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다는 것에 대한 동양적 성찰 무엇이 아는 것이고, 무엇이 모르는 것인가
- 저자
- 김종석
- 출판사
- 글항아리
- 발행일
- 2015-12-29
- 사양
- 200쪽 | 152*217 | 무선
- ISBN
- 9788967352899
- 분야
- 고전, 철학/심리/종교
- 정가
- 15,000원
-
도서소개
맹자, 순자의 성선·성악설에서 퇴계, 율곡의 격물格物까지
"지智"에 대한 유학적 성찰을 통한 "앎의 인문학" 재탐구
사람은 태어나 세상과 모종의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데, 그 첫 번째에 앎이라는 관문과 만난다. 많이 알면 다양한 관계를 맺게 되고 적게 알면 한정된 관계를 맺게 되며, 올바른 앎을 형성하면 바람직한 관계를 맺고 잘못된 앎을 형성하면 바람직하지 못한 관계를 맺게 된다. 이렇게 보면 앎이 삶의 전부를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바람직한 앎의 가능성을 심성론心性論의 차원에서 규명하고자 한 최초의 사상가는 맹자였다. 그는 사람에게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선천적으로 부여되어 있다고 보았다. 경험적 사실에 비춰볼 때 사람에게는 시비를 판별할 능력이 하나의 본성으로 갖춰져 있다고 했다. 따라서 "지知"라고 하지 않고 지혜의 의미를 담아서 "지智"라고 한 것이다.
"유야! 내가 너에게 안다는 것에 대해 가르쳐주겠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아는 것이다." _ 『논어』 「위정」
우리는 흔히 무언가를 쉽게 안다고 말하고, 또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이 어떤 사실을 안다고 할 때, 그것은 과연 완벽한 앎일까? 한국사회는 유교의 영향으로 지식과 교육을 중시하는 전통이 있지만, 앎의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언급하기를 주저하거나 인색하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말을 경계하는 유교 문화에서 비롯된 듯하다. 유학에서는 말에 대한 경계로 인해 오히려 앎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생긴 것은 아닐까 싶다. 따라서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학문적으로 정리하려는 노력 또한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사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앎"과 관련 있게 살아간다. 전문적인 것이든 일상적인 것이든 우리는 매순간 정보를 받아들이고 판단하는 일을 반복한다. 사소한 판단이 축적되어 한 사람의 삶이 이뤄지고, 개인이 모여 사회와 국가의 모습이 갖춰진다. 세상사에 통달한 도인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각자에게 허락된 생에 과오를 그나마 줄이기 위해서는 올바른 앎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해 동양사상 가운데 유학의 관점에서 앎이 갖는 근본적인 의미를 탐구하고자 한다. 중국의 공자·맹자·순자·주자·양명과 한국의 퇴계·율곡 총 7명 선인의 말을 통해 그들이 생각한 진정한 앎이란 무엇인지, 원문과 해설까지 덧붙여 상세히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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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영남대 대학원 철학과에서 퇴계심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여러 대학과 연구소에서 연구와 강의를 했고,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체취가 생생하게 남아 있는 기록 자료들을 직접 경험하면서 특정 사상가의 학설 그 자체보다는 그들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과 그것이 가지는 현재적 의미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발표한 주요 논문으로는 「금계 황준량의 사상과 퇴계학 계승 양상」 「조선 유학에 있어서 "공公"의 이념과 그 전개」 「도통론에 가려진 조선중기의 유학자, 진일재 류숭조」 「성와 이인재의 유교개혁사상」 「도산 서원 고전적의 형성과 관리」 「한말 영남 유학계의 동향과 지역별 특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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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책머리에
1장 앎에 대한 제유의 입장
1 공자, 안다는 것은 사람을 아는 것이다
2 맹자, 사람은 누구나 옳고 그름을 안다
3 순자, 앎이 사람을 변화시킨다
4 주자, 알아야 행할 수 있다
5 양명,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하나다
6 퇴계, 앎은 끝없는 수양의 과정이다
7 율곡, 앎은 현실 속으로 나아감이다
2장 원전과 해설
01 공자
02 맹자
03 순자
04 주자
05 양명
06 퇴계
07 율곡
3장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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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리뷰
맹자, 순자의 성선·성악설에서 퇴계, 율곡의 격물格物까지
‘지智’에 대한 유학적 성찰을 통한 ‘앎의 인문학’ 재탐구
사람은 태어나 세상과 모종의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데, 그 첫 번째에 앎이라는 관문과 만난다. 많이 알면 다양한 관계를 맺게 되고 적게 알면 한정된 관계를 맺게 되며, 올바른 앎을 형성하면 바람직한 관계를 맺고 잘못된 앎을 형성하면 바람직하지 못한 관계를 맺게 된다. 이렇게 보면 앎이 삶의 전부를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바람직한 앎의 가능성을 심성론心性論의 차원에서 규명하고자 한 최초의 사상가는 맹자였다. 그는 사람에게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선천적으로 부여되어 있다고 보았다. 경험적 사실에 비춰볼 때 사람에게는 시비를 판별할 능력이 하나의 본성으로 갖춰져 있다고 했다. 따라서 ‘지知’라고 하지 않고 지혜의 의미를 담아서 ‘지智’라고 한 것이다.
