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초기 에도로 떠나는 여행
센고쿠 시대 무장들의 식물 사랑법은 어떠했는가?
식물학의 관점에서 무장, 무사들과 식물의 관계를 풀어나가다
책 소개
이 책은 흥미롭게도 식물을 주제 삼아 에도(오늘날의 도쿄)의 역사를 조명한다. 에도가 어떤 곳인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막부가 들어선 일본 수도로 무장, 무사들이 세운 도시다. 사실 습지가 많은 에도는 특유의 자연환경이 먹거리와 취미활동까지 결정지을 만큼 온갖 식물들의 근거지였다. 그런 까닭에 무장과 무사들이 자신들의 근육과 힘을 키우는 한편 꽃 가꾸기를 통해 마음까지 다스렸던 곳이 바로 에도다. 잡초생태학을 전공한 저자의 이 책은 바로 ‘무장’과 ‘식물’을 두 축 삼아 근대 에도의 ‘폭력’과 ‘미학’을 들여다본다.
예를 들어보자. 센고쿠 시대의 혁명아로 이름을 떨친 오다 노부나가는 의외로 꽃을 사랑했다. 막대한 재력과 권력으로 천하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화려한 취향을 좋아해 대규모 꽃놀이를 열곤 했으며 임종 직전에는 벚꽃 감상을 강렬히 원했다. 센고쿠 시대를 끝내고 태평시대의 기초를 닦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의 전용 약초원을 가꿀 만큼 ‘식물 마니아’였다. 이에야스는 식물에 관한 한 천하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무장들은 전쟁터에서나 평소 생활하면서나 식물을 능숙하게 이용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처지로 전쟁과 권력투쟁에 날을 지새웠던 무장들은 놀랍게도 섬세한 눈길로 식물을 들여다보았다. 그들은 싸움을 하거나 성을 쌓는 데 식물을 이용했고, 농업과 자신의 영지를 경영하는 데도 활용했다. 위대한 ‘식물학자’인 무장들에게 식물은 무기이자 전략 물자였던 셈이다.
이에야스가 세운 식물도시, 에도
오다와라 정벌로 인해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에도로 좌천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해 굴욕의 땅 에도에서 막부를 열었다. 에도를 택한 이유로는 여러 가지를 짐작해볼 수 있다. 가령 가마쿠라 막부를 의식한 것일 수도 있고, 방어를 위해 서쪽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을 수도 있다. 또 수로를 통한 운송에 유리하고 교통의 요충지였다는 점도 이에야스가 에도를 택한 까닭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를 댄다 해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에 드넓게 퍼져 있는 습지를 개발해 개척지로서의 가능성을 간파했다. 그는 에도 만으로 향하던 도네 강의 흐름을 동쪽으로 돌려 태평양으로 흐르게 했고 도네 강이 흐르던 습지대에 광대한 농경지를 일궈 곡창지대로 탈바꿈시켰다.
이에야스가 에도로 옮기기 전까지 에도 동쪽은 갈대가 무성한 저지대 습지였고, 서쪽은 억새풀이 가득한 황량한 땅이었다. 즉 에도는 후지 산 화산재가 퇴적되어 만들어진 서쪽의 무사시노 대지와 바다 쪽에 접해 있는 저지대 습지인 도쿄 저지로 크게 나뉜다. 고지대인 탓에 물이 없고 메마른 화산재 토양으로 이뤄진 무사시노 대지에는 원래 억새풀이 무성했다. 그리고 낮은 저지에는 물이 고여 있어 습지성 식물이 잘 자랐다. 이처럼 대지와 저지가 뒤엉켜 있던 변방에 이에야스는 하천 개수改修와 함께 저지대를 매립하고 대지에는 물을 끌어들여 에도 개발을 이뤄냈다.
에도 사람들에게 대지에서 자라는 억새나 습지에서 자라는 갈대는 단순한 잡초가 아니었다. 둘은 그 옛날 귀중한 자원으로, 억새를 구하기 힘든 가난한 집에서는 볏짚을 엮어 지붕을 만들었다. 억새는 또한 가축의 먹이나 밭의 비료로 활용되었기 때문에 옛날에는 경쟁적으로 억새를 베었다. 처음에 벤 억새는 영주에게 상납하는 중요한 물품이었다. 줄기 속이 비어 있는 가벼운 갈대는 발을 만드는 재료로 활용되었다. 이처럼 억새와 갈대로 이루어진 에도는 힘겨운 시절 두 잡초 같은 풀로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소나무, 대나무, 고사리, 토란은 군사용 식물
일본의 성들에는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길하다고 여겨지는 소나무의 상징 때문일까?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성에 소나무를 심은 목적이 그것일 리는 없다. 결코 장식을 위함이 아닌 다른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성은 원래 방어 기능에 중점을 둔 군사시설이다. 전투가 벌어지면 성안 사람들은 그 안에 틀어박혀 며칠이고 견뎠으며, 적 또한 성을 정면에서 공략하기보다 식량 공급 루트를 차단하는 전법을 썼다. 성 쪽에서도 비상식량을 준비해두었는데, 그것이 바로 소나무였다.
