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부터 노비까지, 열 부류 백성 각각이 쓴 서사시의 종합
지난 20여 년 TV 역사 다큐멘터리 영역에서 활약해온 조윤민 작가가 야심차게 시도하고 있는 ‘지배와 저항으로 보는 조선사’ 4부작 중 두 번째 책으로 『모멸의 조선사』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조선 양반층의 지배 전략과 통치에 대응한 백성의 다양한 반응 및 그 결과를 살핀다는 측면에서 2016년에 출간된 시리즈의 첫 작품 『두 얼굴의 조선사』(글항아리)의 속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조선시대 관련 책에서 조선 지배 세력의 통치법이나 백성의 생활상을 분리시켜 각각을 다룬 책은 많지만 이 양자의 관계 양상을 적극적으로 파악하고자 시도한 책은 드물다. 이 책은 바로 이 부분을 정면으로 겨눈다. 특히 양반 관료층의 지배 전략과 통치에 대응해나간 조선 백성의 반응을 계층과 직업 별로 자세히 살피고 있다. 지배 전략을 매개로 관료 세력과 백성이 형성하는 관계 양상을 파악하고, 조선이라는 사회가 이러한 상호적인 힘의 작용에 의해 유지됐음을 드러낸다.
이를 위해서 『모멸의 조선사』에서는 조선 백성을 직업과 역할에 따라 농부·어부·장인·광부·상인·도시노동자·광대·기생·백정·노비 등 열 부류로 나누었다. 조선을 상층부의 힘을 제도와 이념 측면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이에 대응해나간 각 부류 백성의 반응을 순종과 적응, 선망과 상승, 기피와 저항이라는 세 가지 틀로 분석했다. 이를 통해 통치와 정책 실행에 따른 백성의 다양한 세상살이와 생존법을 살필 수 있다.
가령 농부와 어부를 다룬 책의 앞부분에서는 농본 정책과 민본 정책의 실상을 노동력과 재정 확보라는 측면에서 접근했다. 사회 유지와 발전에서 이들이 한 역할과 그에 따른 고통이 무엇이었는지를 드러냈다. 장인과 광부 장에서는 수공업과 광업 정책의 특징을 알아보고, 백성이 수공업과 광업을 생계로 삼고 이를 자신들 삶의 한 양식으로 형성해나간 추이를 살폈다. 상인 장에서는 상업 종사자들이 국가의 상업 정책에 대응해 어떻게 상업 발전을 이끌었는지에 주목했다. 도시노동자의 경우는 농민에서 도시빈민층으로, 다시 이들이 고용노동자로 전환되는 과정에 강조점을 두었다. 광대와 기생, 백정, 노비는 천민과 신량역천 계층의 대표 격으로 다루었다. 조선사회에서 이들이 가진 역할을 지배 세력과의 관계에서 다각도로 검토했고 이들이 처한 생활상의 어려움과 하층 신분으로서의 고통을 담아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국가라는 한 사회의 현실과 미래는 특정 계층의 일방적인 행위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통치 계층의 정책과 제도, 이에 대응한 피지배층의 일과 생산이라는 양자의 힘이 맺는 관계 양상에 따라 한 사회의 정체성이 형성되고 앞날 또한 결정된다는 사실을 조선 역사의 사례를 통해 전한다. 빛과 함께 어둠을 함께 조명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종정도 놀이판에 축약된 조선의 신분질서
조선시대 양반 집안의 아이들이 하는 놀이 중 종정도從政圖라는 게 있다. 어릴 때부터 과거시험에 대한 향학열을 고취시키고 관직에 대한 꿈을 키워주기 위해 양반가의 자제에게 장려했던 놀이다. 종정도 놀이는 ‘벼슬 겨루기’ 오락이다. 종이판에 종9품에서 정1품에 걸친 여러 관직명을 써놓고 나무막대를 굴려서 나온 수대로 말을 이동시킨다. 막대를 처음 굴려서는 문과文科·무과武科·은일隱逸·남행南行(음서)·군졸의 다섯 가지 출신을 정한다. 자기 출신 칸에서 벼슬을 시작해 누가 먼저 최고 관직에 오르는가를 겨룬다. 놀이 도중 특정 관직에 오르면 그 관직이 가진 실제 권한과 유사한 힘을 행사할 수 있다. 왕을 가까이 모시는 홍문관 관리가 되면 자기보다 앞서 높은 관직에 오른 말을 파면시킬 수 있다. 유배나 사약을 받는 경우가 나오기도 한다. 정치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 현실감 있게 반영돼 있다. 양반 가문의 아이들은 이 종정도 놀이를 통해 일찍부터 관직의 종류와 역할을 익혔다. 관직에 따라 권능에 차이가 있으며 권력에도 서열이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체득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신분제를 당연한 이치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이 종정도가 조선사회를 틀 짓는 관료 체계를 아이들의 놀이판에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라고 본다. 태어날 때부터 먹고살 걱정이 없는 양반가의 아이들은 관료 기구를 운용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통치 방식을 익히는 게 우선이었다. 그 선택받은 공간 다른 한쪽에는 어린 나이임에도 먹고살기 위해 발버둥쳐야 하는 조선의 또 다른 아이들이 있었다.
