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그러나 엄연히 존재하는
‘이해 저편의 세계’가 현현顯現하는 곳
북미 인디언의 땅으로 떠나는 여행
수십 년의 시공간을 넘어,
사라진 두 인디언 소녀를 찾아서
미네소타 주 레드레이크 원주민 보호구역에서 오지브와족, 라코타족 등 여러 원주민과 어울려 지내던 저자 켄트 너번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과 교류하며 보고 듣고 경험한 일들을 몇 권의 책으로 펴냈다. 당연하게도, 그는 인디언과 대화를 나누는 법,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는 법, ‘백인처럼 굴지 않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또 그들이 꿈의 대화에 응답할 줄 안다는 사실도. 어느 봄부턴가, 의미를 알 수 없는 꿈이 너번에게 찾아든다. 꿈은 어딘지 비범했고, 현실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생생했다. 그리고 늘 같은 내용으로 반복되었다. 꿈에서 오지브와족 원로 메리는 너번을 찾아와 웃음 지으며 ‘노랑새’를 가리킨다. 노랑새는 너번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하며 사라진다.
노랑새는 너번이 오랫동안 알고 지낸 라코타족 원로 댄의 여동생이다. 댄에게서 오래전 사라진 여동생을 수소문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던 데다, 메리에게 마음속으로 빚을 지기도 했던 너번은 반복되는 꿈의 끝에, 꿈속에 나타난 메리를 찾아가보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녀의 손녀 도나에게서 뜻밖의 부고를 전해듣는다. 메리가 그에게 남긴 긴 편지가 담긴 노트와 함께. 편지는 노랑새에 관한 것이었다. 노랑새와 같은 인디언 기숙학교에서 지냈던 메리는, 소녀가 그곳에서 겪은 일들, 생전에는 차마 너번에게 털어놓을 수 없었던 일들에 관해 조심스럽게, 그러나 진심을 담아 차근차근 적어 내려갔다.
“이따금 세라(노랑새)는 손 위에 새를 불러들여 새와 이야기를 주고받곤 했어요. 사제들과 수녀들은 이런 영혼의 교류를 탐탁지 않게 여겼습니다. 세라를 내보내려 했지요. 세라가 두려웠던 겁니다. 세라의 힘이 싫었던 거예요. 세라를 백인 가족에게 보내려고 했지만 흔쾌히 받아들이는 가족이 없었습니다. 일반적인 단어로는 말할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아이를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 어린 세라가 사라졌습니다. 나쁜 영혼에 씐 인디언을 가두는 감옥이 사우스다코타 주 어딘가에 있는데, 거기로 데려갔다더군요.”
메리는 여기까지의 이야기와 함께 다른 인디언 사내의 이름을 남기고 글을 마쳤다. ‘나쁜 영혼에 씐 인디언’을 가두었다는 곳에 함께 있었다던, 오지브와족 소년 베나이스였다.
베나이스가 그곳에 끌려간 이유는 부족의 오래된 풍습과 전통 의식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베나이스는 학교에 보내져 기독교를 배우기를 강요당했고, 채찍질을 당하면서도 그를 거부하며 부족의 풍습을 지키려 노력했다. 그 결과는 인디언 정신병원에 보내져 그곳이 폐쇄될 때까지 갇혀 지내는 것이었다. 이제는 노인이 된 베나이스는 열두 살까지의 그 끔찍한 경험을 너번에게 들려준다. 또 너번이 찾는 노랑새에 관해서도. “슬픈 얼굴의 여자아이”였던 노랑새는 늘 혼자였고, 넘을 수 없는 장벽 너머의 언덕들을 공허한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너번은 정신병원에 관해 계속해서 수소문하던 중, 그곳에서 일했던 한 여성의 손녀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또 다른 어두운 과거에 대해 듣게 된다. “환자 중에는 자기 부족 출신이 아무도 없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런 사람들은 누구와도 대화할 수 없었죠. 대부분 그저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거나 울고 또 울었답니다. 병원장은 타 지역에서 방문자들을 데려다가 그곳 사람들을 구경시키기도 했다더군요. 마치 동물원의 동물처럼 말이죠. (…) 그곳에서 태어난 아기 이야기를 들려주신 적도 있어요. 남녀를 따로 수용하긴 했지만 가끔은 통제를 벗어나는 경우도 잇는 법이니까요. 병원에서는 아기에게 이름도 지어주지 않은 채 거기 두었대요. 부모가 정신병자면 아기도 정신병자일 거라는 이유였죠. 아기는 얼마못가 죽었다고 들었어요.”
