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많이 알고, 아무리 많이 생각하고,
아무리 음모를 꾸미고 공모하고 계획을 세운다 해도
그게 섹스를 능가할 수는 없어.”
시들어가는 육체, 사그라들지 않는 갈망……
시간을 거스르는 욕망에 대한 노교수의 격정적 사유!
‘미국 3부작’이라 불리는 『미국의 목가』(1997)『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1998)『휴먼 스테인』(2000)의 연이은 성공으로 작가적 명성에 중요한 획을 그은 필립 로스는 2001년, 작가 인생 또하나의 문제작인 『죽어가는 짐승』을 발표한다. 『죽어가는 짐승』은 20세기 미국 문학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그의 소설 『포트노이의 불평』(1969)의 계보를 잇는 듯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벤 킹슬리와 페넬로페 크루즈 주연의 영화 <엘레지Elegy>(2008)의 원작으로도 유명하다.
『죽어가는 짐승』의 주인공은 전작 『유방』(1972)과 『욕망의 교수』(1977)의 주인공인 데이비드 케페시다. 앞의 두 작품에서 젊은 교수였던 케페시는, 작가인 필립 로스가 나이든 것과 똑같이 나이들어 이제 70세의 노인이 되었다. 『죽어가는 짐승』은 처음부터 끝까지(마지막에 딱 한 번을 제외하고) 주인공의 대사만으로 이루어진 소설로, 『포트노이의 불평』과 유사한 서술 형식을 취하고 있다. 케페시는 자신의 집 소파에 앉은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고, 이야기는 죽음과 섹스에서부터 1960년대의 성혁명에 이르기까지 물 흐르듯 자유자재로 방향을 틀며 절정을 향해 나아간다.
『죽어가는 짐승』은 늙어간다는 것, 죽는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들끓는 인간의 욕망에 관한 통렬하고 우아한, 그리고 서글픈 성찰이다.
예순둘의 노교수와 스물넷의 제자,
몸의 쾌락으로부터 시작된 멈출 수 없는 욕망의 질주
대학교수이자 TV에도 출연하는 저명한 비평가인 데이비드 케페시. 그는 오랫동안 자신의 수업을 듣는 여학생들과 섹스를 즐겨왔다. 학기가 끝날 때마다 자기 집에서 파티를 열고 끝까지 남는 여자아이들과 잘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말해봐, 섹스보다 큰 힘이 어디 있어?” 하고 말하는 그에게 섹스는 결혼이나 사랑과는 상관없는 욕망의 도구일 뿐이다.
1992년, 케페시가 예순둘이던 그해에도 ‘실제 비평’의 모든 수업이 끝난 뒤 그의 집에서 파티가 열렸다. 이번에는 콘수엘라 카스티요라는 여학생이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킨다. 키가 크고 머리칼이 검디검은 쿠바계 아이. 둥글고 풍만한 완벽한 가슴을 가진 스물네 살의 콘수엘라. 수업중에 보고 첫눈에 자기 여자가 될 것임을 직감했던 학생이다.
콘수엘라는 그동안 케페시가 사귀었던 여학생들과 달랐다. 순진하고 착한 면과 보수적인 가치관, 쿠바인의 방정함이 개입하지 않은 성적 본능 그리고 경이로운 몸의 결합은 그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케페시는 평범하면서도 예측하기 어려운 콘수엘라에게, 그리고 특히 그녀의 가슴에 매혹되고 압도당한다. 그는 콘수엘라를 ‘예술’ 그 자체로 여긴다.
그리고 놀랍게도, 케페시는 콘수엘라에게 굴복한다. 자신감을 잃고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여자를 빼앗길 거라는 두려움에 시달린다. 그는 콘수엘라의 옛 남자친구들 그리고 앞으로 그녀가 만나게 될 남자들에게 무시무시한 질투를 느끼고, 늙은 자신이 잠자리에서 콘수엘라를 만족시키고 있는지 염려한다.
나는 콘수엘라가 장난으로 베토벤을 지휘하는 것을 보고 흥분했지만 내가 음악을 연주하는 걸로 그애가 나에게 그처럼 흥분했다고는 말할 수 없어. 내가 뭘 했든 그것 때문에 콘수엘라가 나에게 성적으로 흥분했다고도 말할 수 없어. 대체로 그 점 때문에 팔 년 전 우리가 처음 함께 잤을 때부터 나는 한순간도 평화를 누려본 적이 없고, 그 아이가 깨달았든 못 깨달았든 그때부터 한없이 약해져 늘 걱정에 사로잡혀 있었고, 또 그 답이 그 아이를 더 보는 것인지 덜 보는 것인지 아예 보지 않는 것인지, 그러니까 그 아이를 포기하는 것인지—예순두 살에 자발적으로 스물네 살짜리 찬란한 여자아이를 단념하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짓을 하는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어. _본문 35∼36쪽
“나는 사람은 사랑을 시작하기 전에 완전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사랑이 사람을 부숴버린다고.”
