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수메르 시대의 점토판에도 “요즘 젊은것들은 버릇이 없다”는 개탄이 쓰여 있었다. 세대 갈등은 어느 시기, 어느 사회에서나 문제였던 것이다. 이 갈등 속에서 청년들은 기성세대에 비해 당연히 열세이고, 사회질서를 어지럽힌다고 여겨질 때면 그들은 여지없이 지탄의 대상이 된다.
미국의 저명한 작가이자 비평가인 폴 굿맨은 몇몇 젊은이와 대화를 나누던 중 “하고 싶은 일이 하나도 없다”며 그들이 자기 존재를 낭비로 여기는 것을 보고 사회에 대한 실망감을 억누르지 못해 이 책을 써내려갔다. 고상한 목표, 노력, 가치 있는 업적을 이룰 잠재력을 지닌 아이들은 쓸모없고 냉소적인 ‘동물’이 되거나 아니면 시스템에 갇혀 체념하는 삶을 산다. 이것은 1960년대 미국이나 오늘날의 한국이나 마찬가지다. 삶은 계속되고, 세상은 다음 단계의 삶을 응원하리라는 확신이 지금의 청년들에겐 없다. 이것은 우리의 고질병이고, 결국 그들을 실존적 존재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청년이 주목받는 사회가 문제다
청년 문제가 정말 다른 세대와 분절된 그들만의 문제일까? 폴 굿맨은 그들의 반항, 비행 청소년 범죄, 혹은 조직 구성원으로 잘 살아가는 것 모두를 시스템에 대한 반응으로 보았다. 거의 모든 청년은 대안 없는 시스템을 참고 견딘다. 스스로를 흙수저로 계급화하고, N포 세대로 자기를 정의하는 우리에게도 이 점은 마찬가지다.
특히 ‘비행 청소년’에 대한 대책으로 어른들은 그들에게 소속감을 주고, 이로써 그들을 ‘사회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굿맨은 이 통념을 뒤집는다. 이들에게 ‘사회화’의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아무 의미도, 쓸모도 지니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청소년의 병리적 행위가 사회를 어지럽히는 게 아니라 사회적 병리가 청소년의 비행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사회학자 엄기호의 말대로 ‘청년’이 통째로 주목받는 사회는 이미 그 자체로 문제가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한국에서 청년들은 생존을 위해 ‘이번 생은 망했어요’라는 식의 무기력을 전략으로 택한다. 이 경우 ‘사회화’되지 못하고 사회 밖으로 밀려난 이들이 문제일까. 과연 이 사회는 소속감을 가지고 사회화할 만한 가치가 있을까? 이것이 폴 굿맨이 의문을 품으며 화살을 거꾸로 되돌린 질문이다.
사회화 기관인 학교, 기업, 정부 관료 체제에는 무관심, 무기력, 냉소주의가 깔려 있고, 그 속의 구성원들은 시스템 속에서 ‘쥐 경주’를 하듯 내달리는 삶을 살고 있다. 굿맨이 진단한 미국 사회는 ‘완전히 폐쇄된 방’이었다. 쥐 경주에서 앞서거나 뒤처지든, 애초에 경주에 참가하는 것을 포기하든 부조리한 사회는 젊은이를 ‘바보’로 성장하게끔 만들고 있는 것이다.
시스템의 문제는 그것이 너무 잘 작동하는 데서 기인한다
이 책이 출간되자마자 미국 사회의 황폐화된 정신을 고발하는 보고서를 마주한 젊은이들은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고 좌파가 몰락했으며 매카시즘의 열풍이 불던 당시 청년들은 냉전 문화의 굴레에 진절머리를 냈다. 그런 시대 상황 속에서 1960년에 초판이 출간된 이 책은 신좌파의 고전이 되었고 현재까지도 베스트셀러로 자리잡고 있다.
“모두가 좋은 말만 할 뿐” 마치 사회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듯 살아가는 성인들을 향해 쓴소리를 주저하지 않았던 굿맨은 직설화법으로 실명까지 거론하며 미국 사회를 해부했다. 당시 자신들의 성장에 도움을 줄 ‘어른 집단’이 부재한 상황에 맞닥뜨린 젊은이들에게 굿맨의 책은 아렌트, 카뮈, 프롬의 도서와 함께 읽혔다. 젊은이들의 반항과 체념을 통해 사회와 조직의 문제점을 읽은 그를 청년들은 ‘열광적인 동반자’로 여겼다.