메리의 가슴 아픈 노트, 두 사람의 믿기 어려운 증언을 ‘노랑새’의 오빠인 댄에게 어떻게 전해야 할까. 고민을 거듭하던 너번은 댄과 가깝게 지내던 원주민 위노나와 그로버를 먼저 찾아간 뒤, 댄에게 소식을 전하기로 한다. 그 길에는 또 한 명의 인디언 점보, 그리고 길에서 만난 유기견 페스터스도 함께한다. 그리고 너번의 곁에는 언젠가부터 비범한 기운을 풍기는 들소 한 마리가 서성인다.
마침내 댄에게 꿈과 노랑새에 대해 들려주던 너번과 그 이야기를 전해 듣던 댄은, 이제까지의 모든 일을 하나로 꿰어낼 실마리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 실마리는 ‘지’라고 불린 작은 소녀에게 쥐어져 있다. 오래전 사라진 노랑새와 생김새부터 행동거지까지 놀랍도록 닮아 있는 소녀는, 노랑새가 그랬듯 병원으로 보내질 위기에 처해 있다. 어느 날, 숲 속으로 사라진 소녀. 그리고 그녀를 찾아나서는 너번과 원주민 친구들. 이들은 소녀를 무사히 되찾을 수 있을까? 소녀는 동물과 대화하고, 돌의 소리를 듣는 능력을 지닌 채,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을까?
두 겹의 세계 - 인디언의 과학
이 책의 제목인 『들소에게 노래를 불러준 소녀』는 그 내용을 모르고 읽을 때 언뜻 신비롭고 낭만적인, 그러나 조금도 그 이상은 못 되는 흔한 인디언 세계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인디언 잠언집이나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 익히 보아왔던, 이야깃거리 혹은 신기한 구경거리일 따름이리라고 쉽게 생각해버릴 수 있겠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책은 문자 그대로 ‘들소에게’ ‘노래를 불러준 소녀’에 관한 이야기다. 그것은 환상도, 미화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기록이어서 오히려 더 두려운 ‘진실’로 다가온다.
원주민의 삶에 관한 우리의 이해에서 매우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사회적 통설, 오해, 고정관념을 걷어내면 여느 세계의 것과는 다르고 꿋꿋한 심장박동을 지닌 하나의 세계가 모습을 드러낸다. 서구적 관념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우리는 꿈으로 대화가 가능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꿈은 그저 꿈일 뿐이다. 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도 여기지 않는다. 돌은 살아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깊고 어두운 산속에서 만난 커다란 짐승은 두려움의 대상일 뿐이다. 우리는 짐승과 대화할 수 없다. 현대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이 사실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의 믿음 안에서는. 하지만 그 믿음이 고작 세계의 일부밖에 아니라면 어떨까?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차원의 현상은 결코 우리의 믿음 안에만 머무는 법이 없다. 한 사람이 평생에 걸쳐 얻을 수 있는 지혜, 그리고 그 지혜가 백 세대에 걸쳐 축적되어 자리 잡은 섭리……. 어떤 세계에서는 이런 것들이 온도계의 눈금이나 일기예보보다 더 절대적인 의미를 띠기도 하는 것이다.
