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의 삶과 작품은 분리할 수 없다!”
『뉴요커』의 40년 붙박이 미술평론가, 현대미술을 생중계하다
‘작가와 작품은 별개다.’ 형식주의 비평의 금언과도 같은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의 지은이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지은이는 이 책의 원제인 ‘아티스트들의 삶(Lives of the Artists)’에서부터 이 점을 분명히 한다. 이 제목은 1550년 ‘최초의 미술사학자’ 조르조 바사리가 르네상스 시대의 뛰어난 화가, 조각가 그리고 건축가들의 삶에 관해 써서 펴낸 책에서 가져온 것으로, 제목만으로도 톰킨스는 이 책이 나아갈 바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동시대 아티스트들의 삶은 그들이 만들어내는 것에 너무나 필수적인 요소이기에 그 둘은 분리해서 고려될 수 없다. 작품이 흥미롭다면, 삶 또한 그럴 가능성이 크다. _「서문」에서
지은이 캘빈 톰킨스는 1960년 『뉴요커』의 필진으로 합류한 후 이제까지 그 지면을 통해서 대중에게 현대미술을 소개해왔다. 특히 그는 미술 그 자체보다는 아티스트의 라이프스타일과 작품 창조를 둘러싼 조건들에 초점을 맞춘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현대미술을 둘러싼 시대적 상황 때문이다. 오늘날 현대미술에서 “전통, 기술, 엄격한 훈련, 형식에 관한 지식 같은 이 모든 오래된 요건들은 서서히 사라지거나 선택사항이 되”어버렸으며 아티스트들에게 허용된 자유는 거의 무한대에 가깝다. 인정받은 아티스트가 “이게 예술이야”라고 제시하는 것은 무엇이나 예술로 받아들여지는 오늘날의 풍토에서, 이 책에서 소개하는 열 명의 동시대 아티스트들에게 “미술은 무엇보다도 삶의 문제에 대한 접근”이 된다.
이 책에서는 1999년 『뉴요커』에 발표된 데이미언 허스트에 관한 글부터 2008년 역시 같은 잡지에 발표된 존 커린에 관한 글까지 모두 10년에 걸쳐 열 명의 현대 아티스트들을 소개한다. 잡지에 수록되었던 것을 사소한 수정과 덧붙임만 붙였을 뿐 당시의 글을 거의 그대로 수록했다. 때문에 글이 쓰인 당시의 현장감이 더욱 도드라지는 효과가 있다. 가장 최근에 쓰인 존 커린에 관한 글이 2008년의 것이었으니, 마지막 글이 쓰인 지 또 1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여기 소개된 열 명의 아티스트들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최고의 위치에 올라 있으며 화제성으로나 작품 가격으로나 관심이 집중되는 이들이다. 어린 시절부터 아티스트가 되고자 결심한 계기며 청년 시절, 그리고 작가로서 초년생 때부터 글이 쓰인 당시 시점까지, 개인적인 이야기와 작품의 발전 상황을 특유의 쿨하고 유머감각 넘치는 글로 담아낸 짧은 전기들을 읽다 보면, 언뜻 이해하기 어려웠던 현대미술에 좀 더 친근히 다가갈 수 있다. 지근거리에서 아티스트들을 바라보며 그들과 친분을 쌓은 지은이의 글이기에, 독자들로서는 이 글들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알 수 없었을 이들의 개인적인 모습을 알 수 있고 또 그런 모습이 작품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흥미롭게 살펴볼 수 있다.
이 책에는 도판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시인이자 비평가인 윌리엄 코르벳은 이 점에 대해 “이 책의 즐거움 중 하나는 도판이 없다는 데에 있다. 독자들은 자신의 기억과 톰킨스의 꾸밈없는 일급 묘사력에 기대어 판단을 내려야 한다”라고 썼다. 그 말대로 인물에 대한 생생한 묘사와 자신이 본 것을 솔직하게 전달하는 톰킨스의 필력에 힘입어, 도판이 없더라도 이 책을 읽는 데는 무리가 없고 흥미 또한 떨어지지 않는다. 다만 작품 이미지를 찾아보며 읽으면 내용에 대한 이해가 한층 깊어지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때문에 한국어판에서는 언급된 작품 이미지와 직접 연결되는 URL을 웹문서로 정리해서 QR코드로 다운받을 수 있도록 했고, 본문에 참고 이미지마다 번호를 매겨두어 해당 문서에서 찾아보기 쉽도록 했다. 책을 읽을 때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등을 옆에 두고 다운받은 문서를 통해 작품을 찾아보면 더욱 즐거운 독서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을 집어 삼키려 한 아티스트 | 데이미언 허스트
포름알데히드에 넣은 뱀상어부터 8,601개의 다이아몬드를 박아 넣은 해골까지, 내놓는 작품마다 논란을 몰고 다닌 그야말로 ‘핫한’ 아티스트다. 골드스미스 대학에 다니던 시절 허스트는 매년 연말마다 학생들이 여는 전시의 기획을 맡아 빈 창고를 빌려 〈프리즈〉라는 제목의 전시를 열었고, 이는 YBA(젊은 영국 아티스트들)라는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냈다. 기획의 천재로서 한때는 미술가보다 화상, 큐레이터가 되리라는 기대를 받았다는 그는 이제 하는 일마다 화제를 몰고 다니며 록스타에 버금갈 만한 인기를 끄는 스타로, 작가로서는 물론이고 사업가로서도 왕성하다. 데이미언 허스트라는 이름은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다. 이 글 속에서 여전히 아무 데서나 바지를 내리고 폭음을 일삼으며 파티를 즐기는 악동이지만 한편으로는 동료들의 작품을 사 주는 관대한 컬렉터이자 아이와 파트너에게 다정한 의외의 면모를 보기이도 한다.