소나무는 수지(나무의 진)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 소나무 껍질을 벗기면 속에 하얗고 얇은 껍질이 있는데, 여기엔 지방분과 단백질이 함유되어 있다. 이 껍질을 절구로 찧은 뒤 물에 담가 쓴맛을 빼고 말려서 가루로 만들었으며, 여기에 쌀을 보태 떡을 만들었다. 바로 송기떡이다. 소나무의 지방분은 연료가 되기도 했다. 즉 식량과 연료 보장을 위해 심게 된 나무였던 셈이다. 더욱이 소나무의 지방은 부상 입은 병사들의 지혈제로도 이용돼 완전한 군사용 식물이라고 할 수 있다.
대나무는 어떤가? 세키가하라 전투 때 후쿠오카 번의 초대 번주였던 구로다 나가사마의 경우를 보자. 후쿠오카 성에는 다몬 야구라多聞櫨라는 무기고가 아직도 남아 있는데, 이 야구라의 벽재는 대나무로 엮여 있다. 전쟁이 일어나면 이 대나무를 이용해 활로 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대나무를 엮고 있는 것도 단순한 끈이 아니라 놀랍게도 고사리다. 말린 고사리는 물에 불리면 식량이 된다. 즉, 긴급 시의 식량으로 고사리를 숨겨놓았던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의 계승자인 가토 기요마사는 구마모토 성을 축성한 인물이다. 견고한 이 성은 전투에 이용되는 일이 없다가 1877년 다카모리가 이끄는 사쓰마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그런데 사쓰마군 1만4000명이 근대화된 무기로 포격을 퍼붓던 중에도 구마모토 성은 50일에 걸친 공격을 견뎌냈으며 단 한 명의 병사가 침입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가토 기요마사는 이 성을 축성할 때 다다미의 심으로 짚 대신 토란 줄기를 사용했다고 한다. ‘즈이키’라 불린 토란 줄기는 일종의 ‘보존식’이 된다. 게다가 토벽의 이음매로도 짚 대신 토란 줄기를 섞어넣었고, 벽에는 박으로 만든 박고지를 발라넣었다고 한다. 또한 구마모토 하면 가라시렌콘이 유명한데, 연근도 그 연원을 밝혀보면 구마모토 성의 해자에 비상식량으로 재배되고 있었다. 구마모토 성은 도처에 구황식물이 숨겨져 있던, 먹을 수 있는 성이었던 셈이다.
현미와 된장이 키운 군사력
무거운 갑옷을 걸치고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칼과 창을 휘두른 무사들의 주식은 무엇이었을까? 예상외로 그들은 쌀과 된장으로 체력을 다졌다. 그것도 하루에 두 끼만 먹었다. 그러나 먹는 양은 대단했다. 하루에 쌀 5홉(약 900밀리리터, 당시 일반인은 한 끼에 약 1홉의 쌀을 먹었다)을 먹었다고 한다. 거기에 야채가 들어간 된장국을 곁들였다. 평상시에는 5홉이지만 전투가 벌어지면 쌀 한 되(10홉)가 지급되었다. 쌀 10홉의 열량은 5200킬로칼로리에 달하는데, 이것이 바로 센고쿠 시대 무장들이 지닌 ‘힘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무사들이 먹었던 것은 백미가 아닌 현미였다. 현미는 오늘날 건강식으로 꼽히지만, 센고쿠 시대에는 정미 기술이 아직 발달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현미를 먹었다. 특히 현미는 소화가 잘 안 된다는 결점이 있었는데, 이를 보완해주는 것이 된장이었다. 된장 속에는 효모균과 유산균, 효소 등 현미를 분해해 위장의 소화 흡수를 돕는 성분이 함유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미와 된장을 중심으로 한 식사는 쌀과 콩뿐, 고기나 생선 등의 동물성 단백질이 결여되어 있었다. 물론 가끔씩 생선을 먹기도 했겠지만 어쨌든 이들 무장의 식사는 완전히 ‘초식계’였는데, 어떻게 힘의 근원이 되는 고기를 먹지 않고도 무거운 갑옷을 입고 싸울 수 있었을까. 센고쿠 시대 무사들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즉, 옛날 일본인들은 쌀과 야채를 먹었을 뿐이지만 장내 세균으로 단백질을 합성할 수 있는 체질이 아니었나 하고 추측된다. 장내 세균의 구조가 오늘날의 사람들과는 전혀 달랐으리라 보는 것이다.
