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팻 콘로이(소설가)
『인비저블 서커스』는 퓰리처상 수상 작가 제니퍼 이건의 첫 장편소설로, 오래전 스스로 생을 마감한 언니의 진실을 알아내겠다는 열망으로 가득찬 열여덟 살 주인공 피비의 내면과 그 진실 찾기가 될 유럽 여정을 그리고 있다. 살아 있지만 삶의 이유를 느끼지 못하고 죽음에 사로잡힌 피비와 죽었지만 모두의 삶과 기억 속에 여전히 살아 있는 페이스. 이건은 그들 자매의 위태롭고도 복잡 미묘한 관계, 피비가 마침내 언니를 이해하고 자기 삶을 직시하게 되는 순간을 더없이 사려 깊고 섬세하게 포착해낸다. 작품 전반에 짙게 드리운 지난 세대에 대한 회한 어린 향수와 앞으로 도래할 세대에 대한 어렴풋한 기대와 희망은 긴 여운을 안긴다.
시간의 비가역성, 그 부조리와 비애를 파격적인 형식에 담은 퓰리처상 수상작 『깡패단의 방문』, 고딕소설의 신경지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 『킵』으로 국내 독자들에게도 존재를 또렷이 각인시킨 제니퍼 이건은 『타임』(2011)이 발표한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조너선 프랜즌, 조지 R.R. 마틴과 함께 이름을 올린 소설가로, 명실상부 동시대 미국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명이다. 오늘날 미국인의 삶과 연결된 다양한 쟁점에 대한 관심을 지성적이고 감각적인 문장에 담아내온 제니퍼 이건은 정형화된 접근을 거부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앞서 번역 소개된 두 작품 외에 가닿을 수 없는 장소가 불러일으키는 감각이라는 주제하에 쓴 단편 모음집 『에메랄드 시티』, 끔찍한 교통사고로 얼굴을 잃은 모델의 이야기 『나를 봐』, 2차세계대전 당시 브루클린 해군조선소 용접공으로 일하는 강인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아 올 10월 미국 출간을 앞두고 있는 시대물 『맨해튼 비치』에 이르기까지 매번 다른 스타일의 작품을 선보였다.
1995년 출간된 첫 장편소설 『인비저블 서커스』는 바로 제니퍼 이건 특유의 언어감각, 그 발원이 되는 작품이다. 신고식은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문학적 위대함을 성취하려는 작가의 예리하고 아름다운 소설(데일리 메일), 유망한 작가에게 딱 알맞은 첫 소설(워싱턴 포스트), 마음을 사로잡는 대단한 확신과 힘(뉴욕 타임스), 독창적이고 보기 드물게 지성적인 작가(앨리스 애덤스), 대단한 지성과 감성(볼티모어 선), 너무도 신선한 글에 소름이 돋고 심장이 달음박질친다(세인트피터즈버그 타임스), 첫 소설이라고는 믿기 힘들다(인디펜던트) 등의 찬사가 쏟아졌다. 제니퍼 이건은 이미 첫 작품을 통해 반드시 주목해야 할 비범한 작가임을 입증해냈다. 그리고 그로부터 십육 년 후인 2011년 퓰리처상 수상 이후 다시 한번 큰 관심이 쏟아졌다. 인물 하나하나의 내면에서 충돌하는 다양한 감정과 그에 대한 깊은 통찰력, 건조하고 지적인 동시에 감각적인 제니퍼 이건 스타일의 시작을 엿볼 수 있다는 이유로 연대기상 가까운 다른 작품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뜨거운 주목을 받았다.
한편 『인비저블 서커스』는 제니퍼 이건의 삶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유럽 여행의 경험이 반영된 소설이기도 하다. 이건은 고등학교 졸업 후 몇 달 동안 모델로 일해 모은 돈으로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현실은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고, 외롭고 의기소침한 채 불안해하며 향수에 시달리던 끝에 공황 발작까지 일으킨 그녀는 일기장의 빈 페이지에 마음의 동요를 끊임없이 기록해나간다. 여행중 그 극단적인 고립의 경험이 글쓰기가 인생에서 없어서는 안 될 본질이라는 점을 일깨워준 것 같다고 제니퍼 이건은 한 인터뷰에서 말한다. 그렇게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으로 미국에 돌아온 이건은 펜실베이니아 대학에 진학해 영문학을 공부했고, 영국 케임브리지의 세인트존 칼리지에서 학업을 이어나가며 장편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 소설을 개작한 것이 바로 『인비저블 서커스』이다.