작품 속으로 사라지다 | 신디 셔먼
신디 셔먼이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스스로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유명해진 작가라는 것을 생각하면 기이한 일이지만, 사실이 그렇다. 그녀의 모습이 벽마다 걸려 있는 개인전 오프닝에 참석한 손님들이 “신디 셔먼이 누구냐”고 묻는 일도 드물지 않다. ‘변장’을 하고 ‘다른 사람’이 되어 사진을 찍는 그녀는 실제 삶에서도 스포트라이트를 무척 부담스러워하는 수줍은 성격이며, 아티스트답지 않게도 ‘친절, 겸손, 온화함, 배려, 침착함을 갖춘 사람’이라고 한다. 10대 소녀처럼 극장 좌석에 무릎을 끌어올린 자세로 앉아 슬래셔 무비를 지은이와 함께 보며 즐거워하는 신디 셔먼의 모습은 톰킨스의 글이 아니었다면 짐작하기도 어려웠으리라. 하지만 그녀의 작품은 때로 폭력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강렬하며 그녀의 얌전한 외양 밑에는 엄청난 에너지와 자신에 대한 분노가 도사리고 있다.
그 아티스트의 거대한 자아 | 줄리언 슈나벨
인터넷에서 줄리언 슈나벨의 이름을 넣으면 ‘영화감독’이라는 설명이 먼저 나오는 처지가 되었지만, 이 글이 쓰인 시점에 「비포 나잇 폴스」로 호평을 받고 있던 슈나벨은 누군가 이제 그림 대신 영화를 만들 생각인지 묻자 “이보세요. 전 지금까지 그림 천 점을 그렸고 영화는 고작 두 편 찍었을 뿐입니다. 전 화가예요” 하고 발끈한다. 슈나벨은 미술시장이 매우 활황이었던 1980년대에 그와 함께 나타난 미술계의 문제들―‘자기PR, 선전공세, 터무니없는 가격, 투기 성향 구매’―의 집약체처럼 보였던 인물이다. 글 속에서 넘치는 에너지를 발산하는 그의 성격은 대담하고 거침없는 작품과 그 이미지가 딱 맞아떨어진다. 그는 성공적인 화가이자 인테리어 디자이너 또 영화감독으로서 사치스럽고 화려한 삶을 누리고 있다.
육중한 강철의 가벼움 | 리처드 세라
세라는 주변에서 ‘대하기 힘든 사람’으로 통한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활동적이고, 상대방의 기를 죽일 만큼 의사표현이 분명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믿는 바에 대해서는 거침이 없고 확신에 가득 차 있으며 눈치를 보는 일 따위는 없다. 그렇게 무지막지한 고집으로 밀어붙이는 작품세계는 그의 성격만큼이나 박력 있고 압도적이다. 그런데 어마어마한 규모의 강철판은 어떤 지지대도 없이 공간에 스스로의 물리력으로 서 있다. 세라의 작품은 공간을 구획하며 공간의 형태를 새로이 만들어내며 관객이 그것을 ‘체험’함으로써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빛 속으로의 도피 | 제임스 터렐
터렐은 “빛을 매체로 작업하는 아티스트다.” 그는 공간 속에 빛을 그려낸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규모로. ‘로덴 분화구’는 애리조나 북부 오색사막 서쪽 변두리에 있는 사화산으로, 여기에 터렐 미술세계의 본령이 있다. 1974년 자가 비행기를 몰고 다니며 물색한 끝에 이곳을 발견한 터렐은 지금까지도 “자연 속에 미술을 들여다 놓는 작업”을 완성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여기에 들어가는 어마어마한 비용은 여러 미술 재단의 지원금에 스스로 운영하는 농장 수익금과 작품 판매비로 충당하고 있다. 실생활에서 터렐은 ‘알기 힘든 사람’이라는 평판이다. 오랜 친구 한 명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책임, 가정환경, 헌신적인 관계 앞에서 달아나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그 사람이 추구하는 미술의 본질은 온갖 종류의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한 것이니까요. 그는 관객들 또한 그렇게 할 수 있게 해주죠.”
