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개의 이름 × 23편의 소설
무한 자유 아래 탄생한 다채로운 발상과 예상 밖의 스토리
“나의 헛된 소망은,
친밀함을 갈망한다는 죄로 사람을 밀어내지 않는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
타인보다 못한 가족들, 온갖 가족 군상에게 닥치는 기막힌 반전
_「주디스 캐슬」 「글래디스 파크스슐츠 판사」 「핸웰 시니어」
‘가족’이라는 말은 전형적이고 안정적인 느낌을 풍기지만, 그 이름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많든 적든 가족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 수만큼이나 각양각색이다. 작가들이 현상 이면의 모순을 드러내고 기발한 반전을 펼치는 데 ‘가족’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재였다.
‘데이비드 미첼’이 탄생시킨 인물 ‘주디스 캐슬’은 애인과 결혼해 더 큰 가족의 일원이 되어 친밀하게 정을 주고받는 삶을 꿈꾸는 여인이다. 애인 ‘올리’의 가족들을 처음 만나기로 한 며칠 전, 그가 뺑소니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 것으로 이 여인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예상대로 결혼을 했다면 모든 게 달라졌을 것이다. 모든 것이. 올리와 그의 누이들과 여기 있는 리오, 그리고 그들의 배우자들, 그리고 아기들까지 주말마다 부모의 집에 모일 것이다. 나는 평화 중재자, 비포장 갓길, 막역한 친구, 해결사가 될 것이다. 정말이지, 주디스, 당신이 없었다면 우린 어떻게 살았을까요. (본문 60쪽)
이 와중에 전남편과 딸애는 둘이서 여행을 떠났고, 아버지는 예비 사위가 죽었다는 소식에 눈 하나 꿈쩍 안 하고, 어찌된 일인지 올리의 가족들은 벌써 그의 장례식을 치렀다고 한다. 오직 전 직장동료와 연극 동호회의 앙숙만이 주디스에게 동정을 표한다. 그녀는 ‘서로의 인생에 관여하는’ 가족을 꿈꿨지만 ‘각자의 인생을 서로에게 보고만 하는’ 가족과 살고 있었다.
충격에 빠진 주디스는 죽은 애인의 흔적을 찾으러 그의 가족을 만나기로 한다. 올리의 남동생이 운영하는 사진관을 찾은 그녀는 벽에 걸린 가족사진들을 보며 혹시나 남동생이 자신의 존재를 눈치챘을까 내심 궁금해한다. 그러나 이 여인의 여정은 올리의 남동생에게 걸려온 전화 한 통으로 기막힌 상황을 맞이한다. 가족의 정을 갈구한 여자가 맞을 반전은 대체 무엇일까?
리오는 장난꾸러기처럼 웃으며 특유의 남자다운 방식으로 전화를 받았다. 나는 바닥 계단에 앉아 케겔 운동을 조금 했다. “짐보!” 리오가 이번에는 목소리를 죽이더니 낮게 말하며 몸을 돌렸다. “올리는 여기 없어, 아니……” 아직 그 끔찍한 소식을 듣지 못한 지인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형은 하루이틀 전화를 못 받아.” 리오는 작게 말했지만 내 청력은 완벽했다. (본문 61쪽)
여성의 삶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작가 ‘하이디 줄라비츠’는 인간적 정황에 무정한 판사이자 채식주의자 딸에게 햄 요리를 내놓는 무심한 엄마인 ‘글래디스 파크스슐츠’의 크리스마스 비극을 그린다.
