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작가’로, ‘페라라를 영원의 도시로 만든 작가’로 불리는 20세기 이탈리아 문학의 거장 조르조 바사니(Giorgio Bassani, 1916~2000)의 『성벽 안에서―페라라의 다섯 이야기』가 출간되었다. ????성벽 안에서―페라라의 다섯 이야기????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장편소설 『핀치콘티니가의 정원』, 이탈로 칼비노와 W. G. 제발트를 비롯한 수많은 작가들로부터 ‘가장 아름다운 소설’이라는 극찬을 받은 바 있는 ????금테 안경????과 더불어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조르조 바사니의 초기 대표작 중 하나다. 특히 바사니의 섬세한 문체와 정교한 구성을 맛볼 수 있게 작가의 개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다섯 편의 뛰어난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바사니는 1956년 에이나우디 출판사에서 출간한 이 소설집으로 그해 이탈리아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스트레가 상을 받음으로써 입지를 단단히 다진다.
「리다 만토바니」의 제목은 주인공 여인의 이름을 그대로 빌려온 것이다. 리다 만토바니는 미혼모의 딸로 성장한 가난한 처녀다. 그녀는 부유한 유대인 청년과 사랑에 빠지지만 그와의 사이에서 아기 하나를 낳은 뒤 버림받는다. 미혼모였던 어머니 처지가 고스란히 거울처럼 대물림된다. 그러나 이 사슬을 끊어줄 누군가가 나타난다. 이웃의 제본소 주인 오레스테 베네티가 이 모녀를 돌보기 시작한 것이다.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충실한 베네티는 마침내 결혼에 성공한다. 하지만 결혼의 의미가 각자에게 서로 달랐음이 나중에야 밝혀진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페라라 전통사회에 기층민들이 어떻게 결합하는가를 통해 삶의 의미는 무엇이고 사랑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차분히 되묻는다.
「저녁 먹기 전의 산책」 또한 남녀 간의 결합을 소재로 하고 있으며 유대인 남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첫 소설과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이른바 메잘리앙스(낮은 신분과 높은 신분 간의 결합을 이르는 프랑스어)가 주요 모티프다. 부유한 유대인 의사 엘리아 코르코스와 서민 출신의 간호사 젬마 브론디 부부, 그리고 이 둘 사이에서 사랑을 오랫동안 남몰래 간직했던 아우실리아 브론디의 이야기가 중층적으로 겹쳐진다. 이 작품은 특히 도입부가 인상적이다. 특별할 것 없는 낡은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 과거로, 그 먼 역사 속의 공간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현재로 빠져나온다. 마치 카메라의 움직임을 연상시킨다. 바사니가 시각예술로부터 큰 영감을 받았고 실제 영화에도 지속적으로 관여했음을 확인시켜주는 묘사가 작품 전반에 가득하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인종법 이후 유대인이 겪어야 했던 차별과 소외의 도립상을 과거 페라라의 신분제 사회에서 찾는다. 낮은 신분, 가난한 계층이 겪어야 했던 차별과 소외가 어떤 방식으로 페라라에 겹쳐져 있는지를 말이다.
「마치니 거리의 추모 명판」은 그야말로 역설이 가득한 뛰어난 작품으로 이 소설집의 백미라 할 수 있다. 1938년 이후 독일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던 이탈리아 유대인 백팔십삼 명 중 유일하게 살아돌아온 젊은이 제오 요즈의 이야기다. 이 소설 또한 첫 도입부가 대단히 인상적이다. 페라라 마치니 거리에 있는 시나고그, 즉 유대교 회당에 한 미장이가 명판을 붙이고 있다. 회당 입구 이 미터 높이에 붙게 될 그 명판은 나치 독일 절멸수용소에서 희생된 유대인을 기리는 추모 명판이다. 그런데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한 뚱뚱한 남자 하나가 명판 속에 명단 중 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고, 자신은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 있다면서 그 작업을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렇게 죽음의 수용소에서 페라라로 살아돌아온 제오 요즈는 한동안 시민들로부터 환대를 받는다. 하지만 그 환대는 오래가지 않는다. 재건을 꿈꾸는 페라라 사회에서 유대인은 망각되어야 할 존재였다. 이 소설은 늙은 파시스트 스코카 백작의 뺨을 후려갈긴 요즈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왜 수용소에서 입던 옷을 입고 나타나서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는지, 뚱뚱하던 몸이 갑자기 왜 비쩍 마르게 됐는지, 그리고 마침내 그가 왜 페라라의 시민들 사이에서 다시 사라져야 했는지를 진지하게 되묻는다.