페이스의 자기파괴, 피비의 자기발견
두 자매의 시리도록 아름다운 초상
페이스는 젊어서 죽었고, 나는 그 이유로
언니를 동경하는 것 말고 지금까지 한 게 아무것도 없네(246쪽)
1978년 샌프란시스코. 열여덟 살 피비는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그녀를 온통 사로잡고 있는 것은 언니 페이스의 ‘보이지 않는’ 존재다. 페이스는 팔 년 전 이탈리아 코르닐리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살이라는 것 외에 알려진 사실은 없다. 피비는 “하나로 연결할 수 있다면 다 합쳐서 족히 몇 년은 될” 오랜 시간 동안 이 주위를 맴돌면서 언니의 부재에 깊이 가라앉아 자기만의 세계에서 몸을 사리고 있다. 언니의, 지나간 그 시절의 강렬함을 갈망하면서도 세상사로부터 완고하게 거리를 둔 사이 정작 피비의 삶은 공허해져만 간다. 한편 페이스보다 앞서 병으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기억 역시 가족들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하지만 엄마와 오빠 배리는 아버지와 페이스를 조금씩 잊어가는 것 같아 피비는 혼란스럽다. 엄마가 재혼을 알려오고 그런 결정을 지지하는 오빠의 모습에 배신감과 원망이 극에 달하는 한편, 자신은 언제까지 과거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이대로 살 수 있을까 의문이 새삼 고개를 든다. 그리고 결심한다. “이 도시를, 나라를, 내 삶을 벗어”나기로. 피비는 유럽으로 떠나, 언니의 여정을 그대로 따라갈 계획이다. 그러다 문제의 그곳에 이르면 언니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있게 될 거라는 생각으로.
그리하여 런던, 암스테르담, 나무르, 랭스와 파리, 뮌헨을 거쳐 코르닐리아까지 피비의 긴 여정이 시작된다. 여행책자나 지도가 아닌 페이스의 엽서에 의지한 여행은 필연적으로 고통스럽다. 엽서에 가득한 낙관이 거짓이었음을 확인해나가는 과정, 다시 말해 페이스의 절망 어린 궤적을 따라가는 것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뮌헨에서 언니의 연인이었던 울프와 뜻하지 않게 재회하면서 여행은 또다른 국면으로 접어든다. 여정의 끝에서 그녀는 어떤 진실과 마주하게 될까. 눈부셨던 언니, 변화의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언제나 자유롭고 거침없었던 페이스의 삶과 죽음을 온전히 이해하고, 자신의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까.
『인비저블 서커스』에서 제니퍼 이건은 삶의 어떤 경계를 뛰어넘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분투한 두 자매의 초상을 세심하게 그려나간다. 이건은 경직된 피비와 무모하리만큼 과감했던 페이스 둘의 내밀한 감정의 영역으로 독자들을 이끌고 가, 통렬하고도 더없이 아름다운 순간들과 마주하게 한다. 1960년대 히피 문화에 탐닉한 자유로운 이상주의자인 페이스는 집안에서도 각별한 존재로, 특히 화가를 꿈꾸었으나 IBM 엔지니어로 일하다 세상을 떠난 아빠 진이 자신의 실패한 꿈을 대리 실현하려 했던 유일한 자식이었다. 이런 아빠를 위해 페이스는 매순간 겁 없이 온몸을 내던진다. 아빠의 죽음 이후에는 방황 끝에 유럽으로 가 급진단체와 행동을 함께한다. 페이스의 아슬아슬한 곡예와 같은 삶에 비해, 피비는 언니의 모든 것을 동경하며 그 맹렬함을 갈구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늘 머뭇거린다. 소설 첫 장면에서 보고 싶은 공연을 놓쳐버린 것처럼, 모두가 즐기는 파티에 너무 늦게 도착했다는 느낌이 그녀에게는 지배적이다. 뜨거웠던 이전 세대(아빠 진의 비트 세대와 페이스로 대표되는 히피 세대)와는 달리 중심에 닿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압도하고 있다. 피비는 또래들에게 비친 자기 모습이 “숫제 유령에 가까운, 정확한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 없는 투명한 형체”일 거라 상상하기에 이른다. 1970년대 샌프란시스코에서 평범하다 못해 ‘투명인간’이나 다름없는 십대 시절을 보냈다는 제니퍼 이건의 고백이 자연스레 겹쳐지는 대목이다.
지난 세대를 떠나보내는 기나긴 이별의식
스스로의 삶을 계속 살아갈 뿐
망할, 어쩌면 그런 게 모험일지 몰랐다.
살아가는 것―하루하루를 꾸역꾸역. 그냥 사는 것. (471쪽)
안개와 골든게이트브리지가 연상되는 샌프란시스코는 또한 1950년대 비트 작가들의 본거지였고 이를 발판으로 1960년대 기성의 가치관과 제도, 관습을 부정하며 자유를 부르짖었던 히피들의 탄생지였다.
