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안열 평전
- 저자
- 이성무
- 출판사
- 글항아리
- 발행일
- 2015-11-16
- 사양
- 380쪽 | 225*152 | 양장
- ISBN
- 9788967352639
- 분야
- 역사
- 정가
- 2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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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대은 변안열은 최영.이성계 등과 함께 황산대첩에서 활약하던 고려 말 무인이었다. 그러나 조선 건국에 반대하고 고려를 지키려 했다는 이유로 김저의 난에 휘말려 한양 부윤 김백흥에 의해서 참혹한 죽음을 맞고 만다. 함께 절개를 지키다 살해당했던 정몽주가 충신의 대명사로 추앙받은 것과 달리 변안열은 이후 ´간신열전´에 수록되며, 지금까지도 많은 이에게 조선 건국을 방해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대은 변안열, 그는 정말로 간신이었던 것일까?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것이니, 어쩌면 변안열은 조선을 건국한 세력들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당한 충신이 아니었을까? 이성무는 이 사라진 영웅에게 빛을 비추어 생명을 불어넣는다. 변안열의 생애는 물론, 그의 시조부터 후예까지 세세하게 더듬어가는 작업은 그에게 붙여진 ´간신´이라는 칭호에 대해 강력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 평전은 단지 한 무신의 명예회복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역사라는 거대한 페이지를 쓸 수 있는 펜을 쥔 자는 언제나 권력자뿐이다. 저자는 권력다툼에 밀려 억울하게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 인물들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여말 선초의 역사에서 지워지고 왜곡된 인물이 본격적으로 재평가되어야 함을 우리에게 다시금 일깨워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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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1937년 충북 괴산에서 출생하여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민대와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 대학원 교수로 있으면서 미국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연구교수와 독일 튀빙겐대학 객원교수를 역임했고, 정신문화연구원 부원장, 연세대학교 용재석좌교수를 지냈다. 또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현재 대한민국학술원 부회장과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을 맡고 있다. 1980년 진단학회가 제정한 제1회 두계학술상을 수상했으며, 1999년에는 대한민국학술원에서 주최하는 제44회 대한민국학술원상 인문사회과학분야를 수상했다. 2002년에 문화관광부에서 주최하는 제21회 세종문화상의 학술부문에 입상했다. 2004년 한국언론재단과 장지연 기념사업회가 공동주최하는 제15회 위암 장지연 상에서 한국학부문의 수상자가 되었으며, 2012년에는 실학 및 한국학 분야에 있는 기성 학자의 학술적 업적과 공로를 기리기 위해 제정된 벽사학술상의 두 번째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저서로는 『한국의 과거제도』 『조선초기 양반연구』 『조선의 사회와 사상』 『조선양반사회연구』 『한국역사의 이해』(전10권) 『조선왕조사』 『조선시대 당쟁사』(전2권) 『조선은 어떻게 부정부패를 막았을까』 『조선을 만든 사람들』 『명장열전』 『조선의 옛 사람들에게서 우리를 만나다』 『조선을 이끈 명문가 지도』(공저) 『선비평전』 『대은 변안열의 생애와 사상』(공저) 『방촌황희 평전』 『조선시대 인물사 연구』 『조선왕조실록』(전5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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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제1장 시대 배경
몽골의 1차 침입|강화도 천도와 몽골의 2차 침입|당고의 제3차 침입|왕자의 입조와 4차 침입|에구의 제5차 침입|차라타이의 제6차 침입|최씨 정권의 몰락과 강화|삼별초의 항거|원의 부마국이 된 고려|일본 정벌|원의 쇠퇴와 명의 흥기|공민왕의 친명·반원정책|친원파와 친명파|위화도 회군|사전개혁|신흥 사대부의 성장|신흥 무장 세력의 성장|고려의 멸망
제2장 선계
변품과 변산|변멸성|균여|황주 변씨의 시조 변여|중국의 변씨와의 연계|중국의 변씨|장연 변씨|황주 변씨|변씨의 확대 과정
제3장 변안열의 생애
탄생과 원으로부터의 입국|원주 원씨의 가계|남양 홍씨의 가계|의용우군을 맡다|목호의 토벌|홍건적과 왜구의 토벌|황산대첩|위화도 회군|회군 후의 정국|사전개혁|김저의 난|불굴가|변안열의 죽음|「동국유거음」과 「한양유소음」|대은암