「클렐리아 트로티의 말년」은 유서 깊고 아름다운 체르토사 수도원 옆 페라라 시립 공동묘지에 묻힌 어느 사회주의자 여인의 삶과 투쟁을 되짚어보고 자신을 냉정히 돌아보는 일종의 회고담이다. 클렐리아 트로티와 나이를 뛰어넘는 우정을 맺었던 유대인 젊은이 브루노 라테스가 수년 전의 일들을 가만히 떠올린다. 인종법이 발효된 이후인 1939년 그녀를 찾아간다. 그 과정에서 그녀와 같은 사회주의자였으나 이제는 정치가로 성공을 꿈꾸는 변호사 보테키아리, 파시스트 비밀경찰의 감시로부터 그녀를 보호하는 산타마리아인바도 광장 교회 옆에서 공방을 하는 구두장이 로비가티, 그리고 폰도반케토 거리 36번지 은둔지의 집 주인 코데카 부인과 그 남편 등을 만난다. 이 소설은 20세기 초 일차대전 때부터 이차대전 말기 이탈리아의 사상적 갈등과 변화를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격조 있게 하나하나 짚어나간다. 유복한 유대인 브루노는 사회주의자의 열정과 이상에 공감하지만 삶을 온전히 던지진 못한다. 사회적 약자들, 특히 나이든 퇴락한 여성 혁명가 트로티에게 큰 동감을 느끼면서도 본질적인 자신의 어떤 속성, 돌이킬 수 없는 냉정함, 차별의식을 부정하지 못한다. 비겁한 자신에게 트로티는 거울 같은 존재였지만 결코 가닿을 수 없는 이상과 같은 존재였음을 천천히 깨닫게 된다.
「1943년 어느 날 밤」은 페라라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한 단편소설로,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가 각색하여 반치니 감독에 의해 1960년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다. 소설은 1943년 12월 15일 밤 페라라에서 벌어졌던 끔찍한 학살을 다룬다. 유대인 출신으로 시내에서 가장 유명한 약국을 상속받은 약사이자 누구나 흠모할 만한 미모를 지닌 여성 안나 레페토와 결혼한 피노 바릴라리가 주인공이다. 결혼 후 얼마 안 돼 하반신 마비가 된 피노는 사건이 있기 수년 전인 1939년부터 약국 건물 꼭대기층 창가에서 쌍안경으로 로마 거리를 관찰하는 이상한 행동을 보인다. 1943년경 이탈리아 반도는 연합군 세력에 의해 해방된 남부와 나치 독일의 꼭두각시 정권인 살로공화국이 수립된 북부로 양분되었고, 당연히 북부 페라라는 이른바 형제살해 싸움의 소용돌이, 동족상잔의 비극 한복판에 있게 된다. 1943년 9월 나치와 무솔리니에 맞서서 여러 정당이 연합한 민족해방위원회 같은 거대 레지스탕스 단체가 조직되기도 했다. 그 와중에 볼로냐 지부에서 파시스트당 재건을 위해 페라라 지부로 파견됐던 볼로녜시 대령이 암살된다. 이를 계기로 1943년 12월 15일 밤, 데스테 성 맞은편 델라보르사 카페 길 건너편에서 파시스트 행동대 검은셔츠단이 시민 열한 명에게 무차별 학살을 자행하는 사건이 빚어진다. 남편이 하반신 마비가 된 뒤로 외간남자를 만나곤 했던 안나 레페토는 그날 밤 다른 데서 귀가하다가 우연히 학살을 목격한다. 시체 더미를 본 순간 약국 건물 위를 봤을 때 남편과 눈이 마주친다. 혼돈의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 학살자(그중에서도 특히 사건의 주모자인 시아구라)를 기소해 재판이 진행된다. 피노는 주요 목격자로 법정에 선다. 하지만 그의 증언은 오직 한마디의 말뿐이었다. “자고 있었어요.” 정말일까? 그 순간 사람들은 시아구라가 던진 은밀한 공모의 눈짓이 피노를 향하는 것을 보았다고 느낀다. 초기 파시즘에 많은 유대인이 동조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피노 또한 십대 시절 로마진군에 동참했던 유대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사건 전체를 덮어버린 그 증언에 정당성을 줄 수 있는 걸까? 그는 어째서 그런 증언을 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