고종 13년, 거지 행색을 한 두 여자가 경주 북안면의 한 양반집 대문을 두드립니다. 열두세 살 된 소녀와 어머니로 보이는 중년의 여인인데 남루한 옷에 몸은 야위었고 며칠을 굶은 듯 얼굴엔 윤기 하나 없는 상태였습니다. 중년의 여인은 집주인에게 자신을 여자아이의 수양어머니라 소개한 뒤, 이 여자아이를 종으로 삼아달라고 청했습니다. 집주인은 거절했지만 여인은 굶어 죽어가는 사람 살리는 셈치고 거둬달라며 거듭 애원했습니다. 결국 집주인은 다섯 냥을 주고 여자아이를 종으로 삼습니다.
여자아이의 이름은 선례라 했습니다. 선례는 수양어머니를 만나기 전엔 혼자된 생모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다 생모가 개가하면서 홀로 남겨지게 되었고, 이후 수양어머니를 만나 유리걸식과 다름없는 생활을 해왔습니다. 이제 선례는 살아남기 위해 양인 신분에서 노비가 된 것이다. 그렇게 선례는 종살이를 하며 연명했지만 수양어머니는 다섯 냥의 돈으로는 삶을 이어가기 힘들었나봅니다. 선례가 종살이를 시작한 지 얼마 뒤 수양어머니는 결국 낯선 거리에서 굶어 죽습니다.
선례의 종살이는 평탄한 듯했으나 스무 살을 넘기기 전에 또 한 번의 질곡에 빠집니다. 종살이를 한 지 6년 뒤, 선례의 생모와 작은아버지가 나타나 선례를 데려가겠다며 집주인과 다툼을 벌입니다. 생모는 선례에 대한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고 우겼고, 주인은 강요가 아니라 돈을 지불하고 정당한 거래를 했으니 선례를 내줄 수 없다며 버텼습니다. 그러는 사이 선례가 종적을 감추어버립니다. 노비는 주인의 재산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주인은 마냥 앉아서 기다릴 수 없어 그간의 사정을 알아보았습니다. 예상대로 선례의 가출은 생모와 의붓아버지가 짜고 벌인 일이었습니다. 선례를 다른 부잣집에 팔아넘기기 위해 벌인 사기극이었던 거죠. 곧바로 선례와 생모, 의붓아버지에게 체포령이 떨어집니다. 그렇게 선례는 평민에서 노비로, 결국은 도망노비이자 범죄자 신세가 된 겁니다.
조선은 신분제 사회다. 태어나는 순간 한 아이가 걸어갈 수 있는 미래의 길이 한정되고 결정되었다. 양육과 교육, 결혼과 가정은 물론 직업과 경제력, 사회적 지위와 정치적 영향력까지 신분에 의해 규제된다. 국가 기구를 운용하고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계층과 의식주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물질을 생산하는 계층이 법률과 제도에 의해 나뉘어 있었다.
흔히 양반이라 일컫는 지배층은 통치에 대한 순응과 복종을 요구하며 피지배층의 일탈과 저항을 단죄했다. 왕도와 민본의 정치 이념, 인仁과 예禮의 가치를 내세우며 동의에 의한 통치를 행하기도 했다.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때로는 하위 계층과 결속하기도 했다. 백성은 대부분 권력에 순종하고 지배질서에 순응했다. 일부는 굴종하고 맹목적 충성을 바쳤다. 또 통치 계층을 선망해 신분 상승을 꾀했으며, 때로는 양반 관료에 기대어 협상을 통해 이익을 찾아나가기도 했다. 적응하고 환호하고 침묵하고 체념하는 백성, 다른 한편으론 반항하고 대항하는 백성이 있었다. 이들은 회피하고 부정하고 이탈했다. 소수이긴 하지만 이들 백성은 조선사회의 지배질서에 균열을 내는 주된 저항자였다. 이렇게 보면 피지배층은 단일한 무리가 아니라 제법 다양한 부류로 나뉘는데, 이 모두 버거운 의무를 짊어진 조선 백성이 살아가는 방법이 아닌 게 없다.
