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의 이유가 갖추갖추 차려진 동그란 밥상, “와서 앉아 봐.”
한석봉 엄마는
어둠 속에서도
떡을 고르게 썰었는데,
우리 엄마는
대낮에도
떡을 삐뚤빼뚤 썬다.
_「공부 못하는 이유」 전문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글자가 적힌 책 앞에 곤란한 표정으로 앉은 아이 화자가 일갈한다. 반격을 당한 엄마로서는 뜨끔하면서도,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을 길이 없다. 환한 대낮에도 떡을 삐뚤빼뚤 써는 엄마의 자식인데 무슨 수로 공부를 잘하겠냐는 아이의 이유는 듣고 나면 참으로 타당하다. 그런데 시간도 없고 여유도 없는 사람들은 누군가의 이유를 잘 들으려 하지 않는다. “해수욕장에서 돌아오는 길/ 길이 꽉 막혀/ 차가 거북이걸음을” 하는데도 기분이 좋은 이유는 무엇인지(「기분이 좋았다」), “학교 울타리까지 몰려와/ 땅을 뒤집고/ 웅덩이까지 파” 놓은 멧돼지가 일주일이 넘도록 울타리를 넘어 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공부하기 싫은 멧돼지」), 할아버지 제삿날 할머니가 “현관문 많이 열고/ 향도 많이” 피우라고 한 이유는 뭔지(「제삿날」), 유리 공장 아저씨가 “시뻘건 유리물이/ 뜨겁고 겁나긴 해도” 이 일을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유리 공장 아저씨」) 말이다. 그래서 시인 이중현은 저마다의 이유를 은행 열매를 줍듯 알뜰히 모아 동시집 한 권을 꾸렸다. 귀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작고 약한 존재들의 사연이 갖추갖추 올라앉은 동그란 밥상이다.
슬픔을 먹고 자라는 존재들을 위해
비닐하우스에서 솔솔 풍기는
닭똥 거름 냄새
사람들은 머리 아프다고
버스 창문 닫지만
난 모른 체한다.
사람들은 코 틀어막고
얼굴 찡그리지만
하루 종일 비닐하우스에서
거름 냄새 맡으며 일하는
아빠 생각하며
난 모른 체한다.
_「비닐하우스」 부분
아이가 닭똥 냄새를 모른 체하는 이유는 하루 종일 비닐하우스에서 일하는 아빠 생각 때문이다. 약자들의 이유에는 종종 슬픔이 서린다. 아동문학평론가 이재복은 이 시집 안에 “슬픔을 먹고 자라는” 많은 생명들이 들어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가슴 있는 존재들은 슬픔을 슬픔으로만 품고 있을 수 없다. 슬픔에 압도되지 않기 위해서는 꼭꼭 씹어 삼켜야만 하는 것이다. 슬픔이 고요한 순간과 섞여 소화되면서 그 온기가 존재의 내면에 치유와 긍정의 에너지를 채운다. 그래서 우리는 더 깊이, 더 예쁘게 웃을 수 있다.
아빠는 거실에 있고 나는 내 방에 있는데
내 마음 몰라주니 수천 리나 되네.
부모님은 장래의 꿈 늘 꾸라고 하지만
달콤한 잠 속에서 먹는 꿈만 꾼다네.
화분의 시든 꽃은 물 주면 살지만
풀 죽은 우리 마음은 뭘 줘야 사나.
구구구 비둘기는 모이를 주면 오지만
신나는 우리들 세상은 뭘 줘야 오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 주게.
_「어린이 아라리」 부분
책가방 메고 어울렁더울렁 학교 가는 아이들이 부르는 한 자락 아라리는, 깊은 공감에 이어 웃음을 불러일으킨다.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삶’은 아이에게든 어른에게든 마찬가지인 듯하다.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 자아내는 웃음은 거꾸로 우리 아이들이 시들고 풀죽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세상을 명징하게 고발한다. 이처럼 어른의 반성을 강하게 촉구하는 이중현의 동시는 읽는 아이들에게 새로운 차원의 해방감을 선사한다.
아이들과 함께 걷는 작가 이중현의 첫 동시집
시인 이중현은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아이들과 가장 친밀한 작가이다. 이중현은 그동안 『나의 비밀 친구』 『삼진 아웃』 『아빠 짝꿍』 등 아이들의 고민과 성장을 그린 동화로, 그리고 『유령에게 말 걸기』 『학교가 달라졌다』 『아무도 꼴찌로 태어나지 않는다』 등 교육 현장에 대한 성찰을 담은 교육서로 독자를 만나 왔다. 초등 교사인 그는 전교조로 해직되어 5년간 학교를 떠났다가 복직했고, 합법화된 전교조의 초대 경기지부장으로, 참여정부 시절 교육혁신위원회 전문위원, 상임위원으로 일하기도 했으며 이제는 40여 년 교직 생활의 마무리를 준비 중이다. 『공부 못하는 이유』는 시인이자 동화 작가, 교사, 교육 정책 전문가 등 다양한 각도에서 아이들의 삶을 살피고 그 곁을 지켜 온 그의 첫 동시집이다.