당시 미국은 베이비붐 세대가 경제 성장을 이끌고, 첨단 기술이 발전해 우주로 위성을 발사하는 등 표면적으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반면 굿맨에 따르면 젊은 세대의 모습은 다음과 같았다.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국가나 고향을 사랑하지 않으며 허우적대는 하루를 살고 있다. 냉전 시대의 국가 권력에 의해 애국심은 변질되었고, 젊은이들은 무기력한 채 성년에 접어든다.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과 달리 개개인은 제 손으로 할 줄 아는 게 없고 시스템 속에서 목표라곤 돈 버는 일밖에 없는 ‘바보’가 되어간다. 사회의 부는 팽창하고 중산층은 확대되는 듯 보이지만, 평균 수준의 삶을 영위하지 못하는 이들은 사회 밖으로 밀려나 눈에 띄지 않는 존재가 된다.
풍요롭지만 부조리한, 사람이 낭비가 되는 사회
분출되는 불만을 수렴할 창구는 과연 있을까. 굿맨은 견고한 듯 보이는 이 시스템이 사실상 인간 본성에 어울리지 않는 건 아닌지 반문한다. 조직화된 사회는 조직 내 인간의 주체성을 상실하도록 조장하거나 방임한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자기 역할을 수행할 뿐 발전도 퇴보도 하지 않는다. 시스템은 문제없이 굴러간다. 조직에 포섭되지 못한 비행 청소년이나 비트 세대도 고유한 능력을 억압받으며 살아가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서 학력이 낮거나 계급이 낮은 경우 일탈하는 청소년, 청년이 생겨나지만, 그들의 일탈은 바보 같거나 종종 대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 책 출간 당시 사회 문제로 지목되었던 비트 세대를 이해하고 옹호하기 위해 굿맨은 비트 시인이자 소설가인 잭 케루악과 앨런 긴즈버그를 비평한다. 그들의 작품을 통해 방황하는 젊은이들, 보헤미안적이면서 공동체주의적인 비트족을 분석하는 가운데 잉여적 존재로서 그들에게 더 이상 열심히 일하고 자본을 축적할 동인이 없음을 읽어낸다. 자본주의에 충실한 매디슨 가, 월가의 방식은 젊은이를 성장시킬 수 없다. 그러나 사회는 개인의 성장 없이도 분주하게 돌아간다.
쓸모없고 의미도 없는 일자리
폴 굿맨은 일자리라는 가장 단순한 변수로 사회와 개인의 역학을 말한다. 일자리를 얻을 수 없는 상황에서 어른이 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정말 일자리가 없는 걸까? 사는 데 필요한 식량과 주거 공간을 마련하는 일, 이것이 폴 굿맨이 정의한 ‘남자의 일’이다. 하지만 거의 완전고용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문제는 일자리의 질이다. 개인이 쓸모없다고 여겨지게끔 하는 일, 가령 과잉 소비를 조장하는 광고를 만들거나 그 소비를 충당하기 위한 지속적인 생산을 이어가는 일이 넘쳐난다. 즉 수익성은 높지만 쓸모는 없는 직업과 상품이 오늘날의 풍요를 뒷받침한다. 사람들은 쉽게,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애쓸 뿐 ‘자신의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어렵다. 허츠버그의 『직무 태도』에 따르면, 일에 대한 흥미가 안정성 다음으로 중요한 반면, 임금, 근무 환경, 사교, 노동 시간, 편안함, 상여금 등은 중요도가 훨씬 덜하다. 하지만 우리의 일자리는 이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개인의 성장 없이 사회 발전도 없다
굿맨은 여러 사회 문제 가운데 교육과 학교 개혁에 집중했다. 이 사회가 개인의 특성이나 능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사회 구성원 역시 무감각해져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연결고리는 교육이라고 본 것이다. 특히 교육이 어린아이들을 기존의 사회적 역할에 적응시키고 역할놀이에 순응하게 하려는 데 방점을 찍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내가 살고 있는 사회는 내 것이다”라는 의식을 강조했는데, 이는 자기를 스스로 일으켜 세우는 일과 사회를 재건하는 일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 굿맨이 주목한 것은 인간 본성, 특히 목표를 세우고 이를 향해 추동하는 움직임이다. 책 곳곳에서 그는 자기 의사를 표현하고, 예술에 참여하는 문화를 강조하고 있다. 그가 제시한 여러 급진적 프로그램에 휴머니즘 요소가 자리할 뿐 아니라, 그는 문화와 개인의 삶을 정치적 변화와 연관 지으며, 시민이 공개 토론을 통해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나아가 도시 계발론, 공동체 이론과도 맞닿아 있다. 폴 굿맨이 강조한 급진적 분권주의에 따른 지방 자치나 상호 유대 공동체 등은 도로시 데이나 제인 제이컵스와 같은 동시대인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고, 이반 일리치 등의 무정부주의자에게도 영감을 주었다.