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동해를 누비던 청어 떼도
북해도를 헤엄치던 꽁치 떼도
과메기가 되려면 구룡포에 와야 합니다.
구룡포 투명한 겨울 해풍에
얼었다 녹았다
며칠을 덕장에서 참고 또 참아야 합니다.
바람이 훑고 지나갈 때마다
뚝뚝 기름이 떨어지고
시간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붉은 속살이 꼬들꼬들 여물어 갑니다.
푸른 동해를 누비던 청어 떼도
북해도를 헤엄치던 꽁치 떼도
구룡포에 와서야 비로소 과메기가 됩니다.
「과메기」 전문
싱싱한 파도가 밀려오고 해풍에 여물어가는 과메기가 널린 덕장이 보인다. 푸른 동해와 북해도를 머금은 청어와 꽁치가 구룡포 덕장에서 시간을 보내어 과메기가 되어 가는 과정.
김현욱의 동시가 태어나는 과정 또한 날것이 숙성을 거치며 먼 세상의 일까지 내다볼 수 있게 양분을 갖추는 일이었다.
신춘문예와 각종 문학상 수상작 등 동시 습작 10년을 아우른 첫 동시집
진주신문 가을문예에 시가 당선되고 2013년 시집 『보이저 씨』를 내며 시인으로 먼저 이름을 알린 김현욱. 그의 한쪽 어깨에 시가 있었다면 또 다른 어깨엔 동시가 있었다. 2007년 ‘구룡포 아이들’이라는 동시 연작으로 해양문학상을 받고 이어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동시 당선, 월간 『어린이와 문학』에 동시 추천을 받는 등 탄탄히 동시인으로서 기반을 다져왔다. 그가 동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5년 동안 학교 현장에서 교사로 일하며 만나온 아이들 덕분이다. 교실에서, 바닷가에서, 놀이터에서 아이들은 말로 글로 몸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뿐만 아니라 함께 아침마다 짧은 일기 형식의 ‘글기지개’를 쓰고,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쓰는 살아 있는 시 쓰기를 통해, 다양한 환경에 있는 아이들의 마음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김현욱 시인은 “동시는 아이들과 통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라고 확언한다. 아이들의 삶에 스며들어 동시를 써 온 지 10년. 『지각 중계석』은 그 10년을 아우르는 김현욱의 첫 동시집으로, 시인이 아끼는 시들을 한 편 한 편 가려 모았다. 시인이 만났던 아이들의 삶이 깃든 시들이기 때문이다. 『지각 중계석』은 동시인 김현욱의 첫 기착지이며, 시인이 가고자 하는 최종 목적지이다.
구룡포 아이들아, 고래야, 파도야
카네이션 한 송이
파도에 부칩니다.
아빠, 사랑해요.
바닷속 어딘가
뱃사람들이 모여 산다는 그곳까지
은희의 카네이션을 파도가 안고 갑니다.
「카네이션」 부분
온종일
어시장 좌판에서
생선 장사하시는
울 엄마 향수는 멘소래담입니다.
생선 비린내도
퉁퉁 부어오른 종아리도
멘소래담이면
쏴아아 가라앉습니다.
「엄마의 향수」 부분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어미 고래를 잡아 왔는데
밤새도록 포구에 이상한 소리가 나는기라.
알고 보이 새끼 고래 두 마리가 지 어미 잡혀간 걸 알고
글쎄, 포구까지 와서는 울었던기라.
참말 희한하제?
암만 봐도 사람보다 낫제?
「고래 할아버지」 부분
어부인 아빠를 태풍에 잃은 아이는 어부들이 행복하게 모여 산다는 바닷속 마을로 카네이션을 띄워 보낸다. 어시장 좌판에서 생선 장사로 일하는 엄마를 시원하게 해주는 멘소래담은 그 어떤 향수보다 향기롭고, 어미를 사람들에게 무참히 도륙당하고 포구까지 올라와 우는 새끼 고래의 울음소리는 구슬프다. 이 모두 김현욱 시인이 구룡포초등학교에 근무하면서 쓴 작품들이다. 김현욱은 어시장으로 아이의 부모님을 찾아다니고, 바닷가에서 아이와 함께 카네이션을 띄워 보내고, 또 마을 사람들의 오래된 이야기를 들으면서 진솔한 삶의 고백을 기록했다. 구룡포에서 살아가는 아이들과 뭇 짐승들의 이야기는, 민낯이어서 더 절절하고 따듯하다.