“유야! 내가 너에게 안다는 것에 대해 가르쳐주겠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아는 것이다.” _ 『논어』 「위정」
[책소개]
우리는 흔히 무언가를 쉽게 안다고 말하고, 또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이 어떤 사실을 안다고 할 때, 그것은 과연 완벽한 앎일까? 한국사회는 유교의 영향으로 지식과 교육을 중시하는 전통이 있지만, 앎의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언급하기를 주저하거나 인색하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말을 경계하는 유교 문화에서 비롯된 듯하다. 유학에서는 말에 대한 경계로 인해 오히려 앎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생긴 것은 아닐까 싶다. 따라서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학문적으로 정리하려는 노력 또한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사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앎’과 관련 있게 살아간다. 전문적인 것이든 일상적인 것이든 우리는 매순간 정보를 받아들이고 판단하는 일을 반복한다. 사소한 판단이 축적되어 한 사람의 삶이 이뤄지고, 개인이 모여 사회와 국가의 모습이 갖춰진다. 세상사에 통달한 도인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각자에게 허락된 생에 과오를 그나마 줄이기 위해서는 올바른 앎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해 동양사상 가운데 유학의 관점에서 앎이 갖는 근본적인 의미를 탐구하고자 한다. 중국의 공자·맹자·순자·주자·양명과 한국의 퇴계·율곡 총 7명 선인의 말을 통해 그들이 생각한 진정한 앎이란 무엇인지, 원문과 해설까지 덧붙여 상세히 살펴볼 것이다.
동양사상에서의 앎이란 무엇인가
예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인들은 사람이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데 갖춰야 할 삼달덕三達德(지智·인仁·용勇), 오덕五德(지智·인仁·용勇·신信·엄嚴), 오상五常(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 등 여러 덕목을 제시했다. 세 덕목에 모두 지智, 즉 ‘앎’에 관한 항목이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안다는 것이 생존과 직결된 문제는 아니지만, 사람다운 삶을 사는 데는 그만큼 아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서양에서는 전통적으로 대상에 대한 정확한 앎, 탐구 대상에 대해 자체의 논리를 정확히 아는 것, 한마디로 인식론이라 할 수 있는 사고가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다. 동양에서도 물론 인식은 중요한 문제였지만 동서양의 인식에 대한 생각에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동양은 인식의 대상을 세상과 분리하여 별개의 단독자로 바라보지 않고, 세상의 일부로서 너와 나의 관계 위에서 접근했다. 인식의 주체와 대상이 모두 우주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전재를 바탕으로,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동양철학의 주된 관심사였다. 이러한 경향은 대표적으로 불교, 노장사상, 유학사상 등 동양사상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앎에 대한 유학적 논쟁, 공자·맹자·순자
공자의 유학 사상이 이토록 오랜 생명력과 영향력을 지니게 된 이유는 바로 앎과 지식을 중시한 데 그 핵심이 있다. 공자는 사람은 더불어 살면서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 불가피하게 등장하는 문제가 앎이라고 보았다. 그에게 앎의 대상은 삶과 유리된 독립적 대상이 아니라 바로 삶의 일부였다. 이런 관점에서 공자에게 앎이란 바로 사람을 아는 것, 즉 지인知人이었다. 그가 말한 지인은 사람의 정치사회적 특성과 사람에게 요구되는 바람직한 행위 양식을 아는 것이다. 