잠식해오는 서구 문명과 전통 사이에서의 혼란과 두려움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던 북미 원주민 대다수에게 이런 “두 겹의 세계”는 낯설지 않다. “사람은 이해력을 벗어나는 뭔가를 맞닥뜨리면 그런 반응을 보이게 마련이라네. 겁을 집어먹고 혼란에 빠지는 거야. 우리 인디언들은 그게 어떤 기분인지 알지. 백인들이 우리 땅에 들어왔을 때 똑같은 기분을 느꼈으니까.” 오래된 풍습에 대한 두려움, 새로운 문물에 대한 두려움, 이해할 수 없는 두 세계의 간극에 대한 두려움……. 어느 쪽으로 갈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 양쪽에서 영혼을 끌어당기는 경험. 이제껏 원주민이 주로 겪어야 했던 이 혼란의 감정은 정반대의 세계에서 살아오다 인디언의 세계에 깊게 침윤한 너번에게도 어김없이 일어난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너번은 뭔가를 보았고, 뭔가를 들었다.
“물리학의 법칙에 어긋나잖아요.” 너번 역시 자신의 믿음을 벗어난 듯 보이는 일들을 쉽게 불가해의 영역으로 치워버리려 한다. 인디언 원로 댄은 오랜 침묵 끝에 너번에게 묻는다. 원주민들이 무슨 이유로 그런 끔찍한 곳에 갇혀야 했겠느냐고. “저와는 다른 세계의 일”이라고 답하는 너번의 두려움을 읽은 그는, 고개를 저으며 “자네가 겁내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자네 세계의 일이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그것은 우리가 사는 세계의 일이다.
한편 우리는 이해하지 못한 것들을 손쉽게 전유하기도 한다. 케임브리지 영어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문화 전유cultural appropriation란 “자신이 속하지 않은 문화에서 무언가를 가져오거나 사용하는 행위”를 지칭한다. 여기에는 한마디 부연이 덧붙여져 있다. “특히 그 문화에 대한 이해나 존중을 보이지 않은 채.” 소수 문화, 약소 문화에 대한 전유가 더 빈번하게 발생하는 영미문화권에서 타문화의 전유는 대개 어떤 식으로든 ‘해롭거나 폭력적’이라는 비난에 직면한다. 이 책은 우리가 낯선 문화를 접하는 방식, 특히 그 편협함과 안이함을 ‘그 문화의 주인’들의 입을 통해 들려준다. 그들의 입을 통해 듣는 우리 자신의 모습은 그야말로 부끄럽기 이를 데 없다.
너번과 그의 원주민 친구 그로버도 ‘북미 원주민 주술 공예점’이라고 간판을 내건 상점에 들어섰다. 상점 안은 드림캐처와 티베트 번, 거북이 등껍질로 만든 딸랑이, 담뱃대와 허브 다발, 향모 묶음 등 흔해빠진 기념품들로 가득하다. 짐짓 무례하게, 가게의 허브 다발을 싸그리 태워버린 그로버는 말한다. “그러려고 했지. 그런데 그 여자가 뜬금없이 담뱃대에 대해 지껄이기 시작하잖아. (…) 그래봤자 중국제 쓰레기들이야. 밑면에 스티커가 붙어 있더군. 하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차누파는 조물주와 연결되는 신성한 고리야. 백인들은 감히 입에 올려서도 안 되네. 더구나 중국제 모조품을 판매하다니, 확실히 그럴 순 없지. 인디언들이 파우와우 축제에서 플라스틱 십자가를 팔지는 않잖아. (…) 그 여자는 자기가 속하지도 않은 세계를 멋대로 휘젓고 다녔어. 향모와 세이지와 삼나무, 우리 인디언에게는 신성한 약이야. 그런데 그 여자는 전부 흥정 대상으로 취급했다고.”