제4장 변안열의 후예들
원주군부인원주변씨묘비문|조선 전기 원주 변씨의 왕실혼
제5장 대은 변안열에 대한 평가
부록 변안열 연보
[부록 1] 장연 변씨의 과거 및 취재 등 합격자 현황
[부록 2] 원주 변씨의 과거 및 취재 등 합격자 현황
[부록 3] 황주 변씨의 과거 및 취재 등 합격자 현황
[부록 4] 원주 변씨와 전주 이씨 간의 통혼표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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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리뷰
태조 이성계와 대척점에 선 고려의 무인 변안열
‘간신’으로 치부된 역사의 기록에 맞서
본격적인 재평가를 시도하다
대은 변안열은 최영·이성계 등과 함께 황산대첩에서 활약하던 고려 말 무인이었다. 그러나 조선 건국에 반대하고 고려를 지키려 했다는 이유로 김저의 난에 휘말려 한양 부윤 김백흥에 의해서 참혹한 죽음을 맞고 만다. 함께 절개를 지키다 살해당했던 정몽주가 충신의 대명사로 추앙받은 것과 달리 변안열은 이후 『고려사』 「간신열전」에 수록되며, 지금까지도 많은 이에게 조선 건국을 방해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대은 변안열, 그는 정말로 간신이었던 것일까?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것이니, 어쩌면 변안열은 조선을 건국한 세력들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당한 충신이 아니었을까? 이성무는 이 사라진 영웅에게 빛을 비추어 생명을 불어넣는다. 변안열의 생애는 물론, 그의 시조부터 후예까지 세세하게 더듬어가는 작업은 그에게 붙여진 ‘간신’이라는 칭호에 대해 강력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 평전은 단지 한 무신의 명예회복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역사라는 거대한 페이지를 쓸 수 있는 펜을 쥔 자는 언제나 권력자뿐이다. 저자는 권력다툼에 밀려 억울하게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 인물들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여말 선초의 역사에서 지워지고 왜곡된 인물이 본격적으로 재평가되어야 함을 우리에게 다시금 일깨워주고 있다.
사라진 영웅을 찾아가는 길
대은 변안열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여말 선초의 여러 영웅, 예를 들면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나 조선의 건국을 반대하다 죽음을 맞은 최영·정몽주 등의 인물들은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널리 회자되고 있다. 그뿐인가. 그들의 활약은 역사 기록을 넘어서서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 등 여러 매체를 통해 새롭게 재해석되어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숨 쉰다.
그러나 이들이 그 시대에 존재했던 인물들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역사는 언제나 승자에 의해서 써진다. 그리하여 그 시대에 크게 활약하여 영향을 끼친 사람 가운데 일부는 필요에 의해 꺼내지고 일부는 사라진다. 대은 변안열은 명백히 후자에 속하는 인물이다. 그는 고려 말 무인으로, 최영·이성계 등과 함께 황산대첩에서 활약하였다. 하지만 변안열의 충심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려던 이성계의 계획에 걸림돌이 되었다. 이성계와 그의 측근들은 김저의 난에 변안열을 연루된 것처럼 일을 꾸몄고, 결국 한양 부윤 김백흥에 손에 참혹한 죽음을 맞게 되었다. 1390년 1월 16일, 조선이 건국되기 2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의 죽음 이후 돌아가는 국면은 어딘지 수상쩍은 부분이 많았다. 함께 고려에 대한 충심을 지키던 정몽주는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이며 훗날 조선의 제3대 왕, 태조가 되는 이방원 일파에 의해서 살해당한다. 이성계는 그를 잠시 동안 역적으로 단죄하나, 이윽고 정도전과 남은 등을 격하시키기 위해 그를 충신의 대명사로 추앙한다. 정몽주와 비슷한 행보를 보였던 변안열과 전혀 반대되는 모습이다. 변안열은 이후 『고려사』 「간신열전」에 수록되며, 지금까지도 여러 매체에서 조선 건국을 방해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여기서 생각을 조금 바꿔볼 필요가 있다. 역사 기록들이 서술하는 것처럼 변안열은 정말로 간신이었을까? 우리는 가끔 역사 기록을 ‘객관적’인 것처럼 받아들인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역사라는 이름의 페이지를 기록할 수 있는 펜은 한 자루뿐이며, 그 펜은 늘 권력자의 손에 쥐어져 있기 마련이다. 변안열은 권력자에게 있어서 제거해야 할 인물이었고, 그래서 그는 현실에서 사라짐과 동시에 기록에서도 철저히 삭제되었다. 말하자면 변안열은 조선 건국 세력들에 의해서 억울하게 희생당한 인물인 것이다.