아름답고 난해한 크리매스터의 세계 | 매슈 바니
매슈 바니는 세계 미술계에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장했다. 이 잘생긴 젊은 아티스트는 데뷔 직후부터 엄청난 비평적 호평을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고등학생 때 풋볼 팀의 쿼터백이었고 또 모범생이기도 해서 예일대학에 입학했던 그는 모델 일을 해서 학비를 충당할 정도로 뛰어난 외모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는 겨우 서른다섯 살이라는 나이에 데뷔 후 8년간의 작품세계를 개괄하는 대형 멀티미디어 전시를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개최할 정도로 큰 성공을 거뒀다. 그가 창조해낸 ‘크리매스터 사이클’이라는 세계는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기 힘들 정도로 난해하지만 또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매슈 바니에 대한 기대는 여전히 높지만, 크리매스터 사이클에 필적할 만한 대작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판의 규칙을 깨뜨려버리는 말썽꾼 | 마우리치오 카텔란
하는 일마다 실패를 거듭한 학교 부적응자. 마우리치오 카텔란을 설명하는 말들 중 일부다. 그는 심지어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도 않았지만 이제 세계 주요 미술 행사와 미술관에 빠지지 않고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물론 미술시장에서도 고가에 작품이 거래되는 세계적인 아티스트다. 무엇이든 미술이 될 수 있는 시대가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카텔란에게는 물 만난 고기 같았으리라. 무릎 꿇고 기도하는 히틀러, 관 속에 누운 케네디, 운석 조각을 맞고 쓰러진 교황 등 카텔란은 ‘이게 예술인가?’ 싶은 의구심을 일으키는 작품들, 충격적이고 잊을 수 없는 이미지들을 내보이지만 대개의 관객들은 그 앞에서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하지만 일단 웃고 나서 그 뒤에 숨은 사회적 의미들을 곱씹게 하는 묘한 작품들이다(그는 이탈리아 트렌토 대학에서 사회학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여전히 전쟁과 권력, 독재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화제성 짙은 작품들을 내놓고 있다.
존경받는 거장 화가의 알 수 없는 속내 | 재스퍼 존스
미국 국기를 모티프로 한 작품으로 데뷔한 직후부터 미국을 대표하는 아티스트로서 승승장구해온 재스퍼 존스. 그 덕분에 그는 겉보기에는 화려하지 않지만 사실은 무척 여유롭고 호화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지은이는 이를 두고 ‘수도승의 호화로움’이라고 부른다). 그는 알기 쉬운 사람은 아니다. 작품의 의미를 캐내려는 시도는 그를 짜증나게 하고, 그의 작품 방향은 비평적 기대와 어긋나기 일쑤다. 여러 차례 시도한 끝에 겨우 성사된 이 인터뷰에서 지은이는 재스퍼 존스에게서 그간 듣기 어려웠던 가장 내밀한 이야기를 이끌어내려고 노력하고 일부분 성공을 거둔다. 어린 시절부터 이제는 결별했지만 서로 큰 영향을 주고받은 로버트 라우션버그와의 관계, 작업 방식 등 속내를 알기 힘든 거장 아티스트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사랑을 갈구하는 현대미술의 영업사원 | 제프 쿤스
커다란 동물 모양 풍선, 포르노라 해도 무방한 이미지들, 작은 식물들로 이뤄진 거대한 조각상…… 보통은 고고한 미술계에서 마주칠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 것들이다. 거대한 규모의 ‘작업실’을 운영하며 작품들을 공장에서 상품 제조하듯 만들어내는 것을 보고 혹자는 혀를 끌끌 찰지도 모르지만, 사실 그의 작업실에서 만들어지는 ‘예술품’의 엄밀한 완성도를 알게 된다면 그의 예술성에 대해 곧 수긍하게 될지도 모른다. 게다가 장난스런 외양과는 달리 그는 자신의 미술세계가 성스럽고 영적인 의미를 갖추고 있다고 무척이나 진지하게 믿고 있다. MoMA의 티켓 판매원과 주식중개사로 일하던 초년병 시절부터 아티스트로서의 성공, 요란했던 이탈리아 포르노 배우 치치올리나와의 관계와 양육권 소송부터 미술시장의 불황에 따른 추락과 화려한 복귀까지, 이 짧은 전기는 쿤스의 미술세계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옛 거장의 테크닉으로 그린 현대 풍속화 | 존 커린
정교한 유화 테크닉으로 그려낸 포르노 이미지, ‘아름다움과 추함의 공존.’ 두 가지 상충적인 성질이 존 커린의 미술세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한동안 주변부로 밀려나 있던 구상회화는 이제 다시 주류로 복귀했고 그 중심에 커린 같은 화가가 있다. 처음 미술계에 등장했을 때 성차별적인 내용으로 큰 비난을 받기도 했던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길을 두지 않을 수 없는 아름다움을 화면에 구현해낸다. 결국 과거에 그를 비난했던 평론가가 자신의 말을 주워 담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 정도로 말이다. 이제는 미술학교에서도 거의 가르치지 않는 과거의 테크닉을 공부하고 연마함으로써 습득한 기술로 그는 자신이 그려내는 내용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마저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커린은 캘빈 톰킨스를 위해 그를 작업실로 초대해 작업하는 과정을 시연해 보여주고, 이를 톰킨스는 생생히 담아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