공예점 주인 등 몇몇을 제외하면 이 책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앎’이라는 개념 앞에 겸손하다. 그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섣불리 앎의 세계로 편입시키려 들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는 인디언 소녀를 정신병원에 가두고, 약과 주사로 치료하려 들고,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멋대로 방치하고 혹사시키는 대신, 우선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고자 한다. 우리가 앎에 관하여 비로소 이야기할 수 있게 되는 건 어쩌면 그 지점일지도 모른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얼마간 감수하고, 그 존재를 인정하며 원주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두 겹의 세계는 새로운 차원의 보편성을 띠고, 우리 앞에 펼쳐진다.
댄은 늙음에 관해 이야기한다. “자네나 그로버처럼 그저 그런 정도로 늙은 사람은 여전히 뭔가 일어나기를 기대하며 눈을 뜨지. 그 뭔가가 뭔지는 몰라. 하지만 뭔가는 일어나게 돼 있거든. 자네는 세상의 일부고 모든 것은 계속될 테니까. 하지만 늙을 대로 늙은 사람은 알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삶의 반경이 일상을 벗어나지 않는 거야. 자잘한 것들에 신경을 써야 하거든. 자식들이 찾아온다고는 해도, 그 애들에겐 자기만의 인생이 있어. 다른 노인들을 찾아가도 하는 일이라곤 옛날을 추억하거나 온갖 아픈 곳들에 대해 떠드는 게 전부지. 아니면 요즘 젊은이들 흉이나 보거나. 그러다 보면 피곤해져. 그렇다니까. 성미도 고약해지고. 살아온 날들을 반추하며 숱한 시간을 보낸다네. 내가 한 일과 그 일의 의미를 궁금해하면서. 그동안 만났던 온갖 갈림길에서 가본 길과 가지 않았던 길, 들춰보지 않은 카드들을 생각하다 보면, 뭐랄까, 죽을 만큼 외로워지는 거야. 그렇다니까.”
또 개(슝카)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 말한다. “조물주가 내리신 최고의 선물이지. 네 발로 걷는 짐승 중에 인간에게 그만한 친구는 없어. (…) 슝카는 내가 늙었다는 걸 모르네. 슝카는 내가 끔찍이도 못생겼다는 걸 몰라. 슝카는 내가 원주민인지 와시추(백인)인지도 모른다네. 슝카에겐 아무래도 상관이 없거든. (…) 우정이란, 주는 거라네. 보답을 바라지 않고 마치 선물처럼 말일세. 진정한 우정에 이기심은 가당치 않아. 친구가 중요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지. 벗들을 위해서라면 나는 기꺼이 죽을 수 있네, 너번. 벗들도 날 위해 기꺼이 죽을 테고. 헌데 백인들은 속을 알 수가 없단 말이지. 와시추를 만날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거든. ‘저이는 내게서 뭘 얻어내려는 걸까?’ 자네 세계의 사람들은 항상 서로에게서 뭔가를 얻어내려는 것처럼 보이니까. 슝카를 제대로 관찰하지 않은 거야. 만약 그랬다면 우정을 더 깊이 이해했겠지.”
인디언의 입을 통해 툭툭 던져진 이 책의 많은 말은 대개 오랜 시간 벼려진 것들이다. 그것들은은 중심 사건을 단단하게 에워싸며, 이 책의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을 중요하게 만든다. 그들의 말은 부분보다는 전체, 찰나보다는 영겁에 가까운 새로운 시공간의 차원으로, 그래서 어쩌면 진리라고 할 수 있을 법한 무엇으로 다가온다. 댄의 입을 빌리면, 인디언은 ‘뭔가의 작동 원리를 본답시고 그것을 따로 해체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각난 세상을 한데 모아 하나의 온전한 세상으로 조립하려고 노력한다.’ 그 과정에서 얻어지는 통찰은 그래서 더 묵직하게 느껴진다. 이 책의 또 다른 면면은, 이런 오래된 지혜들로 채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