살을 세밀하게 그려내려는 자의 멈추지 않는 몸짓이다. 처마 끝 매달린 빗방울이나 느릿느릿 기어가는 달팽이 두 뿔처럼 작고 하찮은 것들일지라도 시인은 거기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치밀한 관찰과 간절한 기다림 끝에 비로소 얻어지는 그의 동시는 그에 걸맞은 세심하고 감각적인 언어를 입음으로써, 한 편의 시가 어떻게 세상의 경이로운 기미들을 읽어내고 우주적 열림의 순간을 경험하게 하는지 성공적으로 보여준다. 감탄사 하나, 사투리 하나, 반점 하나 허투루 쓰이지 않은 유강희의 동시는 그 밑바탕에 대상을 향한 “다감한 연민이 자리하고 있”(손택수)음을 반증하며, “매사에 극진하기 짝이 없는 사내”(안도현)로 불리는 시인의 성정이 시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금쟁이를 우습게 본 건/ 나의 실수다/ 너무 더워 풀밭에 앉아/ 연못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물 아래서/ 작은 물고기가/ 빠르게 솟구쳤다/ 옆구리가 은빛 칼날처럼 빛났다/ 소금쟁이를 잡아먹기 위해/ 그런 거란 걸 잠시 뒤/ 난 알았다/ 순간, 소금쟁이가/ 점프를 해서/ 건너편 바위 위에/ 사뿐히 앉은 것이다/ 소금쟁이가 그 가는 다리로/ 힘차게 물을 박차고/ 자기 몸 몇십 배나 되는/ 거리를 쉬익 날아서,/ 새보다 더 우아하고/ 멋지게 착지할 줄은/ 정말 몰랐다 _「소금쟁이」 전문
치밀한 관찰과 탐구심, 작은 기미와 현상에서 우주적 진리를 끌어내는 능력은 작은 풀벌레 앞에 무릎 꿇고 눈 맞춤할 줄 아는 동심과 더불어 사십대 중반을 훌쩍 넘긴 시인이 아직도 소년의 얼굴을, 소년의 목소리를 잃지 않게 하는 비결이다. 놀라운 일로 가득 찬 날 많았으면 하고 바라는 그의 꿈은, 이번 동시집에서 삶의 실감으로 출렁이는 세계로 생생히 현현된다.
새로운 동일성을 향하여
― 차이를 차이로 인정하는 자세, 동시의 지표가 되다
유강희는 2014년 8월 부안 지역 문학동인 솔바람소리문학회에서 자신의 시론을 개진하며 “자연과 자연, 자연과 인간, 사물과 사물, 사물과 세계, 큰 우주와 작은 우주의 호응(감응)과 불협에 주목”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의 말에 비추어 이번 동시집을 보면, 시인이 싸우지 않고 서로 정답고 다정한 존재만이 아니라, 길가에 비스듬히 누워 썩는 냄새를 풍기며 죽어 가는 족제비나 추석을 며칠 앞두고 짤린 우체국 직원들 등 화해되지 못한 존재들의 외따로운 모습에도 눈길을 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존재 간의 차이와 균열 역시 있는 그대로 끌어안는 시인의 자세는 상대를 긍정하는 법을, 함께 사는 법을 일깨워준다.
풀이 벌레에게
─내가 널 굶기는 일은 없을 거야
벌레가 풀에게
─죽을 때까지 네 곁에 있어 줄게
_「만일 풀과 벌레가 프러포즈를 한다면」 전문
새 동시집의 출간은 우리 동시의 미래를 더듬을 수 있는 지표가 된다. 사물과 자연, 인간과 우주의 경계를 날렵하게 넘나드는 유강희의 이번 동시집은 단연 중요한 좌표가 될 것이다. 새로운 동일성, 즉 기존의 통념을 빌려 존재들을 함부로 묶거나 합하지 않는 자세, 차이를 차이로 인정하되 인간의 지위를 벗고 다른 존재로 옮아가는 태도는 타자를 향한 감수성을 잃어버린 이 시대에 꼭 필요한 가치이자 앞으로 동시가 나아갈 자리이기 때문이다.
세계와 대상에 깃든 비밀을 끊임없이 파헤치고 관습적인 상상력을 통째로 넘어뜨리는 유강희의 동시세계는 새로운 활력을 갈구하는 우리 동시 문단에 중요한 행보가 아닐 수 없다. 제 몸보다 몇 배나 큰 나방 한 마리를 물고 뒤로 기어가는 개미를 보고 그는 시인으로서의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것은 아닐까. 자리를 바꿔 뒤가 앞이 되게 하자고, 관습과 통념을 전복하며 밀고 앞으로 가자고. 세계는 그로 인해 한층 넓어질 것이다.
활달한 상상력과 과감한 구성으로 그려낸 신명난 순간
그림은 윤예지 화가가 맡았다. 서울과 런던을 오가며 작품활동을 해온 그는 자신의 재주와 기량을 아낌없이 이 책에 담았다. 활달한 상상력과 과감한 화면 구성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사물과 자연, 인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무궁자재한 그림은 활력과 생동감이 넘친다. 시인이 포착한 시적 순간을 마치 함께 보고 듣고 느낀 듯이 윤예지 화가는 유강희의 작품세계를 입체적으로 해석해냈다. 한바탕 신명나게 노는 아이들의 둥글며 환한 마음을 닮은 두 사람, 유강희와 윤예지가 독자들에게 동시 본연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추천사]
유강희 동시의 밑바탕에는 여리고 힘없는 자들을 그냥 스쳐 지나가지 못하는 다감한 연민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연민이 시인으로 하여금 인간의 지위를 벗고 다른 존재로 옮아가게 합니다. 주목할 것은 식물과 동물, 인간의 경계를 날렵하게 뛰어넘는 유강희 시인의 상상력입니다. 차이를 차이로 인정하면서 서로를 향해 다가서는 것이 사랑의 정신역학이라면 새로운 동일성을 가능케 하는 지점이 이번 동시집에 있지 않을까 합니다. 유강희 동시는 남루한 일상 언어에 바탕을 두면서도 우리가 잃어버린 어떤 소박하고 근원적인 세계를 향하게 하면서 그 대립 자체를 무화시킵니다. _손택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