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예술을 만들고, 예술은 권력을 만들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서양미술 대다수의 작품은 ‘인간’에 대한 찬미를 바탕으로 더욱 풍성해졌다. 신화나 성경 속 주인공 혹은 영웅들이 예술의 중심 소재가 되었고 종교와 예술이 유착하게 된다. 이후 왕권이 강해지면서 예술가의 주 고객층은 교회에서 왕과 귀족으로 옮겨갔다. 그중 르네상스 미술의 절반이 메디치가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필요에 의해 주문 제작된 예술품 뒤에는 권력과 큰돈을 쥐고 있는 권력자가 있었다. 이들은 화가에게 실내 장식을 위한 화려한 신화화와 권위를 높이기 위한 초상화를 주문했다. 자연스럽게 예술가는 주문자가 원하는 이미지를 최대한 부각시켰고, 이는 우리가 오늘날 만날 수 있는 유럽 곳곳의 시청 앞 광장, 분수대 혹은 성당이나 수도원 등에 설치되었다.
이렇듯 미술은 부(富)와 권력이 있는 곳에 존재해왔다. 이미지가 곧 돈과 권력으로 귀결되는 시대, 권력은 미술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으며, 미술은 시대의 물음에 어떻게 응답했을까. 예술가는 무엇을 작품 속에 담았으며, 예술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에 『권력이 묻고 이미지가 답하다』는 딱딱한 정치와 말랑한 미술, 서로 전혀 상관이 없을 것 같은 두 분야를 접목해 그림이 말하는 역사적 사실과 해석을 흥미롭게 풀어가며 미술 속에 숨겨진 정치성을 좇는다.
“TV나 영화, 사진이 나오기 전에는 광장의 한가운데 서 있는 동상이나 교회의 벽화나 제단화가 그 역할을 했다. 사람들 대부분이 좁고 어두운 집에 살던 옛 유럽 사회에서 도시 한복판의 광장이나 교회에 놓인 시각 매체들은 영웅을 만들고, 심판자를 만들고, 이를 대중의 의식에 각인시키는 역할을 했다.”(6쪽)
삶에는 어디에나 정치가 있다
미술의 시선으로 본 시대의 욕망
이 책은 고대 이집트부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 이르는 현재까지 다양한 예술작품들을 살핀다. 나아가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담은 작품 속에서 예술가와 권력가의 관계를 모색하고 당대의 시대정신을 추출함으로써 작품의 전방위적 감상을 가능케 한다.
가령 11센티미터에 불과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통해 작품명에 담긴 이데올로기적 태도를 살피고, 앵그르와 들라크루아가 하렘의 여인들을 그린 작품에서 동방을 바라보는 제국주의의 시선을 짚어본다. 이는 작품을 작품 자체로 감상하는 것을 넘어 왜 이러한 작품이 탄생할 수밖에 없었는지, 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사회문화적인 맥락에서 작품의 당위성을 이해하게끔 도와준다.
또한 교황 율리우스 2세, 나폴레옹, 루이 14세, 엘리자베스 1세, 마리 앙투아네트, 빅토리아 여왕, 엘리자베스 2세 등 시대와 평가가 제각각인 인물들의 초상화를 통해 권력자의 욕망을 살핀다. 오랫동안 서양미술을 현장에서 연구해온 지은이의 시각은 시대의 변화와 요구에 의해 점차 달라지는 예술의 흐름을 꼼꼼하게 짚으며, 권력자들이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이미지를 어떻게 활용해왔는지, 이미지와 권력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알기 쉽게 설명한다.
“당시 왕의 초상화는 왕을 대신하는 역할을 했다. 왕이 직접 가지 못하는 지방 행사에 초상화를 보내기도 했으며, 왕이 베르사유를 떠나 있을 때는 왕좌 뒤에 놓은 초상화가 왕을 대신했다. 초상화는 곧 왕을 존재하게 하는 매체이므로 왕의 초상 앞에서는 등을 돌려선 안 되었다. 등을 돌리는 것은 곧 배반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왕의 초상은 왕의 위상을 지니고 있어야 했으며 동시에 그의 모습을 닮아야 했다.”(51쪽)
예술가는 이미지를 통해 권력을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현실을 고발하기도 한다. 권력과 현실에 어떤 이미지를 덧씌우느냐에 따라 숭배와 풍자, 찬양과 조롱 사이를 오간다. 『권력이 묻고 이미지가 답하다』는 미술에 담긴 세계를 정치라는 관점을 통해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입체적으로 재구성한다. 예술은 우리의 삶과 떨어질 수 없고, 예술가는 치열한 삶 속에서 끊임없이 깨어 있는 사고로 작품을 창조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시대를 기록한다. 서양미술사에 정통한 지은이의 날카로운 시선과 작품 뒤의 흥미로운 이야기는 작품 안에 박제된 인물과 사건을 우리 앞에 생생히 끌어낸다. 더불어 그들의 작품에 비추어 우리 시대의 이미지와 권력에 대해서 질문을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