케페시가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는 지금은 2000년, 케페시가 콘수엘라와 헤어진 지 육 년 반이 지난 시점이다. 그는 작품 속에서 끝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는 그 상대에게 콘수엘라와의 만남과 이별에 대해, 그의 삶에 대해 그리고 얼마 전 콘수엘라에게서 전화가 와 그의 집에서 다시 한번 그녀를 만났던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이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지금의 그를 만든 1960년대로 흐른다. 성혁명과 그 결과로 ‘태어난’ 대담한 여학생들은 케페시의 인생을 뒤바꾸었다. 교육받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이전까지 주로 남성들에게만 허용되었던 성적 자유의 권리가 쟁취되던 시절, 전통적인 관념에 따라 결혼은 했으나 자유를 갈구하던 케페시는 그 ‘해방’의 추구를 열렬히 환영했다. 그리고 아내는 이혼을 요구했다. 그렇게 케페시는 아내와 어린 아들로부터, 결혼으로부터 탈출했다.
내가 자라고 교육받은 궤도 때문에 나는 가정적 소명으로 진입한다는 망상에 빠졌는데, 나는 그 소명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어. 양심적이고, 유부남이고, 자식을 둔 가정적인 남자—그때 혁명이 시작된 거야. 모든 게 폭발해버리고 내 주위에는 이 여자애들이 그득한데, 어쩌겠어? 계속 결혼한 채로 간통을 하면서, 이거다, 이게 네가 살아갈 어쩔 수 없는 길이다, 하고 생각하란 건가? _본문 84쪽
자유를 얻은 케페시는 쾌락으로서의 섹스, 쾌락을 위한 관계를 추구했다. 모든 애착과 질투가 철저히 배제된 관계을 원했다.
오직 섹스를 할 때만 인생에서 싫어하는 모든 것과 인생에서 패배했던 모든 것에 순간적으로나마 순수하게 복수할 수 있기 때문이야. 오직 그때에만 가장 깨끗하게 살아 있고 가장 깨끗하게 자기 자신일 수 있기 때문이야. 부패한 건 섹스가 아니야—섹스 아닌 나머지가 부패한 거야. 섹스는 단순히 마찰과 얕은 재미가 아니야. 섹스는 죽음에 대한 복수이기도 해. _본문 88쪽
하지만 그런 그가 콘수엘라를 만나면서 변한다. ‘사랑’이 그의 현실주의, 실용주의, 냉소주의를 그에게서 모두 벗겨버린 것이다. 사랑이 그를 부수고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 모든 이야기를 하면서도 케페시는 내내 콘수엘라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다. 과연 전화벨이 또 한번 울릴까?
나이든다는 것, 죽는다는 것, 욕망한다는 것
극복할 수 없는 인류 보편의 비극을 향한 냉철한 시선
『죽어가는 짐승』은 『에브리맨』에서처럼 노년의 삶과 죽음을 진지하게 응시하고, 『포트노이의 불평』에서처럼 욕망에 대해 거침없이 말한다. 종종 작품 속 인물에 작가 자신의 삶이 깊이 혼재되어 있다는 ‘오해’를 받으면서도 필립 로스는 끈질기게 자신의 관심 분야로 파고드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데, 『죽어가는 짐승』의 명망 높은 노교수 데이비드 케페시 역시 필립 로스(2001년 작품 발표 당시 68세)의 분신처럼 보이기 십상이다.
그러나 작가의 인생에 대한 휘발성 호기심이 아니더라도 『죽어가는 짐승』은 독자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필립 로스는 이 짧은 소설에서 나이든다는 것(이는 곧 육체가 시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과 죽어간다는 것(나이에 따라 순차적으로 죽는 것과 무작위로 죽는 것 둘 모두를 포함한다),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인류 보편의 비극을 집요하게 조명한다.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음을 알면서도 정말 자신에게 그때가 닥칠 때까지 철저히 외면하게 되는 두 가지가 바로 노년의 삶, 그리고 죽음이다. 우둔한 인간은 눈앞에 닥쳐야 어렴풋이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어쩌면 『죽어가는 짐승』은 어떤 독자들에게는 노년과 죽음에 대한 훌륭한 예습서가 될지도 모르겠다. 또한 이 소설은 “지적인 열기가 가득한 불타는 숯과 같은 작품”이며, 필립 로스답게 대담하고 거리낄 것 없이 써내려간 노년의 성과 욕망에 대한 뜨겁고 찬연한 기록이다.
