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시인이자, 초등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교사인 경종호 시인의 첫 동시집이 출간되었다. 5년 전부터 경종호 시인이 모으고 버리고 쓰고 다듬은 40편의 동시가 담겼다. 아이들이 걷게 될 걸음걸음마다 격려와 박수를 보내고 싶은 시인의 마음이 편편에 걸려 있다.
“그 아이가 열두 살 되던 해, 나는 처음 동시를 쓰기 시작했다”
읽을거리라고는 교과서밖에 없었기에 새 교과서를 받으면 일주일 만에 읽고, 심지어 형과 누나의 교과서까지 읽어 버렸던 초등학생 어린이. 중학교에 입학해서야 도서관을 알게 되고, 책 중에는 소설책도 있고 동화책도 있고 시집도 있다는 것도 알게 되어 수업 시간에도 선생님 몰래 책을 읽던 청소년. 시를 써서 크고 작은 대학문학상을 하나씩 차지해 나가던 대학생 시절을 거치고, 하루하루 아이들과 어울려 지내는 교사가 되었다. 늘 아이들과 함께하던 그가 사십을 훌쩍 넘기고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비로소 동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 첫행에는 열두 살이던 딸이 있었다.
“그 아이가 열두 살 되던 해, 나는 처음 동시를 쓰기 시작했다. 함께하진 못했으나 함께하고 싶었던 순간, 순간들을 동시 속에서나마 꿈꾸곤 했다. 이 동시집은 그런 꿈들이 모인 책이다.”
_<책머리에> 중에서
딸이 지나왔을 시간들을 떠올리고 상상하며, 딸에 대한 바람과 애정을 고백한 것이 경종호 시인의 첫 동시집이다. 열두 살 딸은 시인에게 동시를 쓰게 했고, 동시는 시인의 아픔을 달래 주었다. 삶이 버거워지거나 무언가 사무치게 그리울 때, 슬픔에 절절 절여질 때, 오래된 상처가 자꾸만 돋아나서 더는 아픔을 견디기 힘들 때, 경종호 시인은 시를 찾곤 했다고 한다. 동시 속에서는 사랑을 참거나 감추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되었다.
“방금 네가 발로 툭 찼던 그 돌멩이가”
사랑에서 비롯된 시인의 눈길은 섬세하기만 하다. 봄날 아직 이름도 없는 새싹 하나가 무사히 싹을 틔우기까지의 많고 많은 조력자들을 하나하나 짚어 보기도 하고, 발길에 툭 채인 돌멩이 하나의 역사를 수천 년 전부터 훑어 오기도 하고, 산길에 떨어진 알맹이 빠진 밤송이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틀니 빠진 웃음을 떠올리기도 한다.
어느 석상의 복숭아뼈였는지도 몰라
물속 송사리의 보금자리였을 수도 있고
생쥐가 낮잠 잘 때 베던 베개인지도 몰라
(중략)
어쩌면 네가 태어나기 전, 은하계에서 날아온 별 조각일 수도 있어
그러다 어느 집 돌담, 울타리가 되어 주기도 하고
소원탑, 어느 할머니가 소원을 빌며 올렸던 그 돌멩일 수도 있지
방금 네가
어, 친구 왔네 하면서
발로 툭 찼던 그 돌멩이가
-<돌멩이> 부분
하잘것없고, 하잘것없고, 하잘것없어 보이는 존재에서도 시인은 신성을 찾아내서 들려준다. 그리고 그것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 주고, 묵묵히 지켜보고, 세세하게 기억하며, 말없이 손 내밀어 준다. 동시를 쓰며 시인 자신이 위로 받은 만큼, 그의 동시를 읽는 아이들, 아이를 가슴에 품고 있는 어른들까지 큰 품으로 안아 들인다.
나비 한 마리 방 안으로 들어왔다.
꽃 한 송이 없는 방, 거울이
얼른 창밖 백일홍을 비춰 준다.
