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현실을 읽어야 진정한 동시입니다.”
각박한 환경 속에서 파란 신호등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동시집
아이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시인 김용택이 2012년 『할머니의 힘』 이후 4년 만에 동시집을 선보인다. 오랜 기간 시인의 동시집을 기다려온 이들에게 반가운 소식이다. 짧고 긴 36편의 동시를 담은 『어쩌려고 저러지』는 도시 아이들과 시골 아이들, 세상 이치를 막 발견해 가는 아이와 주름만큼 깊은 삶의 지혜를 손주에게 물려주는 노인 등 서로 다른 장소, 서로 다른 세대의 인물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무엇이 됐든 시인이 가진 나침반은 아이들을 향해 있다. 시인은 늘 아이들의 현실을 읽어야 진정한 동시라고 말해 왔다. 38년간 몸담았던 학교를 오래전 떠나와서 아이들을 직접 만날 기회는 줄어들었지만, 그의 감각은 더 예민해져 아이들의 몸짓과 그 뒤에 숨은 이야기를 좇는다. 건널목 앞에서 어깨가 축 처진 채 대화를 주고받는 남매에게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귀가 쫑긋 서고, 동생만 편애하는 엄마 때문에 서운한 형의 투정에 고개를 주억거려 주기도 한다.
누나 잠 와?
왜?
하마처럼 하품을 하잖아.
응. 어젯밤, 잠을 못 잤어. 너는?
왜?
가방이 그렇게 무겁냐. 어깨가 축 처졌어.
아니.
그럼?
오늘 시험 봐.
너도 잠 못 잔 모양이구나.
응.
“가자, 파란불이다.”
힘내.
누나도.
「파란 신호등」 전문
누나를 잠 못 들게 한 걱정거리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지만 시험 때문에 잠 못 이룬 동생을 누나는 힘내라며 응원한다. 동생 역시 그렇다. 마침 켜진 파란불이 아이들의 걸음을 씩씩하게 인도한다. 이 동시는 등에 멘 가방만큼 걱정거리를 업고 사는 아이들에게 희망에 찬 내일을 축원한다. 더불어 걱정 없이 뛰어놀아야 할 아이들에게까지 무겁고 각박한 굴레를 씌운 어른들을 스스로 되돌아보게 한다. 이 성찰은 바다로 날아가는 나비를 보며 어쩌려고 저러지 어쩌려고 저러는 거지, 걱정하는 시인의 탄식을 통해 더욱 절실해진다.
마당에 나비가
날아왔어요.
나비는 흰나비,
나비가 마당을 지나
돌담을 넘더니
밖으로 날아갑니다.
마늘밭을 지나
시금치밭을 지나
팽나무 곁을 지나
길을 건너
모래밭을 지나
바다로 날아갑니다.
나풀나풀, 나풀나풀
물에 닿을 듯 말 듯
바다 위를 날아갑니다.
어쩌려고 저러지
어쩌려고 저러지
저 나비가
어쩌려고
지금
저러는 거지.
「어쩌려고 저러지」 전문
길을 건너 바다를 향해 날아가는 나비. 파도에 닿을 듯 말 듯 한 나비의 날갯짓을 걱정스레 따라가는 시인의 눈. 이 시는 모두에게 뼈아픈 기억으로 각인된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무너지고 만 이 시대의 양심, 눈먼 어른들의 거짓에 왜, 라는 물음을 던지며 옳은 길에 대해 답을 묻는다. 더 이상 길이 아닌 곳으로 귀한 아이들을 보내지 않기 위해 더 이상 길이 아닌 곳으로는 가지 말자고 공동의 약속을 굳게 벼리는 반성문인 것이다.