아침이면 친구들이 학교에 오는 모습을 살펴보지요. 꽃밭에 활짝 핀 꽃들을 보며 어떻게 하는지, 노란 은행잎이 길바닥에 수북하게 쌓인 것을 보고 뭘 하는지 살펴보지요. 어떤 친구는 꽃을 쓰다듬거나 눈을 감고 향기를 맡고요. 노란 은행잎을 한 줌 주워 하늘 높이 던지기도 해요. 하지만 어떤 친구는 놀다 가라고 손짓하는 꽃들에게 눈을 주지 않았지요. 노란 은행잎이 발목을 잡아당겨도 본체만체했고요.(_‘책머리에’ 중에서)
그는 지금 남양주 조안초등학교의 교장으로 있다. 한 학년에 한 반씩, 소담하고 활기찬 이 북한강가 작은 학교의 교장실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다. 날마다 달라지는 아이들의 등굣길과 철마다 변하는 풀꽃, 곤충, 나무들, 햇빛과 공기의 여러 가지 표정이 시인의 눈에 담긴다. 이 동시집은 거기 비친 아이들의 말간 맨얼굴을 향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이다.
느티나무를 닮은 어른들이 전하는 응원, “괜찮아, 힘내!”
걱정이 산더미 같은데 노란 은행잎이 환하게 보일 리가 없겠지요. 몸이나 마음이 아픈데 아무리 예쁜 꽃인들 눈에 들어올 리가 있겠어요? 저마다 품은 속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요. “괜찮아, 힘내!”(_‘책머리에’ 중에서)
『공부 못하는 이유』에 실린 그림은 동화 『아빠 짝꿍』에서도 호흡을 맞춘 바 있는 화가 김용철이 그렸다. 강렬한 색감의 그림들은 아이들 마음속의 차돌처럼 단단한 생명력을 그대로 잡아 옮긴 듯 힘 있다. 섞이되 섞이지 않는 유화 물감의 질감과 오리고 붙이기를 통해 구현한 선명한 형태감이 시원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동화 작가 송언은 ‘읽고 나서’에 이렇게 적었다. “느티나무 같은 어른들이 많은 세상이었으면 좋겠어. 시대의 꽃샘추위를 이겨 내는 건강한 아이들이 많은 세상이었으면 더욱 좋겠구나. 수많은 시인들이 꿈꾸는 세상은 바로 이런 세상이 아닐까 싶어.”
책의 말미에는 아동문학평론가 이재복, 동화작가 장주식, 동시인 김은영, 전 출판사 대표 김윤용 등 그동안의 삶으로 아이들을 지지해 온 ‘진짜 어른’들의 풍성한 응원이 실렸다. “아이들 놀이터 되다가/ 구멍 뚫린 줄기/ 부러진 가지/ 그래도 말없이 참는/ 느티나무”(_「느티나무」) 가지가 힘차게 흔들리는 폼폼처럼 나부낀다. “힘내!”
[추천사]
시인 이중현은 어른의 어수룩한 생각을 훌훌 벗어던지고 현실의 아이들과 곧바로 마주한다. 두 눈 똑바로 뜨고 현실의 아이들과 마주하면서, 자신의 동시를 읽어 줄 또 다른 아이들을 기다린다. _송언(동화작가)
이 시집에는 슬픔의 정서가 은근히 퍼져 있다. 슬픔이 삶의 바닥에만 가라앉아 있지 않고 위로 떠올라 읽는 내내 가슴을 흔든다. 이 시 안에는 많은 생명들이 들어 있다. 이들은 슬픔을 먹고 자라면서도 마음은 따뜻하다. 손잡고 함께 웃고 싶다. _이재복(아동문학평론가)
이중현의 동시를 보며 키득키득 웃다가 때로는 울컥하다가, 다 읽고 나서는 가슴이 따뜻해졌다. 한편, 동시의 언어창고에 똥나무와 각시나방맞이꽃이 새로 들어와 자리를 잡는 모습을 보며 기뻤다. _장주식(동화작가)
이중현 시인의 동시를 읽으면 맨 얼굴의 아이들이 보인다. 현실을 직시하며 부르는 「어린이 아라리」가 체념이 아닌 치유와 긍정으로 승화되어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독자들 마음에 새겨질 ‘바람의 발자국’을 기대한다. _김은영(동시인)
여기, 아이들 삶 속의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 모두를 담고 있는 동시집이 있다. 그래서 정말 좋다. _김윤용(전 ‘우리교육’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