■ 이 책에 쏟아진 찬사
불온한 걸작. 뉴욕 리뷰 오브 북스
그 누구도 필립 로스의 희극적 천재성과 도덕적 엄숙함의 폭을 따라갈 수 없다. 보스턴 글로브
필립 로스다운 우아함과 냉정함으로 완성된 작품. 선데이 타임스
슬프고 섹시하고 우아하다. 갈수록 놀라워지는 로스의 문학적 성과에 또하나의 빼어난 작품이 더해졌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포트노이의 불평』처럼, 『죽어가는 짐승』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한 사람의 장황한 독백이다. 역사적인 질문들에 의해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며 성적 방종의 테마를 향해 나아간다. 뉴욕 타임스
필립 로스는 살아 있는 유기체의 생명력을 지닌 언어로 최면을 거는 작가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시간의 흐름과 자유의 의미에 대한 맹렬하고 탄탄한, 때때로 짐승 같은 고찰. 데일리 텔레그래프
필립 로스의 모든 작품이 그렇듯 한 문장 한 문장 눈부시다. 분명 사람들의 입에 즐겁게 오르내릴 것이다. 퍼블리셔스 위클리
그의 작품 중 가장 에로틱하고, 정말로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소설. 라이브러리 저널
이 소설은, 필립 로스의 다른 많은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정한 도덕적 기준이 자신이 살고 있는 삶과 충돌할 때 그 기준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예일 리뷰 오브 북스
로스는 최고다. 섹스, 질병, 집착, 죽음, 사랑, 가슴, 쿠바 그리고 나이든다는 것. 이 모든 것이 그의 정교한 문장 안에 어우러져 있다. 인간 조건에 대한 그 명확한 묘사에 움찔하게 될 것이다. 아마존 독자
■ 본문에서
생물학이 사람들에게 저지른 위대한 장난은 다른 사람에 관해 뭔가 알기 전에 친밀해지기부터 한다는 거야. 첫 순간에 모든 걸 이해하는 거지. 처음에는 서로의 거죽에 이끌리지만 동시에 직관적으로 전체를 다 파악해. 서로 끌리는 건 등가일 필요가 없어. 이 아이는 이것에 끌리고 상대는 다른 것에 끌려도 돼. 거죽이고, 호기심이지만, 그러다가, 쾅, 전체가 되는 거야. _본문 27쪽
꼭 필요한 매혹은 섹스뿐이야. 섹스를 제하고도 남자가 여자를 그렇게 매혹적이라고 생각할까? 섹스라는 용건이 없다면 어떤 사람이 어떤 다른 사람을 어떻게 그렇게 매혹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런 용건 없이 누구에게 그렇게 매혹될까? 불가능하지. _본문 28쪽
현혹되어 있을 때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하지 않고 그냥 마음 편히 그 현혹을 즐기는 게 도움이 돼.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즐거움이 없었어. 나는 오로지 생각만 했어—생각하고, 걱정하고, 그래, 괴로워했어. 네 쾌락에 집중해라, 나는 그렇게 자신을 타일렀어. 쾌락이 아니라면 왜 내가 지금처럼 사는 쪽, 나의 독립을 가능한 한 속박하지 않는 쪽을 택하겠어? _본문 36쪽
아무리 많이 알고, 아무리 많이 생각하고, 아무리 음모를 꾸미고 공모하고 계획을 세운다 해도 그게 섹스를 능가할 수는 없어. 섹스는 아주 위험한 게임이야. 씹을 하려고 나대지만 않는다면 남자는 지금 가진 문제의 삼분의 이는 덜어버릴 수 있을 거야. _본문 47쪽
노년이란 걸 이런 식으로 생각해봐. 생명이 위기에 처하는 것이 그냥 일상적인 상황이 되어버리는 거라고 말이야. 곧 마주치게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걸 피할 도리가 없어. 영원히 자신을 둘러싸게 될 정적을. 그것만 빼면 모두 똑같아. 그것만 빼면 살아 있는 한 불멸이야. _본문 51쪽
충족과 소유의 느낌은 어디로 갔을까? 아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가지지 못하는 걸까? 원하는 것을 얻고 있는 순간에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있어. 그 안에는 평화가 없고 있을 수도 없어. 우리 나이와 피할 수 없는 가슴 저미는 느낌 때문에. 우리 나이 때문에, 나는 쾌락을 누리지만 갈망은 결코 사라지지 않아. _본문 54쪽
모든 사람이 원하는 유일한 강박, 그게 ‘사랑’이에요. 사람들은 사랑에 빠지면 완전해진다고 생각하지요? 영혼의 플라톤적 결합? 내 생각은 달라요. 나는 사람은 사랑을 시작하기 전에 완전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사랑이 사람을 부숴버린다고. _본문 123쪽
남자들은 자아도취적이고, 유머가 없고, 제정신이 아니고, 강박적이고, 거만하고, 상스러워. 아니면 멋지게 생기고, 정력적이고, 무자비하게 바람을 피워. 그도 아니면 나약하거나, 아니면 성적으로 허약해. 아니면 그냥 너무 멍청해. _본문 131쪽
짝을 지어 사는 생활과 가족생활은 관련된 모두에게서 모든 유치한 것들을 끄집어내. 왜 그들은 매일 밤 똑같은 침대에서 자야 할까? 왜 하루에 다섯 번씩 서로 전화를 해야 할까? 왜 언제나 둘이 함께 있을까? 강요된 존중은 분명히 유치한 거야. 그건 부자연스러운 존중이야. _본문 134쪽
시간의 흐름. 우리는 헤엄을 치고 있어, 시간 속으로 가라앉고 있어, 그러다 마침내 익사해 사라져. _본문 17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