저자 이성무는 이 사라진 영웅을 찾아내어, 그에게 빛을 비추고 숨을 불어넣는다. 변안열의 생애는 물론이고 그의 시조부터 후예까지 섬세히 더듬어가는 작업이 이 책 한 권에 모두 집약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저자는 한 명의 인물에 관련된 모든 자료를 집약시켜, 역사적 인물 조사라는 분야에 하나의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기까지 하다. 변안열에게 붙여진 ‘간신’이라는 칭호에 대한 문제의식이 이 책을 꿰뚫는 주제이지만, 저자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단 한 장군의 명예회복만을 위한 책이 아닌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을 끊임없이 흐르고, 흘러버린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잠시나마 시간을 붙잡을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기록뿐이다. 그러나 이 기록 역시 완전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작성하는 자가 누구인가에 따라서 기록이 갖는 성격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현시점에서 『변안열 평전』의 저자는 현대인들에게 역사가 지니고 있던 본래 성격을 다시금 일깨워주고 있다.
대은 변안열은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가
변안열은 고려 사람이 아니다. 그는 원나라 사람이었다. 변안열은 원래 황주 변씨다. 황주 변씨의 시조는 송나라 말의 변려邊呂이며, 고려로 들어온 변안열이 현재 원주 변씨의 시조가 되었기에 원주 변씨는 황주 변씨의 분적된 계통인 셈이다.
변안열의 할아버지인 변손은 당시 사신이었던 탈탈을 사사했던 적이 있었고, 그런 인연으로 변안열은 그를 따라서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신화로 고려에 왔다가 정착하게 되었다. 이후 홍건적을 격퇴시키고 개성을 수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일등공신에 추증되었다. 당시 변안열은 우왕 아래에서 다양한 활약을 펼쳤다. 고려의 국군이나 마찬가지였던 의용좌우군 중 의용우군을 담당하게 되어 제주도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목호를 토벌하였고, 나라의 큰 골칫거리였던 왜구를 이성계·최영 등과 함께 패퇴시키는 등 무인으로서 제몫을 해냈다.
하지만 일본을 정벌하는 과정에 있어서 벌어진 위화도 회군을 통해 그와 최영, 그리고 이성계가 서로 갈라서게 되었다. 또한 이성계 일파가 주축이 되어 주도했던 사전개혁은 이성계를 포함하여 떠오르고 있던 신흥 무장 세력의 기반을 다지기 위한 것으로, 고려를 지지하던 구세력인 권문세족들의 경제력을 크게 약화시키려는 의도도 지니고 있었다. 홀로 고려에 정착하게 되어 자신의 빈약했던 위치를 왕실혼으로 메우려고 했던 변안열 역시 이에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변안열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생각이 있었던 듯하다. 흥미롭게도 변안열은 고려 우왕에게도 견제를 받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의 아들 변현의 혼인과도 관련이 있는데, 변현의 정혼자를 우왕이 중간에서 가로채 혼례를 올렸기 때문이었다. 한편 변안열의 커진 세력은 우왕과 이성계 두 인물에게 있어서 주의해야 할 인물인 동시에 탐이 날 수밖에 없는 인물이기도 했다. 1389년 10월 11일. 이성계는 자신의 생일에 변안열과 정몽주를 초대하였다. 둘의 마음을 떠보기 위한 심산이었다.