『논어』 「학이」 편에 나오는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공자의 유명한 말은 앎에 대한 그의 생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맹자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옳고 그름을 안다고 생각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선천적으로 부여되어 있다고 본 것이다. 맹자는 주장의 근거를 명확히 이론으로 밝히지는 못했지만, 경험적 사실을 통해 이를 설명하고자 했다. 맹자는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상황을 예로 들어, 이 장면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두렵고 측은한 마음에 사로잡힐 거라고 했다. 맹자는 이러한 인간의 공통적인 선한 심리를 선천적으로 부여된 인간 본성으로 규정지었고, 이를 인의 본성이라 보고 인의예지를 주장했다. 한마디로 맹자에게 안다는 것은 시비지심是非之心을 정밀하게 실천하는 일이었고, 지智의 본성을 올바로 실현하는 것이었다. 맹자는 지의 본성만 잘 함양하면 충분하다고 여겼으며, 그럼에도 우리가 공부를 하는 이유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선한 본성을 올바로 발현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즉 잠재되어 있는 양능과 양지를 발현시키는 것이 공부의 목적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반기를 든 사상가는 순자였다. 순자는 사람의 본성이 악하다는 성악설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정통 유학에서 배제되어 잘 다루어지지 않았지만, 후천적·인위적인 노력을 통해 사람을 선한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설득력 있는 것이었다. 그에게 지智는 선천적인 것이 아니었으므로 지知의 일반적 인식 기능을 최대한 연마함으로써 높은 단계에 도달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교육과 지식을 강조했고, 성악설을 주장하긴 했지만 인위적 노력만 있으면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공자의 충실한 후계자라 할 수 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 주자·양명
사물에 대한 객관적 앎을 중요한 주제로 다시 등장시킨 인물은 송대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주희)였다. 주자에게 앎이란 모든 사사물물에 존재하는 원리를 아는 것이었다. 주자는 『예기』에서 『대학』을 따로 독립시키면서 8조목 가운데 특히 격물格物·치지致知(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끝까지 따지고 파고들어 궁극에 도달함)에 주목했다. 그는 구본에는 없던 ‘격물’장을 새로 만들어 넣을 정도로 사물에 대한 객관적 앎을 중시했다. 하지만 주자가 순자와 달랐던 점은 본성으로서의 지智 역시 중요하게 계승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사물에 대해 알고자 하면 반드시 사물에 다가가서 그 리를 탐구해야 하고, 점점 그 앎의 범위를 넓혀 많은 사물에 대한 격물을 거듭하다보면 언젠가는 활연관통豁然貫通에 이르는데, 이것이 치지(앎의 완성된 형태)이며 이 과정에서 지의 본성이 시비지심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한편 왕양명(왕수인)은 외부 사물에 대한 객관적 앎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사람의 선천적 본성 함양을 통해서만 올바른 앎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철저히 맹자를 계승한 사람으로, 마음속의 본성을 잘 함양함으로써 사람 중심의 도덕적 세계를 이뤄내야 한다고 믿었다. 맹자의 계승자답게 양지·양능은 그의 철학에 출발점이었다. 양지·양능은 사람에게 본래 갖춰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격물이란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양지의 내용, 즉 인의예지의 실천이고 그 자체는 행行이다. 양명은 사사물물에 양지를 실현하는 것을 일러 치양지, 즉 양지를 다한다고 했다. 치양지는 그 자체로 지知이면서 행行이고, 양명은 이를 일러 지행합일, 즉 앎과 행함은 하나라고 한마디로 자신의 주장을 정리했다.