식물 마니아 도쿠가와 이에야스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난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의 염원인 세이이타이 쇼군에 올라 에도 막부를 열었다. 그러나 불과 2년 뒤 그는 셋째 아들 히데타다에게 쇼군 직을 물려준다. 도쿠가와의 세습을 세상에 널리 알려 자신의 가문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쇼군에서 물러난 이에야스는 슨푸로 내려가 칩거했지만 막부의 실권은 계속 쥐면서 이른바 ‘오고쇼大御所 정치’를 했다. 태평성대가 이어지면서 이에야스는 평온한 나날을 보내는데, 이때 그가 건강 유지를 위해 만들었던 것이 약초원이다.
에도에는 막부가 만든 고이시카와 식물원이 있지만 이것은 5대 쇼군인 쓰나요시 시대에 지어졌다. 이에야스의 약초원은 이보다 훨씬 더 오래전에 문을 연 것이다. 실제 이에야스는 ‘약초 마니아’로 잘 알려져 있다. 슨푸에 은거한 뒤부터는 약초원에서 재배한 약초로 직접 약을 조제할 정도였다. 이에야스가 편찬한 식물과 약에 관한 고문서에는 거의 학자 수준에 필적하는 상당한 지식이 담겨 있다. 이 슨푸의 약초원을 쓰나요시가 고이시카와로 이전하고, 8대 쇼군인 요시무네가 고이시카와 약초원(현재의 도쿄대 부속 식물원)으로 정비한 것이다.
이에야스는 슨푸에 복숭아나무를 심고 귤나무도 심었지만 어쨌든 그가 가장 좋아한 식물 중 하나는 가지였다. 가지는 정월 꿈에 나오면 길하다고 여긴 고급 음식이어서, 첫 수확한 가지 한두 개는 다이묘가 쇼군에게 바치는 물건이었다. 이에야스의 사랑을 받은 가지는 미호 반도의 명산지 오리도에서 생산된 것이었다. 에도 시대에는 한 그루 한 그루 정성을 쏟아 기른 오리도 가지의 재배가 많이 이뤄졌다.
이에야스의 열 번째 아들로 기슈도쿠가와의 시조가 된 도쿠가와 요리노부는 스루가에서 가지 속성재배 기술을 가져와 기슈에 보급했다. 그리고 기슈에 들여온 오리도 가지가 나중에 기슈 가지가 되었고, 이어 기슈에서 교토의 가미가모 신사에 봉납되면서 가모 가지가 된 것으로 보인다. 오리도 가지는 대대로 쇼군 가문에 바쳐졌다.
무사가 아낀 식물, 벚꽃의 진실
‘꽃은 벚나무, 사람은 무사’란 말이 있다. 꽃은 질 때 산산이 흩날리는 벚꽃이 가장 아름답고, 사람은 벚꽃처럼 질 때(죽을 때)가 아름다워야 가장 훌륭한 무사라는 의미다. 무사의 삶과 죽는 모습은 때로 벚꽃에 비유된다.
일본인은 희한하게도 벚꽃을 좋아했고, 무사 역시 벚꽃을 사랑했다. 왜일까? 벚꽃은 늘 벼농사가 시작될 때 피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벚꽃에서 ‘벼농사 신神’의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벚꽃의 일본 말 ‘사쿠라’의 ‘사さ’는 밭의 신을 의미하는 말이다. 가마쿠라 시대가 되자 무사들도 귀족이 사랑했던 벚꽃을 감상하게 되었다. 항상 죽음에 맞서 싸워야 하는 무사들은 벚꽃이 지는 모습을 보고 “참으로 아름답다”며 감성적으로 받아들였다.
12세기 말 미나모토 가문과 다이라 가문이 격돌한 전쟁 ‘겐페이갓센’을 기록한 『헤이케모노가타리』에는 벚꽃을 노래한 와카가 몇 수 실려 있다. 그 와카들은 대개 무념무상을 반영했다. 아름답게 핀 벚꽃에서 허무함을 느끼거나, 지는 벚꽃을 아름답다고 노래했다.
