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부키가 평생 사숙한 페소아 작가론 및 문학비평 에세이
유럽의 지성으로 불리며 죽기 전까지 노벨상에 여러 차례 거론되었던 이탈리아의 걸출한 문인 안토니오 타부키 문학의 중심에는, 포르투갈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가 있었다. 타부키는 1960년대에 프랑스 헌책방에서 「담배 가게」라는 시를 읽고 처음 페소아에게 매혹되어, 아직 유럽이 페소아라는 작가에 눈뜨기 전부터 그를 알리고 그의 작품세계를 소개하는 일에 앞장서왔다. 포르투갈 여인 마리아 조제 드 랑카스트르와 결혼해 공동으로 페소아의 작품을 번역하고 연구서를 내는가 하면, 페소아의 삶과 작품을 모태 삼아 자신의 문학세계를 일구기도 했다. 일례로 인도에서 종적을 감춘 사라진 친구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소설 『인도 야상곡』(1984)을 비롯해, 모국어인 이탈리아어가 아니라 포르투갈어로 쓴 소설로 죽은 친구를 만나러 리스본 곳곳을 떠도는 이야기 『레퀴엠』(1991), 페소아가 죽기 사흘 전을 상상하며 쓴 픽션 『페르난두 페소아의 마지막 사흘』(1994) 등 타부키의 주요 작품에서 주인공 화자를 다른 세계로 이끄는 마법 같고 신비로운 존재론의 실마리는 페소아 혹은 그의 숱한 분신들 페소아들이었다.
이 책은 타부키가 쓴 페소아 관련 글들 여러 편과, 이와 관련해 타부키가 직접 가려뽑은 페소아의 핵심 시와 편지들로 구성되어 있다. 페소아와 그의 다른 이름들에 관한 핵심 전기 및 관계 탐구, 여러 연구자의 목소리가 녹아들어간 산문들과 이탈리아 시인 안드레아 찬초토와 나눈 인터뷰, ‘담배’라는 주제 하나로 페소아와 스베보를 묶은 독창적인 에세이, 트렁크에서 나온 희곡과 시 원고들에 대한 단상과 타부키가 작품을 번역하면서 떠오른 메모, 연애편지를 통해 페소아의 의식을 들여다본 분석 등, 타부키의 짧고도 간결한 이 글들은 20여 년간 오랫동안 페소아를 사숙한 타부키의 비평적 통찰의 정수롤 보여준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이 글들이 “페소아의 놀이가 지닌 본질과 그의 진정한 허구”를 탐구한 “하나의 비평적 가설”로 읽히기를 바란다고 썼다. 이 책은 “전기를 위한 작품 창안이 아닌, 작품을 위해 전기를 창안한 작가”이자 “다른 이름들로써 놀이의 본질을 실제로 살아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페소아에게 바치는 타부키의 애정 어린 페소아론이다. 또한 여전히 페소아 원고들 정리가 진행중이고 판본 문제가 여러 연구자들 사이에서 다양하게 거론되고 있는 현 단계에서, 타부키가 자기 글에 인용하고 있는 1980년대까지의 페소아 연구의 진척 과정과 관련 연구자들의 핵심적인 문헌자료 목록을 개관할 있다는 것도 이 책의 미덕이다.
제목에 숨은 비밀: 페소아(사람)들로 가득한 이명들의 은하계를 여행하는 다각도의 접근
그렇다면 이탈리아의 문인 타부키를 이토록 매혹시킨 페소아, 그는 누구인가? 사실 타부키가 이 책에서 여러 각도에서 되묻고 구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질문이다. 한국에는 몇 년 전 『불안의 책』 『페소아와 페소아들』 등이 소개되었다. 그의 픽션 같은 일대기는 숱한 문학인과 예술가에게 영감의 원천이자, 20세기 문학사 내의 자아와 주체에 대한 철학적 문제제기로 이어지기도 했다. 또 오늘날 세계 문학인들은 이렇게 말하곤 한다. 파리에는 보들레르가, 더블린에는 조이스가, 리스본에는 페소아가 있다! 20세기 최대의 서정시인”(잔프랑코 콘티니), “너무나 드문 위대한 시인”(앙드레 브르통), “페소아는 미지의 절박함이다”(옥타비오 파스), “보르헤스를 능가하는 환상적인 창조, 그는 다시 태어난 휘트먼”(해럴드 블룸), “‘책’이라는 말라르메의 기획을 훨씬 넘어선 페소아의 문학세계”(알랭 바디우)라고 떠들기도 했다.
우선 위의 질문에 답하려면 타부키가 뽑은 이 책제목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가득한 트렁크’라는 제목에서 보듯, 타부키는 포르투갈어로 일반명사로서 ‘사람, 인물’을 뜻하는 소문자 ‘pessoa’와 고유명사로서의 이름 대문자 ‘Pessoa’ 사이의 긴장을 절대 놓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제목은 ‘페소아들이 가득한 트렁크’라는 메아리와 같이 온다. 그렇다면 왜 트렁크인가? 페소아가 죽고 나서 2만 7500여 장의 원고가 들어 있던 트렁크가 발견되었고, 거기에는 각 글마다 70개가 훌쩍 넘는, 또 혹자는 80여 개라고도 하는, 그의 숱한 다른 이름(異名)들의 세계가 부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간의 세계문학사에서 이는 유례를 찾기 힘든 문학사적 사건과도 같았다. 이 제목은, 말하자면 무수한 사람들로 살았던 페소아(개인/단수)와 개별적 개성을 지닌 페소아들(이명들/복수)의 신비를 포착해낸 타부키의 비평적 통찰이 녹아들어간 것으로, 이 책 자체가 곧 독자들로 하여금 페소아 세계로 모험을 떠나기를 권하는 여행가방인 셈이다.