크리스마스 햄 때문에 일어난 말다툼으로 (…) 글래드 파크스슐츠는 이미 익숙한 오그라든 기분, ‘엉망이 된 휴일’의 상태에 빠져버렸다. (…) 막상 이들이(자식들과 그들의 일시적인 연인들) 눈앞에서 사라지자 그녀는 소외감이 들어 그다지 편치가 않다. 중요한 휴일에는 혐오의 대상이 되는 편이 낫다. 미움을 받고 살아 있다고 느끼는 편이 낫다. (본문 214쪽)
혼자 남은 그녀는 생전에 자신의 엄마가 좋아했던 초록색 안락의자에 앉아 어린 자신에게 지나치게 무심했던 엄마를 생각한다. 옆집에서 폭발이 일어나 죽을 뻔했던 자신에게 엄마가 아무렇지 않게 저녁을 먹으라고 했던 그날의 기억은, 외출금지당해 몰래 집을 나갔다가 어두워진 길이 무서워 커다란 돌을 쥐고 귀가한 어느 날 밤으로 뻗어나갔다. 어린 딸이 사라졌는데도 안락의자에 앉아 잠든 엄마의 모습에 그녀의 분노는 더욱 커졌고 돌을 쥔 손에는 힘이 들어갔었다. 글래디스는 어린 날 엄마에 대한 기억을 이리저리 헤집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딸을 생각한다. 아이들이 술이나 약에 취했을 거라고, 살인을 하기에 완벽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하이디 줄라비츠는 이 세 모녀 사이에 존재하는 팽팽한 긴장의 끈을 통해 모녀간의 애틋한 정만큼이나 자명하게 타오르는 비극의 불씨를 보여준다.
난 엄마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엄마를 안 지 이십 년이나 됐는데 말이에요. 난 왜 엄마가 엄마 같은 사람인지 모른다고요. 사람이 자기 자신인 것에 이유가 필요하니? 글래드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말했다. 그래. 이것은 실비아가 그녀를 향해 던지는 모든 사소한 트라우마를 막아내는, 침착하고 법관다운 그녀의 방식이다. 그래. (본문 217쪽)
그리고 여기, 이 책을 엮은 ‘제이디 스미스’가 탄생시킨 아버지 ‘핸웰 시니어’가 있다.
무책임하고 무모한 사람은 잔인한 사람보다 여러 면에서 더 나쁘다. 그런 사람들을 겪어본 이들은 이해할 것이다. 잔인함은 정당하게 대항하여 마침내 퇴치할 수 있지만, 걱정거리에 대한 자유분방한 무심함은 얘기가 전혀 다르다. 그런 아버지를 둔 사람은 분명히 배우게 된다. 슬픈 자립심과 잔혹할 정도로 침묵하는 마음. 살아가는 것 자체에 대한 망설임을. (본문 157쪽)
핸웰 시니어에게 말은 아무것도 보장하지 않았고 어떤 닻으로도 쓸 수 없었으며 세상사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이 같은 경향이 더 어두워지고 심해지면 ‘사이코패스’라고 부른다. (본문 159쪽)
아들 핸웰은 가족을 버리고 평생 방황하며 무책임하게 산 아버지 핸웰 시니어를 ‘사이코패스’라 여기면서도 그가 자기 앞에서 참회하기를 갈망하는, ‘가족의 피’라는 이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이다. 얼핏 보기에 낯설지 않은, 왠지 모르게 익숙한 부자의 모습이다. 이 부자는 12년 만에 상봉해 어떤 말을 주고받을까? 제이디 스미스는 이 핸웰 부자의 이야기를 ‘여자 핸웰’의 입을 빌려 말하며 마치 운명처럼 불변하는 인간의 본성, 그보다 더 지독하게 인간을 옭아매는 혈연이라는 끈을 생각하게 한다.
