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중심 역사에 대한 반성, 생태사학
역사는 시간이라는 날줄과 공간이라는 씨줄로 이루어진다. 역사는 공간과 시간에 대한 인간의 기록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역사는 대부분 시간에 대한 기록이었다. 나무 인문학자 강판권이 나무를 통해 역사와 문화를 읽는 것은 시간 중심의 역사 이해에 대한 반성이라고 할 수 있다. 절대다수의 생명체는 공간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나무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이런 공간을 중심에 두고 시간의 흐름을 서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강판권은 중국의 고도古都인 뤄양과 시안, 국내의 궁궐, 사원, 전통마을, 공원 등에 사는 회화나무를 답사하고, 나무와 공간에 얽힌 역사를 훑는다. 이러한 역사적 서술을 그는 ‘생태사학’이라 부른다.
“내가 회화나무에 관심을 가진 것은 나보다 먼저 살았던 사람들과 회화나무의 관계만이 아니라 전국 곳곳에 살고 있는 회화나무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 그루의 회화나무를 만날 때마다 당시 사람들을 상상했다. 과연 그 공간의 주인공들은 회화나무를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회화나무를 통해 꿈꿨던 것들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중국과 우리나라 전역의 회화나무를 만나면서 한 그루의 나무가 정말 위대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절감했다. 한 그루의 회화나무가 살아남기까지는 반드시 많은 사람들의 정성이 필요하다. 이 책은 한 그루의 나무를 중심으로 역사와 문화를 이해한 나의 이야기다.” _머리말 중에서
회화나무가 학자수라 불린 까닭
고대 신분사회에서는 신분에 따라 무덤에 심는 나무가 달랐다. 회화나무는 주나라 때 사대부 계층의 무덤에 심은 까닭에 학자수라 불린다. 한편 중국의 과거시험 중 진사시험을 ‘괴추槐秋’라 불렀는데, 시험 시기가 음력 7월 회화나무에 꽃이 피는 시기와 같았기 때문이다. 과거시험에 응시하는 사람들은 합격을 기원하는 뜻으로 회화나무를 심었다. 이런 관행은 송나라까지 이어져, 회화나무는 사대부, 학자, 선비를 상징하는 나무가 됐다.
“송대 사대부는 세 가지 위상을 차지한다. 첫째는 관료, 둘째는 지주, 마지막으로 성리학자라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성리학자로서의 사대부는 회화나무와 아주 중요한 연관이 있다. 사대부를 상징하는 나무가 바로 학자수인 회화나무이기 때문이다. 사대부는 송학宋學(성리학)으로 무장한 사람들이었다. 송학은 일차적으로 불교와의 결별 선언이자 유학의 재생, 즉 르네상스였다. 송학을 르네상스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고전의 재생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_76쪽
관청의 회화나무
창덕궁이나 성균관, 옛 경상감영 터를 답사할 때 건물을 우선적으로 보다보면 풍경을 놓치기 쉽다. 창덕궁은 품격 높은 정원과 다름없다. 돈화문에 들어갈 때 해설사의 설명을 듣는다고 왼쪽 담을 등지면, 가장 중요한 회화나무 천연기념물을 볼 수가 없다.
“조선의 왕들이 거처한 창덕궁에 회화나무가 살고 있는 것은 주나라 때의 관례에 따른 것이다. ‘창덕궁회화나무군’은 2006년 천연기념물 제472호로 지정되었다. 창덕궁의 천연기념물 회화나무는 조선의 지배이념이 성리학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나무의 나이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창덕궁에 소나무를 심었다는 내용은 있지만 회화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은 없다. 창덕궁 회화나무의 나이를 알 수 있는 자료는 〈동궐도〉다. 〈동궐도〉에서는 현재 위치의 회화나무를 볼 수 있다. 이 그림이 1824~1827년에 제작되었음을 감안하면, 창덕궁의 회화나무는 적어도 300~400살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_139~140쪽
창덕궁의 회화나무는 국내 다른 회화나무 천연기념물에 비해 나이가 적다. 그러나 창덕궁의 소나무가 왕을 상징한다면, 회화나무는 선비를 상징했다. 소나무와 회화나무는 조선 왕조의 지배층을 상징하는 나무였다. 궁궐에 두 나무가 어우러진 것을 보며 그 시대를 떠올릴 수 있다.
서원의 회화나무
서원은 선비들의 공간이었다. 서원을 세울 때는 건물뿐만 아니라 서원의 기능과 관련한 상징을 만든다. 조선시대 서원 건립 때 가장 활발히 사용한 상징물이 바로 나무였다. 퇴계 이황을 모셔 유명한 도산서원의 경우, 이황은 서원을 짓고 회화나무를 심었다. 구지폐 1000원권 뒷면에 실려 유명한 도산서원 도안을 보면, 회화나무가 선명히 그려져 있다.
“도산서원의 회화나무는 500살로 추정하고 있지만, 서원의 설립연도를 고려하면 아무리 많아도 440살을 넘지 않는다. 500살은 나이가 많다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상투적인 나이다. 도산서원의 죽은 회화나무는 후손들에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이 회화나무는 이황을 비롯해 이곳을 출입하던 사람들의 선비 정신을 일깨워주었던 역사적인 나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곳의 회화나무는 죽은 지 벌써 6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쓰러지지 않고 서 있다. 도산서원 같은 문화재 공간의 나무는 죽었다 하더라도 가능하면 원형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 그래야만 전통을 계승할 수 있고 그 속에 숨어 있는 정신 또한 우리가 본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_201쪽
나무에게서 삶을 배우다
책에는 나무를 아끼는 저자의 마음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나무의 모양새를 보며 그 나무가 살아온 지긋한 세월을 짐작하는 시선은 따듯하고 인자하다. 사람은 수백 년의 세월을 이고 진 나무를 보며 삶의 자세를 배우게 된다. 누워 자라는 나무에게선 지형의 불리함을 감내하는 인내를, 반으로 쪼개지고도 살아남은 나무에게선 강인한 생명력을 배우는 것이다. 이 책은 나무로부터 삶을 배우고 상생하며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몸소 보여주고 있다.
“성밖숲에서 가장 키가 큰 왕버들은 14미터다. 왕버들 중에는 곧게 선 것도 있지만 비스듬히 누운 듯 선 나무도 있다. 나는 비스듬히 누워서 살아가는 나무에 더욱 눈길이 간다. 서 있는 것보다 반쯤 누워 있는 것이 훨씬 힘들다. 왕버들은 위로 곧장 자라는 나무라서 굳이 옆으로 기울어 살 이유가 없지만, 조건이 맞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옆으로 기운 채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왕버들은 힘든 내색을 하지 않고 그 상태를 유지한 채 몇 백 년을 살아가고 있다. 나는 이러한 나무를 볼 때마다 그간 살면서 힘들다고 불평했던 기억에 얼굴이 붉어진다.” _28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