제목 ‘인비저블 서커스’ 또한 샌프란시스코의 문화사에서 기념비적 사건으로 기록된 축제를 가리킨다. 1967년 2월 샌프란시스코 히피 그룹 ‘디거’와 예술가 해방 전선, 글라이드 교회의 주최로 열린 사흘간의 축제에서 음주와 포르노 관련 토론, 나체 시위 등 급진적이고 반사회적인 해프닝이 벌어졌고 이를 몇 분 간격으로 단신과 속보로 뽑은 신문이 배포되었다. 동시에 『인비저블 서커스』는 1978년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피비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모두가 각자 마음속에 품고 있는 가장 정신 나간 환상을 동시다발적으로 실행에 옮겨보자”는 축제의 취지는 피비에게 “꿈같은 얘기”일 뿐이다. 60년대의 많은 것이 남아 있지만 히피 문화의 중심지였던 헤이트 애슈베리 교차로는 사라지고 없다. 페이스와 울프는 물론 전 세계 젊은이들을 하나로 뭉치게 했던 히피-68세대는 이제 지나간 시간이다. 그 시간을 뒤로하고, 그저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는 수밖에 없음을 피비는 아프게 깨닫는다.
『인비저블 서커스』는 통찰력을 가진 캐릭터들과 그 감정의 뉘앙스를 긴장감 있게 엮어내는 제니퍼 이건의 놀라운 재능을 알리는 작품으로 손색없다. 이건의 작품 중 가장 전통적인 소설의 문법을 따르고 있어 가독성이 높고, 참신하고 생생한 문장은 각각의 매력적인 인물들에게 쉽게 몰입할 수 있게 해주며, 가족관계, 평범과 비범, 기억과 초월에 대한 묘사는 책장을 덮고 나서도 오랫동안 여운을 남긴다. 『킵』과 『깡패단의 방문』을 이미 읽은 이건의 팬들에게나, 이 책을 통해 이건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게나 만족스러운 독서 경험이 될 것이다.
▶ 본문에서
“모든 게 변하고 있어.” 페이스가 말했다. “모든 게 달라질 거야.”
모든 건 이미 달라져버렸다. 너무나 많이. “난 그대로가 좋은데.” 피비가 말했다.
“아니, 이게 더 좋아.” 페이스가 말했다. “이건 역사야. 멈출 수 없어.” (89쪽)
피비는 이제 막 떠오른 하얀 태양을 응시하면서 자신을 내던졌다. 혼자가 아니라―혼자인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었다―페이스의 일부로서, 언니의 윤곽 안에 포함된 작은 형체로서. 그래서 아팠다.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쓰라렸다. (96쪽)
페이스는 자신이 발견한 문이란 문은 전부 열었지만, 피비는 두려워서 그러지 못했다.
한줄기 섬광. 그런 후 오래도록 은은히 타오르는 불빛.
페이스는 모든 문을 열었다.
하나의 몸짓. 증류된 모든 것.
페이스는 자신을 소진했다. 자신을 내주였다. 그러자 시간이 멈추었다.
언니는 우리 둘 다를 죽였어, 피비는 생각했다. 우리 모두를 죽였어. (481쪽)
마지막에는 그래야 할 것이다. 달리 무슨 할 일이 있단 말인가? 떠나서 스스로의 삶을 계속 살아갈 뿐이다.
피비는 궁금했다. 몸을 날리던 순간 페이스도 이걸 알았을까.
시간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보였을 뿐. (488쪽)
뭔가 사라졌다. 그러나 또 뭔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것을 피비는 이해한 것 이상으로 느꼈다―도시 밑에서 팔딱이는 초조한 맥박을. 새로운 십 년이 그들 앞에 있었다. 배리의 사무실에서 정신없이 기대감에 달아오른 분위기에 전염될 때면 피비는 세상이 변모의 와중에 있다고 맹렬히 확신하기도 했다. 모두가 느끼는 것 같았다―기계의 명확하고도 논쟁의 여지가 없는 힘을, 어마어마한 부를 얻으리라는 약속을. 그것이 그들을 희망으로 채웠다. 세상이 또다시 이렇게 느껴질 수 있다니, 하물며 그 순간이 이토록 빨리 오다니 피비는 놀랍기만 했다. 그러나 그녀 자신도 그것을 느꼈다. (511~512쪽)
▶ 언론평
복부에 내리꽂힌 한 방처럼 급소를 때린다. _엘르
진실성과 압도적인 열정, 눈부시다. _보스턴 글로브
독자를 놀랍도록 아름다운 감정의 영역으로 이끄는 여정. _뉴요커
경이롭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서 미끄러져나온 단어는 샌프란시스코의 서늘한 안개처럼 땀구멍으로 스며든다. _LA 타임스 북 리뷰
『깡패단의 방문』의 팬이라면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첫 소설이라고는 믿기 힘들다. _인디펜던트
▶ 옮긴이 최세희
국민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대중음악 칼럼을 쓰고 네이버 오디오클립 방송 〈승열과 케일린의 영어로 읽는 문학〉의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다』(공저)를 썼고, 『렛미인』 『언데드 다루는 법』 『킵』 『깡패단의 방문』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