사람의 자비심은 정확히 제 집 문에서 멀어지는 만큼 커진다는 오래된 격언을 떠올리게 된다. (…) 그들은 열렬하게 고인과 곧 고인이 될 사람의 삶과 생각을 재구성하고 싶어하지만, 자기 어머니에게서 걸려오는 전화는 자주 차단할지 모른다. 나는 그런 세대다. 나는 내 가족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할 것이다. 그들과 만나는 것만 빼고. (본문 163쪽)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마치 단 하나의 잠에서, 평생을 꿔온 꿈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누구나 한번쯤 상상해본 낯선 이와의 로맨스
_「로이 스피비」 「테오」
‘타인’은 별일 없이 반복되는 일상에 호기심과 셀렘을 가져다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16세에 희곡을 써서 데뷔한 이래 소설가, 영화감독, 행위예술가 등으로 활동하는 ‘미란다 줄라이’는 누구나 한번쯤 꿈꿔봤을 낯선 이와의 로맨스에 현실의 삶을 탁월하게 녹여냈다.
가끔 먹거나, 나가거나, 청소를 하거나, 잠을 잘 정도의 의욕도 내지 못해서 몇 시간씩 마냥 거실 한가운데에 서 있곤 하는 ‘나’는 뜻하지 않게 비행기 일등석 좌석을 얻게 된다. 항상 만만한 사람 취급당하며 지루한 일상을 견디고 있는 그녀의 옆자리에는 할리우드 스타 ‘로이 스피비’가 앉아 있다. 이 날아다니는 작은 마을에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두 사람은 비행하는 내내 속삭이듯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비행기가 하강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안전벨트를 매고 테이블을 접어올렸다. 그 순간 로이 스피비가 나를 보며 말했다. “안녕.”
“안녕.” 나도 말했다.
“내가 번호를 하나 적어줄 건데, 평생 비밀로 해주었으면 해요.”
“알았어요.”
“이 전화번호가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가면 나는 사람을 시켜서 번호를 바꿔야 하고, 그건 정말이지 골치 아픈 일이에요.”
“번호가 하나 빠졌어요.”
“알아요. 마지막 번호는 그냥 외워줬으면 해요. 괜찮죠?”
“알았어요.”
“4예요.” (본문 112쪽)
그녀는 평생 이런 번호를 기다려왔다. 미란다 줄라이는 이 사랑 이야기가 마냥 아름다운 소설처럼 흘러가게 놔두지 않는다. 할리우드 스타의 전화번호는 특별한 사건이지만, 또 거실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일상도 계속될 터였다. 언제고 다시 쳇바퀴 안으로 들어오고야 마는 우리들의 일상처럼 말이다. 과연 그녀는 용기를 내 전화번호를 누를 수 있을까?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그와 관계를 하는 동안 나는 “사”라고 속삭이곤 했다.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때 거기에 나를 확장해주는 작은 효력이 있음을 알았다. 아버지가 폐암으로 돌아가셨을 때 나는 “사”라고 속삭였다. 딸이 멕시코시티에서 오직 신만이 알 일을 하다가 문제가 생겼을 때, 전화로 그애에게 내 신용카드 번호를 불러주면서 나는 속으로 ‘사’라고 말했다. 남편은 내 행운의 숫자를 두고 농담을 하지만 나는 한 번도 그에게 로이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본문 117쪽)
『비틀거리는 천재의 가슴 아픈 이야기』의 ‘데이브 에거스’가 그려내는 ‘타인’은 사람이 아닌 산맥이다. 산맥 ‘테오’를 통해 그는 맑고 싱그러운 사랑 이야기를 한 편 탄생시켰다. 오랜 세월 시인들은 마을을 둘러싼 낮은 산들이 마치 자고 있는 남자와 여자를 닮았다고 노래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땅이 흔들리고 동물이 앞다퉈 달아나더니 두 거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 ‘소렌’과 여자 ‘마그델레나’였다. 세번째로 작은 산맥 ‘테오’가 조용히 일어났다.