—「미안해서」 전문
“애들이나 놀게 혀”
학교에 출근을 하면 경종호는 또 딸과 아들 들을 만난다. 그 아이들은 숙제로 내준 일기쓰기를 귀찮아하며 한 줄짜리 두 줄짜리 동시로 대신하는 꾀를 냈고, 그 글의 맞춤법과 문장 구조는 엄청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해석이 가능했지만, 경종호 시인은 아이들의 글을 보는 것이 좋았다. 이 아이들처럼 세상을 자유롭게 바라보지 못할 거라며, 멋진 상상을 할 수 없을 거라며 어른 경종호의 자신감을 떨어뜨린 적도 많았지만, 어쨌거나 즐거웠고 그의 동시에 밑거름이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밥 11공기 국 7그릇 김치 1포기 물 12컵 라면 3개 컵라면 1개 핫바 3개 삼겹살 2인분 계란 7개 복숭아 3개 포도 2송이 아이스크림 4개 내 배 속엔 지금 이 모든 것이 들어 있다.
무섭지!
_ <변비> 전문
아이들이 직접 쓴 글이 경종호 동시의 교사였기에 그의 동시는 어른들은 짐작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천연덕스럽게 그려낸다. 그의 동시는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것이 분명하지만, 잘못을 지적하거나 정정해 주거나 야단치며 교화하려는 교사의 모습을 취하지는 않는다. “그 밭은 그늘져서 아무것도 안 커. 애들이나 놀게 혀.”라는 <텃밭> 할머니의 말은 정작 경종호 시인이, 아이들 곁의 어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일 것이다. “가까이에서 지켜봐 주면서도 섣불리 개입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경종호 시인의 교육철학이자 그가 생각하는 동시와 어린이 독자 사이의 적정 거리인 것이다.”라고 이안 시인이 말한 것은 그런 까닭이다.
“놓고 온 아이의 손을 더듬어 꼭 잡고”
아이들의 세계에도 위험요소는 넘치고 아이들 앞에 펼쳐질 세계는 비정하기 그지없다. <새싹 하나가 나기까지는> <도시에 이사 오는 새들을 위한 안내서> <수학 괴물> <오늘 성적표가 한 일> 같은 시에서 보이듯이 탄생의 순간부터 우여곡절 속에서 시작해 파란만장하게 살아가야 할 많은 생명들을 경종호 시인은 한눈으로, 혹은 곁눈질로만 바라보지 않지만, 그렇다고 무겁게만 그려내지도 않는다. 능청스럽게 눙치기도 하고 너스레를 떨기도 하고 뻥을 치기도 하며 유머를 잃지 않는다. 그려그려, 옳지 잘한다며 쓰다듬어 주던 할아버지 혹은 할머니의 투박한 손길이 오래도록 등허리에 남듯, 긴 여운을 우리에게 남긴다. <텃밭>의 할머니들처럼 거친 길을 혹독하게 이미 지나왔기에 어느 때에나 부드러울 수 있는 진짜 어른의 여유로 어린 독자들을 격려해 주는 마음이 전해진다.
“경종호 시인은 온전한 앎 가까이, 근원 또는 기원 가까이 어린이 독자를 데려가고자 한다. 어른이 되느라 아이 적의 것을 놓아두고 떠나왔으나 그 시절의 빛을, 놓고 온 아이의 손을 더듬어 되찾아 이제부터는 손 꼭 잡고 걸어가리라는 마음으로.” _ 이안
동시를 쓰는 경종호에게는 ‘이렇게 살게 해 준’ 가족이 있었고, 모든 평범한 일상의 순간들을 시로 만들어 주는 아이들이 있었고, 깐깐한 시인들이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 시인들은 안이해지려는 순간마다, 정신이 번쩍 들게 해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다음 동시는 그의 바람대로 틀에 얽매이지 않기를, 자유스러운 상상을 펼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