센고쿠 시대에 이르러 무장들은 아름답게 지는 벚꽃의 무상함에서 무사의 미학을 찾게 되었다. 다케다 신겐은 “나란히 피어 있는 벚꽃도, 천 년 동안 변하지 않는 소나무와 비교하면 덧없도다”라고 노래했고,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멸망시킨 오다 노부나가는 “지금은 강의 흐름도 끊겨, 천 그루의 벚나무도 지고 말았도다”라며 시대의 변화를 벚꽃에 비유했다.
귀족 문화에서 무사의 문화로 옮겨간 벚꽃. 가마쿠라 시대에는 막부가 있던 가마쿠라에 벚꽃 명소가 만들어졌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4년 요시노 산에서 다이묘 이하 5000명을 모아놓고 ‘요시노 산 벚꽃놀이’를 화려하고 성대하게 열었다. 또 1598년에는 교토의 다이고 사에서 ‘다이고 벚꽃놀이’를 개최했다. 요시노 산에서 벚꽃놀이가 열린 이유는 화려함을 좋아하는 히데요시의 취향과 함께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출병한 병사들의 기분 전환을 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아름다운 벚꽃은 몇 년이고 봄이 돌아와도 질리지 않을 것이다. 나의 영화도 이 벚꽃의 아름다움처럼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이것이 다이고 벚꽃놀이에서 히데요시가 불렀던 노래다. 변하지 않는 벚꽃의 아름다움에 히데요시 가문의 영원한 봄을 기원했던 것이다. 이 벚꽃놀이가 열린 지 불과 두 달 뒤 히데요시는 병으로 쓰러지고,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히데요시가 영원한 봄을 노래했던 다이고 벚꽃놀이가 열린 지 17년 뒤인 1615년 히데요시의 바람과는 달리 ‘오사카 여름의 진’ 싸움에서 패한 히데요시 가문은 멸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열었던 연회는 훗날 벚꽃놀이가 일본인의 축제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된다.
식물을 사랑하는 원예가가 된 무사들
센고쿠 시대의 무사들은 분재를 사랑했다. 매일 계속되는 싸움 속에서 그들은 식물을 통해 ‘힐링’을 했던 것이다. 식물에 대해 한번 생겨난 친근감은 평화로운 시기에도 지속돼 에도 시대에는 무사들에게 원예 붐을 일으켰다. 원예 붐이 지탱되려면 식물에 대해 풍부한 지식을 보유한 이들이 필요했는데, 이들 인재 배출의 기초가 된 것은 바로 에도에 세워진 다이묘의 저택이었다.
영지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은 성이다. 그러나 에도에서는 훌륭한 성을 과시할 수 없어 쇼군으로부터 하사받은 다이묘 저택에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어 자신의 권위를 드러냈다. 특히 여러 번의 다이묘 저택이 있어 아름다운 정원 꾸미기는 경쟁적으로 이뤄졌다.
당시 에도의 토지 이용 실태를 살펴보면 다이묘 저택과 그 가신들의 집 등 무사들이 차지한 땅은 70퍼센트에 달했다. 즉 에도는 거대한 정원도시였던 것이다. 이 정원을 만들고 유지·관리하기 위해 식목, 조경 전문가들이 에도로 모여들었다. 뿐만 아니라 원예가를 무색케 할 정도로 식물 지식에 통달한 무사들이 에도의 원예 붐을 이끌었다. 태평한 시기, 무사들에게는 비번인 날이 많았고, 그들이 할 일이라곤 한정돼 있었다. 그런 까닭에 무사들은 원예에 힘썼고, 거기서 나오는 부수입을 챙겼다.
자존심 강한 무사들이 원예에 힘쓴 것은 다소 의외인데, 어쨌든 쇼군이 꽃을 좋아했기 때문에 원예는 무사의 ‘교양’으로 여겨졌다. 가령 이에야스는 에도에 막부를 열자 성안에 ‘전용 꽃밭’을 마련하고 식물을 수집했는데, 이것이 에도 원예의 시초다. 2대 쇼군 히데타다와 3대 쇼군 이에미쓰도 꽃을 사랑했다. 쇼군이 꽃을 좋아하면 그 아래 다이묘들도 취미를 쇼군에 맞춰야 했다. 즉 꽃을 좋아하는 도쿠가와 가문의 쇼군을 위해 각 번은 진귀한 식물을 재배하고 이를 갖다 바쳤다. 그리고 각 번에서는 소속 무사들의 교양과 정신 수양을 위해 적극적으로 원예를 장려했다. 이러한 무가의 원예 붐이 서서히 상인과 일반 주민에게로 확산되면서 에도 시대에 원예 붐이 뜨겁게 일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