유럽의 변방 포르투갈 작가 페소아가 지닌 문학세계의 현대성과 역사성을 진즉에 꿰뚫어본 타부키는, 이 책에서 그의 출현을 ‘20세기 네거티브’ 문학으로 조심스레 분류하면서, 전기적 관점, 정신분석학적 관점, 역사적-철학적 관점 등 다양한 각도에서 페소아를 바라보고 있다. 특히 페소아에 대해 자칫 오해할 수 있을 법한 그의 이데올로기적 입장, 제국주의에 대한 열광이라든가 귀족주의에 대한 공감 등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당시 유럽에 유행하던 예술 운동 및 사조와 포르투갈 내에서 페소아가 이끌었던 아방가르드 운동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 시대사와 같이 조명하고 있는 타부키의 고찰은 무척 탁월하다. 그뿐만 아니라 여러 이름으로 공시적 복수성의 삶을 보여준 페소아의 자아분열적 세계관과 명철한 심리적 현실을 대비시킨 통찰이라든가, 영어와 포르투갈어를 번갈아가며 쓴 그의 문학언어와 관련해 찬초토와 나눈 대담이라든가, 말라르메, 발레리, 베케트, 스베보, 몬탈레, 카프카, 무질, 릴케 등의 문학가들과의 비교는, 페소아와 그들이 공명하는 지점을 넘어 독특한 차이를 감별해내도록 이끈다. 박학다식하고 압축적인 사유가 녹아든 타부키의 정제된 문장 역시 독자들로 하여금 페소아 문학세계의 비밀로 이끄는 상상력에 불을 지펴줄 것이다.
타부키가 가려뽑은 페소아 글들과의 만남: 다른 이름들의 발생에 관한 페소아 자신의 고백글, 연애편지, 페소아 문학관을 보여주는 핵심 시가 부록으로 실린 책
무엇보다 이 책을 읽는 재미 중에 놓칠 수 없는 게 또 있다. 바로 타부키가 직접 가려뽑아 부록으로 실은 페소아 원고다. 여기에는 페소아가 자신의 다른 이름인 몬테이루에게 직접 자기 자신의 이명들이 어떻게 발생했는지를 설명하는 핵심 편지 「다른 이름들의 발생에 관해 아돌푸 카사이스 몬테이루에게 보낸 편지」와 더불어, 페소아 시론의 원천에 대해 집중적으로 탐구한 타부키의 글 「한 어린이가 풍경을 가로지른다」와 공명하는 페소아의 시 「양들의 보호자」 8번 시 전문, 그리고 페소아의 내면 고백과 현실과 허구가 뒤섞인 의식이 잘 녹아들어가 있는 연인 오펠리아 케이로스에게 보낸 편지 일곱 통이 실려 있다. 특히 몬테이루에게 보낸 편지에서 페소아는 자기가 쓰는 책들의 장래 출판 계획이나 순서, 자신의 다른 이름들의 기원, 신지학과 신비주의와 관련한 자신의 신학적 의식을 담은 오컬티즘 사상에 관해 직접적으로 해명하고 있어, 현재까지도 원고 정리가 진행중인 단계에서 앞으로 페소아 세계를 항해해나갈 연구자들이나 독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타부키 글에서 소개된 페소아의 희곡작품들(『뱃사람』 『파우스트』 등)과 중간중간 인용된 여러 시편들은, 아직 그의 작품이 단편적으로 소개되어 아쉬워했던 한국 독자들에게는 흥미롭고 입체적인 페소아 문학세계의 윤곽을 그려볼 수 있게 안내할 것이다.
【본문 맛보기】
페소아는 삶에서도 20세기 문학의 모범적인 등장인물이었다. 발레리는 테스트 씨를 통해, 스베보는 제노를 통해, 카프카는 측량기사나 K를 통해 어떤 면에서는 자신의 삶을 예시적으로 보여주었는데, 그러기 위해 삶을 몇 옥타브 낮추거나 문학 사상 최악의 실존적 상황으로 환원시키는 수법을 썼다. 그런데 페소아는 그런 역할을 실제로 살았다.(40~41쪽)
그러니까 소아르스가 자기 책 전반에 걸쳐 집착에 가깝게 말하는 영혼은 정의하기 어려운 공간이다. 그것은 의식이자 무의식이고, 자아이고 존재이며 있음이다. 그가 사는 삶이자 삶의 원형이고, 현실적인 삶이자 동시에 전부터 존재하는 영원한 삶이며, 그것을 소아르스는 자신의 이중적 창가에서 바라보고 있다. 마치 『말테의 수기』에서 여기저기 나타나는 에리크 브라헤가 건강한 한쪽 눈으로는 살아 있는 자들의 세계를 바라보고, 고정된 한쪽 눈으로는 죽은 자들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처럼 말이다.(91쪽)
그렇다면 ‘진짜’ 페소아는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서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가? 이 숨어 있는 자기 자신은 무엇을 하는가? 페소아는 어느 곳에선가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자신에게’ 글을 쓰고 있다. 그의 운명은 “다른 법칙에 속하고…… 받아들이지도 않고 용서하지도 않는 스승들에게 점점 더 복종하며 종속되어갔다.”(36번 편지) 이런 사랑이 하나의 생각이었던 것처럼, 페소아의 ‘진짜’ 삶도 하나의 생각처럼 보인다. 비록 모든 것이 다른 사람에 의해 생각되었지만 말이다. 그는 존재하지만 장소는 없다. 하나의 텍스트다. 이런 ‘부재’ 속에 그의 혼란스러운 위대함이 있다.(1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