이성계는 둘 앞에서 자신과 함께하면 어떻겠냐는 의미의 〈하여가〉를 불렀고, 이에 정몽주는 〈단심가〉, 변안열은 〈불굴가〉로 하답했다. 흥미롭게도 이성계와 정몽주의 노래는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으나, 변안열의 〈불굴가〉는 이 노래가 지닌 문학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
변안열은 〈불굴가〉 외에도 「동국유거음」과 「한양유소음」이라는 두 수의 시를 남겼는데, 후손 변희리의 『전가록』에 실려 전해지고 있다.
그가 사라진 뒤 남은 이야기들
그가 죽은 뒤 그의 자손들은 역적의 자손으로 몰렸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등용되는 일이 잦아졌으며 점차 여러 분야에서 활약을 남겼다. 변안열의 둘째 아들이었던 변이는 무신으로서 남원 부사와 원주 목사, 강계 부윤 등을 맡았고 청렴하고도 강직한 성품으로 다스린 고을의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권희달의 죄를 묵인했다는 이유로 좌천되었다가, 좌군총제左軍摠制에 봉해졌다.
변상회는 문신으로 벼슬이 예조참판까지 이르렀으며 문신임에도 불구하고 무술에도 뛰어났던,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만나면서 명리를 구하는 등의 행위를 멀리하여 벼슬길은 그다지 순탄치 못했으나, 이후 호조참판과 이조참판에 제수되는 등 뛰어난 공적을 인정받았다.
변상근은 화약을 다루는 기술자였으며, 그의 화약 기술은 최무선의 아들인 최해산으로부터 직접 전수받은 것이었다. 변상근은 한 번에 화살을 2개·4개 발사하는 화포를 개발한 공으로 세종에게 말 1필씩을 하사받았다. 그는 화포 교습과 훈련을 감독 및 지휘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화기의 제조와 방사술 연습에도 매진하였다. 그러던 중 안타깝게도 화포 기술을 누설했다는 죄목으로 역적으로 몰려 세상을 뜨고 말았다.
변수는 무신으로, 훈련원 정·공조 참의·동부승지·우부승지 등을 거쳐 평안도별선위사·통정대부 호조 참의·경상우도 수군도절도사 등을 지냈다.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를 폐비하는 데에 가담했다 하여 장 70의 형벌에 처해지기도 했으나, 중종반정 이후 정국공신 2등에 녹훈되었다.
변협은 무인이었으며, 그가 해남 현령을 지낼 당시 왜구가 쳐들어왔으나 훌륭하게 격퇴했다. 또한 왜구에게 잡혀 있던 명나라 포로들을 풀어주어 천자에게서 은과 비단을 상으로 받기도 하였다. 이 무공으로 그는 장흥 부사로 승진하였다. 무신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지녔으나 율곡 선생에게 『주역』을 배우는 등 문文적인 면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변협이 있는 동안 왜구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쉽게 침입하려 하지 않았다. 변협은 사망한 뒤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대은 변안열은 최영.이성계 등과 함께 황산대첩에서 활약하던 고려 말 무인이었다. 그러나 조선 건국에 반대하고 고려를 지키려 했다는 이유로 김저의 난에 휘말려 한양 부윤 김백흥에 의해서 참혹한 죽음을 맞고 만다. 함께 절개를 지키다 살해당했던 정몽주가 충신의 대명사로 추앙받은 것과 달리 변안열은 이후 <고려사> ´간신열전´에 수록되며, 지금까지도 많은 이에게 조선 건국을 방해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대은 변안열, 그는 정말로 간신이었던 것일까?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것이니, 어쩌면 변안열은 조선을 건국한 세력들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당한 충신이 아니었을까? 이성무는 이 사라진 영웅에게 빛을 비추어 생명을 불어넣는다. 변안열의 생애는 물론, 그의 시조부터 후예까지 세세하게 더듬어가는 작업은 그에게 붙여진 ´간신´이라는 칭호에 대해 강력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 평전은 단지 한 무신의 명예회복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역사라는 거대한 페이지를 쓸 수 있는 펜을 쥔 자는 언제나 권력자뿐이다. 저자는 권력다툼에 밀려 억울하게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 인물들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여말 선초의 역사에서 지워지고 왜곡된 인물이 본격적으로 재평가되어야 함을 우리에게 다시금 일깨워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