“나름대로 나는 나”
나의 가치와 자존감을 일깨우는 동시
시인에게는 모든 것이 귀하다. 땅속의 지렁이도, 두꺼비 뒷다리도, 부서져 사라지는 이슬이며 고추를 익게 도와주는 바람도 귀한 존재들이다. 시인의 작품에는 어른들이 어릴 때 보았던 개구리가 목청 돋워 울고, 아이들이 아침에 본 비행기가 하얀 똥을 싸며 날아다닌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만나는 존재들은 읽는 이의 마음에 물음표로, 느낌표로, 쉼표로, 말줄임표로 들어와 박힌다. 질문과 응답, 경이와 감응, 둘레를 둘러보는 시간과 더불어 나와 네가 함께 호흡하는 일에 대해 생각거리를 던진다.
개구리들이 울어요.
할머니는 큰 숨을 몰아쉬었어요.
두꺼비가 나왔네요.
토란잎 위에 떨어져 구르는 빗방울들,
강물이 불어났어요.
엄마는 감자밭으로 달려갑니다.
「합창」 부분
「합창」은 시인이 비 오는 날 호수를 바라보다가 영감을 얻어 쓴 시이다. 간결한 시어와 문장부호가 일으키는 감동의 파고가 높다. 문태준 시인은 이 시의 감상을 이렇게 적었다. “존재들 각각의 발랄한 반응도 재밌지만 그것보다 이 시를 아주 깊은 사색으로 안내하는 것은 빗방울이 이 모두에게 차별 없이 같은 시간에 떨어진다는 사실의 발견입니다. 배제도 따돌림도 없습니다. 마치 어머니가 모든 자식들을 소중하게 여기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김용택 시인의 동시 속 존재들은 함께 일하고 똑같이 대우받고 공평하게 이익을 나누어 갖는다고 말이다. 이 합창에서 홀로 떨어진 목소리는 없다. 시인은 하나하나가 품고 있는 힘, 그리고 그 힘의 조화를 이야기함으로써 존재 가치를 증명해 내고 자존감과 자긍심을 심어 준다. 모두가 “나름대로 나는 나”(「생강나무는 생강나무」)라고 당당히 선언할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의 일기 같은 시들도 눈에 띈다. 세상을 들었다 놨다 하고 강물을 거꾸로 흐르게 할 수도 있는 전능한 시인은 딸이 오면 텔레비전도 마음대로 볼 수 없는 평범한 아빠가 된다(「딸 바보」). 똥배를 내놓고 방귀를 뀌어 대는 아빠 땜에 살 수가 없다고 딸은 고개를 내젓지만 이내 아빠는 시인이니까 괜찮다고 고백한다(「아빠는 시인」). 단지 시인의 집이 아니라 여느 가족의 단란한 일상을 엿보는 듯하다. 아빠와 딸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말이 들리는 듯하다. 어른 아이 모두 공감할 시이다. 이 외에도 시인의 경험이 녹아들어 간 작품들이 많다. ‘남해’ 연작이 그렇고, 「일기」가 그렇고, 「동시 못 써요」가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의 경험에만 머물지 않는다.
밤하늘의 별도 담장 위 나비도 바라다볼 틈이 없는 아이들에게 건네는 동시집
시인의 관심은 나와 가족에게서 친구, 이웃, 자연으로 나아간다. 밤 10시 학원 마치고 온 아이와 퇴근한 이웃 아저씨가 파김치가 되어 엘리베이터 안에서 동병상련하는 모습을 보면 피식 웃음이 나다가 한구석이 찡해 온다. 여행 가서도 학습지 푸느라 바쁜 아이들에게 시인은 밤하늘의 별을 가리켜 보인다. 별들은 언제나 아이들 머리 위에서 빛난다.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 마음에 시인은 웃음을 보태고, 아궁이불로 데워지는 가마솥 물처럼 오래오래 남는 위로를 전하고 싶었으리라.
할머니, 누구더러 눈 감으라고 했어요?
으응, 땅속의 벌레들에게.
왜요?
으응, 갑자기 뜨거운 물이 들어가면
벌레들 눈이 멀까 봐서.
벌레들이 할머니 말을 알아들어요?
그럼, 알아듣고말고.
마당에 달빛이 가득 찼어요.
「눈 감아라」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