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를 못하는 이유
아이러니하지만 우리가 공부를 못하는 이유는 어쩌면 너무 열심히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집중, 반복학습, 일관성 있게 한자리에서 공부하는 습관 등은 어떤 의미에서 뇌가 학습하는 것을 방해할 때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일정 시간 이상을 공부하는 데 쏟는 기본적인 노력 자체가 무용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가끔은 그 방법이 잘못됐다는 뜻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유창성 착각’이란 것이 있다. 같은 내용, 요점이 정리된 노트 등을 반복해서 보다보면 아직 숙지하지 않은 내용인데도 그 내용을 이미 다 알고 기억하는 것처럼 착각하는 현상을 뜻한다. 요점 정리 노트에 밑줄 긋고 형광펜 칠하면서 무턱대고 반복 학습을 하다보면 이런 함정에 빠지기 쉽다.
유창성이란 사실, 공식, 주장 등 당장은 기억하기 쉬운 것들을 내일, 모레까지도 다 기억할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을 일컫는다. 유창성에 대한 착각은 너무 강력해서 어떤 주제나 숙제를 정복했다고 생각하면 더 공부하는 것이 의미 없다고 간주해버린다. 우리는 우리가 잊어버린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형광펜으로 표시하기, 학습 지침 만들기, 심지어 선생님이 나눠주었거나 교과서에 나와 있는 각 장의 개요 읽기 등 학습의 ‘증진’에 도움이 되는 것들은 유창성 착시를 일으킬 수 있다. (120, 121쪽)
그토록 강조되는 집중력도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저자는 집중력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힌다.
‘집중력’은 학습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배웠다. 집중력이란 정확히 어떤 것일까? 집중이 어떤 의미인지 각자 나름대로 생각이 있을 것이다. 집중이 잘될 때 우리는 바로 감지하고, 더 집중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집중력이란 학습중에 뇌가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신기루 같은 상태를 이상적으로 표현한 말일 뿐이다. (278쪽)
까먹어도 괜찮다, 아니 오히려 좋다
한편, 공부를 할 때 우리가 물리쳐야 할 부정적인 요소로 강조하던 것들이 사실은 도움이 될 때도 많다. 망각이 그렇다. 망각은 중요한 것에 집중하기 위한 일종의 거름 장치 역할도 한다. 또한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서 희미해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회상’을 통해 기억이 흐려지면서 동시에 선명해진다. 무언가를 암기하고 일정 시간이 지난 후에 새로운 사실이나 단어가 더 잘 떠오르는 현상도 이것 때문이다.
1913년에 발표된 밸러드의 연구 결과는 과학계에 혼란을 가져왔다. (…) 하지만 밸러드는 자신의 연구 결과가 의미하는 바를 알았다. “우리는 한번 기억한 것을 잊어버리는 것뿐만 아니라 한번 잊어버린 것을 기억하는 성향이 있다”고 그는 썼다.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서 희미해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또다른 특징도 있다. 바로 ‘회상’이다. 처음 학습했을 때보다 시간이 경과한 후 새로운 사실이나 단어가 더 잘 떠오르는 것으로, 밸러드는 이를 일종의 성장이라고 명명했다. 기억이 흐려지고, 동시에 선명해지는 이 두 가지 성향은 시나 단어 등을 기억하려고 한 다음 며칠 후에 일어난다. (56쪽)
망각은 기억이 희미해지는 수동적 프로세스가 아니라 필터링을 하는 능동적 프로세스다. 필요 없는 정보들을 치우기 위해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정보를 차단하는 것이다. (57쪽)
때로는 산만하게, 그리고 딴짓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과제를 해결하는 도중,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순간에 의도적으로 ‘셀프 방해’를 하는 것도 효과적이다. ‘자이가르닉 효과’라는 것이 있다. 인간은 순탄하게 한번에 해결한 과제보다도 미완성의 과제를 훨씬 더 오래 기억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일부러 과제 수행을 방해함으로써 해당 과제를 의식의 최상단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문제 해결의 실마리나, 전환의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데 도움이 된다.
‘간격 효과’가 발휘되는 분산학습도 효과적이다. 특히 이는 새로운 것을 기억해야 할 때 유리한 기법이다. 한 번에 몰아서 공부하기보다는 나눠서 공부하는 것이 낫다. 잔디에 물을 줄 때도 일주일에 한 번 한꺼번에 물을 주는 것보다 세 번에 나눠서 물을 주면 물의 총량은 적게 들면서도 잔디를 더 파릇파릇하게 가꿀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한편, 무언가를 연마하거나 연습할 때는 한 가지만 계속 반복해서 연습하고 그걸 ‘마스터’한 다음에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보다는 이것저것 뒤죽박죽 섞어서 연습하는 게 효과적이다. 예컨대 배드민턴 서브 세 가지를 연습한다고 치자. 그러면 이 세 가지 서브를 각각 하나씩 완벽하게 정복하려고 애쓰기보다는, 여러 가지 서브를 섞어가면서 유연성 있게 함께 연습해야 각각의 서브를 더 잘 구사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 같은 내용은 우리가 모든 것을 단계별로 순서대로 완벽하게 공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탈피해야 함을 시사한다.