익살과 능청 속에서도 김현욱 시인의 동시가 가볍거나 얕은 재미로 읽히지 않는 것은 시의 씨앗이 구룡포라는 바닷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 김현욱 선생은 이곳에서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아이들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 바다에서 아버지를 잃은 아이의 아버지 노릇도 했을 것이며, 부재중인 가족을 대신해 학교에서 티 나지 않게 아이를 보살펴 주었을 것입니다. (…) 이런 마음들이 모여 구룡포에서만 볼 수 있는 구룡포 과메기처럼 여느 동시집에서는 볼 수 없는 ‘구룡포 아이들’을 낳았습니다._최종득(동시인)
미화된 판타지로 눈속임하지 않는, 시대의 숙제가 투영된 동시들
『지각 중계석』에는 진솔한 삶을 담은 동시와 더불어 시대의 숙제들이 투영된 작품들이 또 한 축을 이룬다. 「고치」에서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쓰라린 과거와 소망을, 「대단한 아줌마」는 기본조차 지켜지지 않는 노동자들의 노동권과 처우 개선을, 「순덕이」는 공장식 축산으로 인한 구제역을 죄 없는 짐승들의 살처분으로 해결하려 하는 인간들의 잔인함을, 「원래」는 무분별한 자연개발과 인간의 이기를, 「1등성」에선 시험제일주의를 짚고 있다. 또 「100원」은 돈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물질만능주의를 꼬집는다. 아이들에게 현실을 미화된 판타지로 눈속임하는 것이 아니라, 어둡고 그늘진 그래서 꼭 풀어야 할 문제들을 직시하게 하고, 지금 살고 있는 현재와 살아갈 미래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것이다.
오늘도
학원 상가 회전문이 빙글빙글 돌아갑니다.
학원 버스에 실려 온 핼쑥한
햄스터
다람쥐
청설모 들이
회전문을 열심히 돌립니다.
(…)
발전기처럼 돌아가는 회전문 덕분에
학원 상가는 언제나 1등성처럼 반짝거립니다.
(…)
「1등성」 부분
하루가 다르게 가족이 해체되고 어른들의 무자비한 선택에 아무 죄 없는 아이들이 피어 보지도 못하고 속절없이 지는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고래 부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식을 위해 끝까지 자기 몫을 해내는데 우리 어른들은 그러지 못합니다. (…) 어디 그뿐입니까? 아무 의미 없는 실험으로 죄 없는 금붕어를 죽게 하고, (…) 말로는 이웃과 정을 나누며 친하게 지내야 한다면서 옆집에 누가 사는지 관심도 없습니다. (…) 이 모든 것들이 참 말 안 듣는 어른들의 이야기입니다._최종득(동시인)
아닌 건 아니다 말하면서, 우리 힘내자! 함께 가자! 말하면서
김현욱 시인의 눈은 일상소재에서 표피 아래의 의미를 드러내 보인다. 독자에게 감응을 주고 변화의 동력을 주고 독자가 그 대상을 새로이 바라보게 되는 하나의 전환축으로서의 의미. 현실감각이 결여되어 있지 않고, 회의에 빠지지 않으며, 모사화에 그치지 않는 동시. 동시집 『지각 중계석』은 “삶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진실과 희망의 동시를 열심히 쓰고 싶다”는 시인의 바람을 상당 부분 이룬 듯하다. 그중 표제시 「지각 중계석」은 이 팍팍한 세상에서 무엇이 생명을 살아가게 하는가에 대한 대답이 될 듯하다. 김현욱의 문우이자 동시인 최종득의 말처럼 공부에 찌들어 있는 현실 속에서도 순간순간 소소한 일상의 웃음을 찾아내는 것.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6학년 2반 지각 중계석, 진행자 김현우, 해설위원 남건욱입니다 방금 8시 40분 등교 시간이 지났는데요 오늘도 김기철 선수는 늦는 모양이지요? (…) 친구들 증언에 의하면 지금쯤 교문을 헐레벌떡 지나고 있을 거 같네요 그런가요? 지각대장 김기철 선수가 오늘은 어떤 벌을 받을까요? 아, 아무래도 가중처벌받지 않을까 싶은데요 3일 연속 지각했으니 반성문 여덟 장 정도 예상됩니다 어이구! 김기철 선수, 오늘 손가락에 쥐나겠는데요? 그러게요 만만치 않을 텐데요 자, 이때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요
선생님 오신다, 선생님!
(목소리를 낮추며) 6학년 2반 지각 중계석을 여기서 마칩니다 진행자 김현우, 해설위원 남건욱이었습니다.
기철이 아직도 안 왔니?
「지각 중계석」 부분
“갈수록 살기 팍팍한 지금, 여기, 우리의 현실을 살아가는 아이들을 보면 가엾고 안쓰럽습니다. 이른 아침이나 밤늦게, 학원 버스에 구겨 넣어진 채 실려 갔다 실려 오는 어린 학생들을 보면 얼마나 애처로운지요. 무엇이 문제일까요? 어디서 잘못되었을까요? 이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다만 저는, 힘들고 어려운 지금, 여기, 우리의 삶에 긍정과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싶습니다. 아닌 건 아니다, 말하면서, 우리 힘내자! 함께 가자! 말하면서 말입니다.”_김현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