깨어난 지 아흐레째 되던 날 테오는 소렌과 마그델레나가 그들의 정강이까지 오는, 마을 사람들이 고래와 바다사자를 꾀는 피오르드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선 채로 서로를 바라보며 조용히 얘기하고 있었다. 그날은 빛바랜 양모 같은 안개가 낮게 깔려서 그들의 허리 아래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을 감싼 흰 안개의 파도 아래로 테오는 그들의 맞닿은 손을 볼 수 있었다. (본문 264쪽)
마그델레나가 자기 것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테오는 소렌과 마그델레나의 사이를 눈치채고 깊은 우울에 잠기지만, 그는 싸우기 좋아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사랑의 완전한 관심’을 원했던 테오는 새로운 연인을 찾아 떠나고, 그러다가 마주친 외떨어진 작은 산맥에 매력을 느낀다. 테오는 옆에서 기웃거리고 누워보고 말을 걸어보다가 그 잠자고 있는 산맥을 제멋대로 ‘아마란스’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그는 시로, 노래로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궁금해했고, 짐작했고, 그녀를 위해 구름들에 이름을 붙였다. 그녀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고, 곰을 제대로 먹는 방법과 마그델레나와 소렌에 대해 이야기했다. (…) 몇 주 혹은 몇 달이 지난 뒤 테오는 소렌과 마그델레나에게 돌아가야 할지 생각했다. 자신이 어디에 갔었으며 누구를 만났는지를 그들에게 말해야 하는지 말이다. 그렇게 하려고 일어섰을 때, 그는 그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마그델레나의 경계를 떠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마란스에게서 몇 발자국 이상 멀어지면 현기증이 났다. (본문 268쪽)
한 편의 우화 같은 이야기는 테오를 아마란스 옆에 머물게 한, 가늘디 가느다란 비처럼 쏟아지다 끝없이 깊어지는 잠처럼 읽는 이의 마음을 서서히 적신다.
이 책에 실린 낯선 사랑 이야기들은 일상화된 사랑의 풍경을 절묘하게 묘사하고 그 속에서 반짝 빛나는 순간들을 포착해 보여줌으로써 우리 기억 속 어딘가에 분명 존재하는 사랑의 순간들을 끄집어내 정체된 일상의 공기에 작은 물결을 일으킨다.
“괴물은 괴물의 본질에 대해 철학하지 않았다.
벗어날 기준이 없으니 모두가 괴물일 수 있었다.”
‘무한 자유’ 아래서 탄생한 독특한 캐릭터, 우리를 닮은 ‘타인 아닌’ 타인들
_「괴물」 「퍼쿠스 투스」 「마그다 만델라」
인종․성별․생물종에 아무런 제약이 없는 창작 조건에서 작가 ‘토비 리트’의 ‘괴물’이 탄생했다.
괴물은 자신이 무엇인지 몰랐다. 어떤 괴물인지, 가끔씩은 괴물이기는 한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괴물은 긴 시간처럼 느껴지는 기간 동안 거울이나 물웅덩이를 보지 않고 살아왔다. 거울은 없었고 물웅덩이는 본능적으로 피했다. (본문 99쪽)
괴물은 그 탁하고 둥글고 냄새나는 것들을 향해 누운 채 굴러가볼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기 전에 탁하고 냄새나는 것에는 그런 노력을 할 가치가 없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둥근 물체에 반감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과일은 아주 좋아했다. 때때로 희망적일 때 괴물은 자신의 배를 크고 둥근 과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만큼 자주, 절망적일 때 자신의 둥근 배는 똥 같았다. (본문 103쪽)
괴물에게 스스로를 인지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것은 고통이었다. 나무에 머리를 부딪쳤을 때 온몸으로 퍼져나간 통증은 괴물의 몸 곳곳을 연결지어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고통은 ‘존재’와 ‘선’에 관한 고뇌로 이어졌다. 토비 리트는 괴물의 추악함을 통해 인간의 모순을 드러내는 흔한 방식에서 벗어나, 조용하게 고통받고 고뇌하는 괴물의 모습을 그림으로써 성찰하지 않는 인간의 부끄러움을 자연스럽게 상기시킨다. 여섯 페이지 남짓한 짧은 분량에 담긴 이 놀라운 통찰과 빛나는 서사는 읽는 이에게 새로운 문학적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장르의 파괴자라 불리는 독창적인 작가 ‘조너선 레섬’은 독특한 취향의 문화평론가 ‘퍼쿠스 투스’의 아파트로 우리를 초대한다. 은퇴한 배우인 ‘나’는 구식 양복 차림에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 같아 보이는 퍼쿠스 투스를 우연히 알게 된다. 하지만 박학다식한 퍼쿠스 투스가 쏟아내는 이야기, 보헤미안의 작은 동굴 같은 그의 공간, 그와 함께 보내는 오후 속에서 ‘나’는 그와의 공통성을 발견해나가고, 이는 꽤 흥미로운 경험이다.
