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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어느 날,
공룡 한 마리가 찾아왔다
딩동 딩동, 어떤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어느 날, 공룡 한 마리가 찾아왔다. 처음 보는 공룡은 “안녕! 오랜만이야!”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고는 천연덕스럽게 내 방에 짐을 푼다. 안경을 쓴 공룡은 뭐든지 잘 먹고 코도 골고 방귀도 뀌며 잠도 잘 잔다. 영화관에서는 시답지 않은 장면에서 웃거나 눈물을 쏟아 나를 창피하게 하며, 탁구 실력이 수준급이다. 그런데 길 가는 사람들 누구도 공룡을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 “너… 누구야?”
나의 질문 이후로 공룡은 하염없이 창밖만 본다. 기분을 풀어 주러 간 놀이공원에서 콜라를 마시다 말고 공룡은 말한다. “잊혀지는 게 힘들까, 잊는 게 힘들까?”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으며 살아가는 걸까?
『너였구나』는 지지난해 『달려라 오토바이』로 우직한 삶의 풍경 한 조각을 독자에게 건넨 바 있는 작가 전미화의 신작 그림책이다. 그는 『씩씩해요』『미영이』, 2015년 볼로냐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에 선정된 『빗방울이 후두둑』까지 멈추지 않고 꾸준히 그림책을 지으며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왔다. 담백한 묘사와 가뿐한 보폭, 요란하게 꾸미지 않아 담담한 목소리로 전하는 이야기들은 쇠공처럼 묵직하게 독자의 가슴을 두드리곤 했다.
이번 이야기 『너였구나』는 선 굵은 전작들에 비해 섬세한 연출과 몽환적인 분위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부드러운 붓선과 유머러스한 문장, 군데군데 사용된 캔디 컬러들이 두 주인공이 함께 보내는 시간들을 특별한 색깔로 채워 간다. 공룡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생각보다 즐겁고, 공룡이 늘 매고 다니는 유행이 지난 스카프도 어딘지 낯익은 느낌이다.
그리운 것들로부터 시작되는 여행
“있잖아, 우리 마을 공룡들은 언제든 여행을 떠날 수 있게 준비해 둬. …여행의 시작은 기억이야.” 나지막한 공룡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공룡이 찾아오기 얼마 전 우연히 발견한 사진 한 장. 짧은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친구는 어른이 되지 못하고 사진으로만 남았다. 빛이 바랜 사진 귀퉁이에 찍힌 숫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던 날이었다. “아, 너였구나.”
나는 눈을 감고 그때의 시간을 기억해 본다. 여행을 끝낸 공룡이 돌아간 뒤, 내 방에는 또 한 장의 사진이 놓였다. 아마도 공룡은 또다시 가방을 꾸린 채 여행을 기다리고, 나의 삶도 이전과 같이 계속될 것이다.
독자는 이제 작가가 건넨 구슬 하나씩을 받아들고 저마다의 기억을 소환하게 된다. 각자의 그리운 것들을 떠올리며 잠시만 눈을 감아 보아도 좋을 것이다. 『너였구나』라는 문장 뒤의 느낌표는 구슬의 여행이라 불러도 좋을 둥그런 연쇄가 우리의 허전한 삶을 지탱한다는 깨달음일지도 모른다.
추천사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사람 보내는 일에 익숙하고, 사람 잊는 일에 익숙하다. 어른이 되어 잘 하게 된 일이란 겨우 그런 것일까? 세상이라는 사막 위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외로움을 겪는 일이며, 그 외로움에서 벗어나고자 안간힘으로 세상을 탐색하는 일이겠지만 우리는 그 모두를 겪을 힘도, 그 모두를 찾을 재주도 없다. 그럼에도 누군가를 지워 없애는 일을 아프지 않게 일삼는 우리들.
‘잊혀지는 게 힘들까? 잊는 게 힘들까?’ 이 거대한 질문을 통해 『너였구나』는, 못난 우리 삶의 방식을 뒤돌아보게 하며, 여행하게도 한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라게 한다. 세상엔 여전히 제자리에서 빛나는 것들이 있다. 특히 기억은 더 그러하다.
_이병률(시인,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