너무 열심히 하지 말자!
잘 자고 쉴 땐 쉬면서 일상처럼 즐기는 것, 그것이 진짜 공부다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이런 것이 공부였다니! 하지만 한편으론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던 이야기들도 눈에 띈다. 예컨대 잘 자고 쉴 땐 쉬어야 한다는 것. 공부에서 그게 중요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잠은 기억을 ‘응고화’시켜준다.
한마디로 유연성과 휴식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즐기면서 공부하면서 생각의 각도를 바꿔보는 시도가 중요하다. 그래야 효율적으로 습득할 수 있다. 막다른 골목에선 잠시 머릿속에서 그 과제를 치워두었다가 나중에 다시 착수하는 것도 괜찮은 전략이다. 그래야 창의적인 해결책이 보인다. 고통스럽지 않게 뇌의 요구를 따르면서도 좀더 효과적으로 공부할 수 있으니 왜 진작에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무조건 집중해서 꾹 참고 끝까지 한 번에 완벽히 외우고 습득해야 한다는 부담감만 좀 덜더라도 공부가 더 즐거워지는 건 물론이고 더 좋은 성적도 낼 수 있지 않을까? 실천하기 쉬운 방법들이 이 책 안에 있다.
본문에서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것들이 학습에 도움이 되고, 낮잠도 도움이 된다. 뭔가를 하다가 중도에 그만두는 것도 생각만큼
나쁘지 않다. 완성된 것은 잊어버려도 중간에 그만둔 것은 기억 속에 맴돌기 때문이다. 공부하기 ‘전’에 백지상태로 시험을 보면 앞으로 배울 내용을 더 효과적으로 배울 수 있게 된다. (11쪽)
수업을 듣거나 어떤 주제를 공부할 때 “방향을 잃었다”고 말하는 것은 중도에 그만두고 포기하려는 마음을 합리화하는 표현일 때가 많다. 하지만 실제로든, 비유적으로든 황무지에서 길을 잃게 되면 그렇게 속수무책인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길을 잃게 되면 우리 안의 GPS가 고도로 민감해지고 인큐베이션, 여과, 심지어 잠자는 도중에 직관을 얻게 해주는 머릿속 회로를 데우게 된다. 학습자에게 의욕이 생기면 집을 찾기 위한 정신적 태세가 마련된다. 길을 잃는 것이 반드시 끝은 아니다. 시작일 때도 많다. (282쪽)
우리가 유일하게 제어할수 있는 것은 ‘어떻게’ 학습하느냐뿐이다. 과학에 따르면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하루 일정에 따라 유연하게 공부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팽배하게 퍼져 있는 믿음처럼 집중력 저하를 의미하는 증상이 아니다. 이 책에 나온 방법대로 된다면 이는 ‘간격 학습법’이다. 뿐만 아니라 더 효율적이며 심도 깊은 학습이 가능하다. 모든 시간을 완전하게 집중하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가 이상한 게 아니라는 안도감, 홀가분한 해방감을 주는 연구 결과다. 학습은 ‘유동적’인 활동이며, 이 특징은 단지 공부 스케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공부 내용에도 적용된다. 즉, 새로운 내용과 이미 배운 내용을 혼합하면 좋다.
나는 보다 폭넓게 인생관에도 학습과학을 접목시키기 시작했다. 좋은 공부 방법이라고 굳어진 믿음에 오도의 여지가 있듯, 억울하게 나쁜 습관으로 간주되는 것들도 있다.
잠시 생각해보자.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것들, 딴짓, 선잠, 방해 등은 목적이 이끄는 삶에서는 무시해버려도 좋을 사소한 요소가 아니다. 열 살짜리 아들, 반려견 또는 엄마가 당신을 필요로 하는 순간이다. 갑자기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고 싶을 때는 배고프거나 목말라서일 수도 있고, 잠깐 TV를 보며 쉬는 것도 사회 활동에 유용할 수 있다. 피곤하기 때문에 선잠을 자는 것이고,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기 때문에 휴식을 취하고 싶은 것이다. 이것들이 한 땀 한 땀 모여 매일매일 우리의 존재를 지탱해준다. 이러한 것들 역시 일탈이 아니라 인생의 일부다. 이와 같은 사실을 배제할 것이 아니라 이를 중심으로 공부나 연습 시간 계획을 짜야 한다. (28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