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 관해 말한다는 건 누구의 것이 되었건 부질없다는 점에서 자명하지만
그러나 말하지 않으면 맴돌지도 않는 법이다.”
시의 뼈와 시의 허물을 연주하는 시인
조연호의 시에 관한 아포리즘
『악기惡記』
한국 시단에서 난해하기로 으뜸가는 시인을 하나 대보라 할 때 이구동성으로 발음할 이름이 바로 이이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조연호라는 시인. 특이한 시를 써서가 아니라 특별한 시를 써서 후배들에게는 열광을, 선배들에게는 절망을 수소폭탄처럼 안겨왔던 시인. 우리 시가 우리 시어로 얼마만큼 멀리 갈 수 있는지, 얼마만큼 넓어질 수 있는지, 얼마만큼 깊어질 수 있는지 참으로 놀랄 만한 성과 이상의 가능성으로 우리 시단의 외연과 내연 확장에 큰 공을 세운 시인. 정작 그는 묵묵히 제 시 속에 던져져 있느라 충분히 외로웠겠으나 그의 시를 읽고 자기 시를 만지는 시인들에게나 그의 시를 읽으며 자기감정을 추스르는 독자들에게는 때론 치즈덩어리로 때론 양념장으로 때론 쌀알로 때론 생선대가리로 그 쓰임의 본새를 다양하게 변화시켜 배를 부르게 해온 것이 사실이렷다.
사설이 길었다. 조연호라는 시인 얘기를 할라치면 늘 이렇다. 그의 글쓰기에 대해 말할 자리에서 꼭 이렇게 내가 받은 영향으로 내 안팎의 호들갑을 떠들어대게 되니, 조연호라는 기원 아래 조연호라는 계절 아래 한국 시단의 사시사철은 변화무쌍하게 흘러온 것이 분명할 테다.
그리고 오늘 여기 그의 신작 산문집을 하나 건넨다. 199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이후 『암흑향』 『농경시』 『천문』 『저녁의 기원』 『죽음에 이르는 계절』등의 시집을 펴낸 바 있는 조연호 시인의『악기惡記』는 『행복한 난청』에 이은 그의 두번째 산문집으로 ‘시에 관한 아포리즘’이라는 부제에서 엿볼 수 있듯 그가 ‘시’를 떠올리는 순간 그의 온몸을 투과하여 종이에 내려앉은 시에 관한 단상들을 그만의 특유의 문체로 그 어떤 장애나 망설임 없이 자유자재로 늘어놓은 책이다. 그렇다보니 일관된 형식도 없고 계산된 짜임도 없다. 기계식에 계량식이 아니니 때론 너무 뾰족하기도 하고 때론 너무 투박하기도 한데 그 울퉁불퉁함이 그 크고 작음이 그 다짜고짜 스타일로 던져진 제각각의 시 이야기들이 무럭무럭 자연을 뜯어먹고 크는 아이들처럼 일견 건강하게도 느껴지는 바이다.
물론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한 권의 책을 다 읽었음에도 그 안에 내재된 한 줄의 문장이 끝끝내 이해되지 못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그럼에도 조연호의 글은 흡수하면 좋겠지만 흡입해도 좋을 어떤 산소라서 마셨다는 그 행위만으로도 마셨다는 그 기억만으로도 피를 맑게 굴려주는 재활의 필터를 가졌다. 그는 불명확한 세상사는 불명확하게, 어리둥절한 세상사는 어리둥절하게, 그때그때 처한 상황에 따라 몸과 정신이 솔직함을 담보로 쓰이고 읽혀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사유와 말법을 가진 아이들 중에 이런 아이가 어딘가에 꼭 있곤 하지 않았던가. 아이의 말은 온전히 해석할 수가 없고 또 완전히 해석될 수가 없다는 가정 하에 그 자유가 통용되는데 이때 그 순진함과 천진성이 조연호의 그것과 닮은 듯도 하다.
기억들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신춘문예에 당선됐을 때의 심사평은 다음과 같았다. “조연호의 시는 환상과 언어를 긴밀히 엮어냄으로써, 환상에 삶으로서의 깊이와 무게를 얹어주고 있다. 살아서, 삶 속에서 유효하게 가동되는 환상의 모습은 아름답고, 그 아름다움은 더이상 환상의 영역에만 머무는 아름다움이 아닐 것이다.”
이해의 국면을 놔버린 채 뜰채로 그의 글을 건졌을 때 그물망 위로 팔딱이는 그것, 생선비늘일 수도 있고 물로 비누질을 한 돌멩이일 수도 있고 깨진 유리조각일 수도 있는 반짝이는 그것, 설상 그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끝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해도 그 아름다움은, 거기 그렇게 일순 빛이었던 눈부심은 분위기로 남는다. 말하자면 그 뉘앙스를 좇는 것, 끊임없이 실패를 거듭함에도 여러 맥락 속에서 그 말맛 속에서 가장 엇비슷한 그 무언가를 되새겨가며 그나마 닮은 세상을 향해보는 것, 그것이 우리가 조연호의 문학을 읽어야 하는 당위이지 않을까.
시와 에세이라는 일반적인 장르의 경계가 있다면 조연호는 필시 지우는 자이다. 혹은 낙서하는 자이다. 서로 침투하고 침입하면서 이뤄낸 그 한 덩어리의 던져짐, 그 자체로 존재하는 데 있어 그의 글쓰기는 어떤 새로움이고 어떤 능청스러움이고 어떤 고집이다. 그가 권하는, 향유하는 시를 우리가 알고 모르는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다만 그의 글 속으로 깊이 침잠할 때 더욱 또렷해지는 나를 볼 수 있다는 것, 우리가 『악기惡記』를 통해 가질 수 있는 소득을 굳이 찾아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