선택받은 지배층 입장에서 백성은 어쩌면 지극히 보잘것없는 종자種子였는지도 모른다. 만만하고 미미한 존재였으며, 그래서 이들의 삶은 사소하고 하찮아 보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백성이 없으면 왕도, 양반 관료도, 사대부도 존재할 수 없었다. 백성은 먹고 입고 자는 데 필요한 물질을 생산했고 권위를 내세울 의례용품을 만들었다. 체면과 위신을 세워주는 아랫사람이었다. 물자를 이송하고 판매하는 인력이었으며 국경을 지키는 병사이기도 했다.
마구잡이 통치와 끝없는 억압만으론 이런 역할을 하는 백성을 효율적으로 다스릴 수 없었다. 보살피고 시혜를 베푼다는 덕치의 정치 이념과 가르치고 이끈다는 교화의 이데올로기를 작동시켜야 했다. 조선사회라는 큰 틀에서 보면 함께 살아가야 했다. 또한 통치의 이면이나 속을 살펴보면 정치권력이 일방적으로 행사되는 경우가 드물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명령과 지배의 몸짓 자체가 그 대상에 대한 고려를 거친 뒤의 행위인 것이다. 그래서 권력은 개인이나 한 집단이 만들어낼 수 있는 어떤 힘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집단과 집단 사이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유동하는 영향력이다. 권력은 소유하는 게 아니라 행사하는 것이며, 그 대상의 반응에 따라 권력을 행사하는 자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이 책에서 양반 관료의 통치 방식과 백성의 대응을 함께 살피려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지배층과 피지배층, 통치하는 계층과 백성, 이 양자의 관계 양상을 파악하는 작업은 조선사회의 실상에 다가가는 한 방법이 될 것이다.
조선을 이끌어나간 힘: 순응과 저항의 역동성
조선사회를 유지하고 이끌어나간 동력은 지배층의 통치와 이에 대응한 피지배층 양자가 만들어내는 순응과 저항의 역동성에서 나왔다. 지배 세력은 양반 중심의 사회질서를 영구히 유지하려 했고, 백성은 지배의 전략과 통치에 동조하거나 거스르며 이 사회질서에 조금씩 균열을 냈다. 그러면 지배층은 통치 전략과 방식을 조금씩 변화시켜야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정치와 경제, 문화에서 일정한 성과가 축적되었고, 조선사회는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이 책은 서술 방식이 조금 독특하다. 각 장의 첫 절은 사료에 근거해 그 내용을 이야기나 소설 양식으로 기술했다. 일부 대화 내용이나 배경 묘사는 이야기체 구성과 맥락에 적합하게 첨가하기도 했지만 전체 내용은 조선시대에 실제로 있었던 엄연한 사실이다.
또 하나, 저자는 신분제와 정치권력의 폭압, 지배층의 수탈이 조선사회에서 유독 심했다는 주장을 펴기 위해 이 책을 집필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신분제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조선시대와 동시대 세계에서 일반적인 사회제도였다. 폭압이나 수탈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동시대 서구사회가 조선과 중국을 위시한 동아시아 문화권보다 더했다는 평가를 한다. 비교나 과장을 통해 과거의 영광을 찬양해 은근슬쩍 지배층을 미화하려는 뜻이 없듯이 당대 현실을 왜곡하고 모순을 부풀려 지난 역사를 날조하려는 의도 또한 담고 있지 않다.
영광과 위대함만으로 채색될 수 있는 역사가 없듯이 굴욕과 초라함만으로 점철된 역사도 없다. 지금 여기에서 되돌아보면 어느 역사든 거기엔 명암明暗과 공과功過, 시비是非가 있기 마련이다. 이제 우리의 지난 시간인 조선사회에 암暗과 과過, 비非에 무게를 둔 시선을 던져보려 한다. 조선시대의 명明과 공功, 시是에 대해서는 이미 뛰어난 연구자들의 허다한 조명이 있었던 터이니 말이다.
다시 그들을 그려본다. 그들은 순종했고 적응했고 수용했고 복종했다. 아부했고 시기했고 선망했고 상승하고자 했다. 기피했고 반항했고 저항했고 나서 싸웠다. 그들은 조선의 피지배자 민民이다. 압박과 수탈, 모멸과 천시 속에서도 삶의 근원적 욕망을 발산하며 생과 대를 이어간 조선의 백성, 그 모든 이를 위한 그리움을 이 책에 남긴다. 그리고 그들의 말과 몸짓, 얼굴에서 오늘 이 시대의 우리를 찾아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