퍼쿠스 투스의 흥미로운 강렬함과 소강상태, 미끄러지는 오른쪽 눈의 시선이 궁금했던 것일까? 전부 다거나 아무것도 아니거나. 이것이 유일한 답이다. 그때 나는 이미 퍼쿠스 투스를 흠모하고 있었고, 나라는 존재의 낯선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의 우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미 감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빨려들어간 기이한 소용돌이로부터 나를 끌어올리기 위해서. 첫 만남 이후 나는 너무도 빨리 그를 흠모하고 필요로 하게 되었기에… (본문 130쪽)
제니스가 떠난 그 서글픈 해에 퍼쿠스 투스는 나와 가장 친한 친구였던 것 같다. 퍼쿠스는 진기한 것이었고 나는 진기한 것을 찾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도 분명 나를 자신의 수집품에 추가했을 것이다. (본문 143쪽)
하지만 새롭고 강렬한 즐거움이 오래가지 못하듯 어느 날 이들의 만남도 무산되고, 텅 비어버린 오후 시간에 ‘나’는 혼자 남게 된다. 나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에게서 발견하는 동질감, 새로 사귄 사람과 보내는 흥미진진한 시간들, 필연적으로 맞게 되는 위기 속에서 재정비되는 관계… 작가는 타인이 우리 삶에 발을 들여놓고 서서히 편입되어가는 과정을 독특한 캐릭터를 통해 낯설게 보여주면서도 이러한 경험이 주는 보편적 감정을 능숙하게 버무려냈다.
상실감에 빠져 한가한 시간 속으로 풀려난 내가 낯설었다. 퍼쿠스와 보내는 오후들에, 그리고 그 오후가 밤으로 바뀌는 방식에 의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밖이 환한 것이 너무 이상했다. 이런 건 내 기억에 없었다. (본문 150쪽)
여기, 자신을 넬슨 만델라의 딸이라 주장하는 여인이 있다. 자신의 넘치는 사랑을 주체하지 못하는 ‘마그다 만델라’는 밤마다 술에 취해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와 빅토리아 시크릿 카탈로그의 섬뜩한 조합처럼 집앞 계단 위에 서서 이웃들을 향해 외친다.
오늘밤 난 당신들을 사랑해. 사랑해, 이웃님들. 난 사랑으로 가득찼어. 하지만 당신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 그러니 이 말을 해야겠어. 난 눈곱만큼도 당신들을 신경쓰지 않아. (본문 345쪽)
그저 평범한 동네 사람들이 보기에 마그다는 주정뱅이 여인에 불과하지만, 오히려 마그다의 눈에 그들은 사랑에 야박하고 인정머리 없는 인간 족속인 것이다.
우리, ‘집안에서 우쭐해하는 도둑놈 같은 이웃들’이 모르는 것은 사랑의 힘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정복한다. 어느 날 우리는 이것이 사실임을 깨닫고 미안해할 것이다. 때때로 나는 우리가 마그다에게 받은 사랑을 되돌려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하다. 우리가 믿어주면 그녀는 우리에게 위대한 일들을 해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문제는 믿음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멍청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절대 귀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본문 34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