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가까이 동시문단을 일궈온 이준관 시인의 새 동시집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동시가 당선되어 등단한 뒤 50년 가까이 동시문단을 일궈온 이준관 시인. 어린이이며, 어린 시절을 거쳐 간 이들은 한 번쯤 그의 동시를 읊어 봤을 만큼 아이들의 체험과 마음을 담은 동시들을 써 왔다. 그런 그가 새 동시집 『쥐눈이콩은 기죽지 않아』를 내놓았다. 햇볕 바른 남향에 풍금이 놓여 있던 교실에서, 벽돌집이 다닥다닥 늘어선 서울 사당동과 고척동 골목길에서, 또 마음에서 아이들을 만나온 그. 그 시간을 품고 발효된 동시들이 이마를 맞대고 오불오불 붙어 앉아 먹어봄 직한 밥그릇에 담겼다.
어머니가
밥을 담아 주는
내 밥그릇.
강아지가 혀로 싹싹 핥아 먹는
강아지 밥그릇.
나비가 얌전히 앉아 먹는
민들레꽃 밥그릇.
꿀벌들이
오불오불 붙어 꿀을 먹는
해바라기꽃 밥그릇.
붕어 피라미 꼬물꼬물 모여
호르륵 먹는
시냇물 밥그릇.
알고 보면
해도 햇살밥 수북이 담겨 있는
우리 모두를 먹여 살리는 밥그릇.
세상에는 밥그릇이 참 많네.
서로 이마를 맞대고
오순도순 먹으라고.
「밥그릇」 전문
재밌는 이야기들이 골목길처럼 꼬불꼬불 이어지고
신나는 이야기들이 완두콩 덩굴손처럼 마음을 간질간질 감고 오르는 곳
큰길부터 시작돼 집집까지 닿아 있는 골목길. 아침이면 꽃집과 구둣방이 문을 열고, 저녁이면 밥 짓는 냄새에 둘러싸여 밥 먹어라, 더 놀다 가, 소리가 울려 퍼지고, 노을이 바라다보이는 계단에서는 아이가 책을 읽는 곳. 시인을 따라 골목을 탐방하다 보면, 동네에 깃들여 사는 이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눈사람을 집에 데려가고 싶은 아주머니, 고장 난 물건을 고쳐 주는 털보 아저씨, 떠돌이 고양이였다가 골목에 자리 잡은 ‘보미’라는 고양이와 염소처럼 해해해해 웃기 잘하는 아이, 그리고 골목의 손님인 생선 장수까지도 지나치지 않는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소리와 냄새, 다정한 체온을 구석구석 만날 수 있는 골목, 아이들은 이 골목에서 뛰어놀며 삶에서 중요한 가치를 배운다.
집집마다
분꽃 같은 불이 켜지면
모두 우리 집 같지
집집마다
저녁별을 보고
강아지가 짖어 대면
모두 우리 강아지 같지
집집마다
“조금만 더 놀다 가, 응?”
친구가 붙잡고 조르는 소리
모두 우리 친구 소리 같지
“밥 먹어라!”
집집마다 부르는 소리
모두 우리 엄마 목소리 같지
「저녁」 전문
새 학년이 되었다
키도 쑤욱 커졌다
이제 골목에 나가면 모두 나를
형이라고 부른다
골목길을 달리다 넘어져도
하나도 안 아프다
이제 형이니까
아이들이 개미를 밟으려고 하면
“그러지 마, 개미가 불쌍하잖아.”
하고 점잖게 말한다
이제 형이니까
「형」 부분
작은 곤충의 목숨도 귀히 여기는 마음, 남의 집 감나무도 꼭 안아 주는 팔, 할머니의 무거운 짐을 거들어 주는 손, 달리기 꼴찌로 들어왔어도 씨익 웃는 얼굴, 사방치기하다가 싸움이 나도 다시 화해하는 마음……. 골목은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지만, 시인은 보편적인 동심의 시간과 공간이며 아이들의 마음이 모이는 새로운 공간으로 골목을 그려 냈다. 그리고 이 골목은 지구라는 커다란 세계와 포개진다.
골목의 힘, 골목 식구의 힘
지구의 힘, 지구 식구의 힘
이 동시집에는 골목이 품은 식구들과 더불어 지구가 품은 식구들, 그들이 내는 땀 한 방울의 힘이 있다. 시인은 조그마하고 보이지 않아도 또 다른 존재를 일으켜 세우고 숨 쉬게 하는 것들의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물방울이며 공기뿐만 아니라, 뱀과 바닷게에게도 세상을 위해 나름대로 할 일이 있다. 시인은 섬세한 눈으로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제 값을 받게 한다. 그들이 지구를 떠받치는 힘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이 모든 것들이 내어주는 밥과 힘으로 아이들은 자란다. 작다고 기죽지 않고 가을이면 야무지게 튀어나오는 쥐눈이콩과 어떤 열매를 맺을까 골똘히 생각하는 자두나무의 힘을 아이들은 닮았다.
땅을 뚫고 나오는
조그만
씨앗의 힘
시들어 가는 들녘의 곡식들을
푸르게 일으켜 세우는
조그만
물방울의 힘
개구리도 황소도
불룩불룩 숨 쉬게 하는
조그만
공기의 힘
「지구의 힘」 부분
쥐눈이콩알만 한 게 까분다고
나를 무시하지만
햇빛을 봐
빗방울을 봐
쥐눈이콩 작다고
무시하는 거 봤어
업신여기는 거 봤어
쥐눈이콩을 봐
작다고
기죽는 거 봤어
풀 죽는 거 봤어
야무지게 여물어
가을이면 보라는 듯이
톡톡 튀어나오는 쥐눈이콩
그게 바로 나야!
「쥐눈이콩」 전문
어머니가 내 밥그릇에 밥을 담아 주듯이, 세상의 밥그릇에는 누군가가 밥을 담아 줍니다. 나비나 꿀벌들에게 꽃을 내어 주는 민들레꽃이나 해바라기꽃도 영락없는 밥그릇입니다. 세상에는 밥그릇이 아닌 게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한 번도 제값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를 먹여 살리는 밥그릇’인데도 말입니다. 이준관 시인은 이와 같이 다른 이들이 놓쳐 버린 작은 것을 찾아 알려 줍니다.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놓인 것들의 상처를 포근히 다독거려 줍니다. 이것이 이준관 시인의 시가 지닌 힘입니다._최명표(아동문학평론가)
김정은 화가는 정감 있는 골목골목의 풍경과 쥐눈이콩처럼 딴딴하고 당찬 아이들의 모습을 밝고 따스한 색채로 담아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도란도란 말소리가 남실거리며 흘러나와 독자들을 어느 즐거운 골목길 동네로 끌어들이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