한국의 유학자들, 퇴계·율곡
퇴계는 주자학자로서 기본적으로 격물을 통해 올바른 앎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물격物格의 해석을 둘러싼 논란 끝에 그는 자신의 입장을 수정했다. 그는 리理가 격물의 주체인 사람의 마음을 구성하고 있다고 보고, 리가 스스로 발하여 기氣를 주도하며, 이를 통해 지智의 본성이 구체적인 시비지심으로 발현하여 격물이 이뤄진다고 했다. 이러한 주장에는 리가 스스로 운동성을 갖는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율곡은 올바른 앎이란 오로지 사물에 대한 격물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보았다. 바로 이 점에서 율곡은 주자를 가장 가까이 계승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리의 운동성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고 마음을 ‘기’로 보았기에 지각 작용을 마음의 중요한 기능으로 여겼다. 우주만물이 각기 기에 국한된 차별적인 리를 갖고 있다고 본 그의 주장은 올바른 앎을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격물이 누적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분명히 했으며 리는 추상적 사물이 아닌 구체적 실물을 대상으로 할 때 비로소 달성될 수 있음을 확인했다. 앎의 노력이 구체적인 현실로 다가가야 한다는 율곡의 입장은 나아가 경세론 방면에서 그의 철학이 남다른 성과를 낳을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유학에서의 앎은 크게 본성으로서의 지智를 강조하는 입장에서 사물에 대한 대상적 지知의 영역으로 확대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문물제도가 발전하고 삶이 복잡해지면서 대상적 앎이 부각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주자·퇴계·율곡에게서 찾아볼 수 있듯이 지智의 영역은 여전히 유학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지켰다.
맹자, 순자의 성선·성악설에서 퇴계, 율곡의 격물格物까지
"지智"에 대한 유학적 성찰을 통한 "앎의 인문학" 재탐구
사람은 태어나 세상과 모종의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데, 그 첫 번째에 앎이라는 관문과 만난다. 많이 알면 다양한 관계를 맺게 되고 적게 알면 한정된 관계를 맺게 되며, 올바른 앎을 형성하면 바람직한 관계를 맺고 잘못된 앎을 형성하면 바람직하지 못한 관계를 맺게 된다. 이렇게 보면 앎이 삶의 전부를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바람직한 앎의 가능성을 심성론心性論의 차원에서 규명하고자 한 최초의 사상가는 맹자였다. 그는 사람에게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선천적으로 부여되어 있다고 보았다. 경험적 사실에 비춰볼 때 사람에게는 시비를 판별할 능력이 하나의 본성으로 갖춰져 있다고 했다. 따라서 "지知"라고 하지 않고 지혜의 의미를 담아서 "지智"라고 한 것이다.
"유야! 내가 너에게 안다는 것에 대해 가르쳐주겠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아는 것이다." _ 『논어』 「위정」
우리는 흔히 무언가를 쉽게 안다고 말하고, 또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이 어떤 사실을 안다고 할 때, 그것은 과연 완벽한 앎일까? 한국사회는 유교의 영향으로 지식과 교육을 중시하는 전통이 있지만, 앎의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언급하기를 주저하거나 인색하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말을 경계하는 유교 문화에서 비롯된 듯하다. 유학에서는 말에 대한 경계로 인해 오히려 앎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생긴 것은 아닐까 싶다. 따라서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학문적으로 정리하려는 노력 또한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사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앎"과 관련 있게 살아간다. 전문적인 것이든 일상적인 것이든 우리는 매순간 정보를 받아들이고 판단하는 일을 반복한다. 사소한 판단이 축적되어 한 사람의 삶이 이뤄지고, 개인이 모여 사회와 국가의 모습이 갖춰진다. 세상사에 통달한 도인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각자에게 허락된 생에 과오를 그나마 줄이기 위해서는 올바른 앎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해 동양사상 가운데 유학의 관점에서 앎이 갖는 근본적인 의미를 탐구하고자 한다. 중국의 공자·맹자·순자·주자·양명과 한국의 퇴계·율곡 총 7명 선인의 말을 통해 그들이 생각한 진정한 앎이란 무엇인지, 원문과 해설까지 덧붙여 상세히 살펴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